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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 친일인명사전, 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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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회의서 일제 입장 용어 강요, 조선일보 폐간되자 조광에 일제전쟁 미화…수차례 침략전쟁 옹호 강연도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윤경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를 “고백과 성찰을 위한 기록”이라 했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은 서문에서 “참회와 화해의 첫걸음이 되길” 바랐다. 이는 희망사항으로 끝났다.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조광 발행인)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고,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에서도 방응모를 친일파로 규정하자 조선일보 측은 반발했다.

2010년 1월 방응모의 양손자 방우영 전 조선일보 명예회장은 “방응모 전 사장이 친일행위를 한 적 없다”며 정부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방우영 전 회장이 2016년 세상을 떠나자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등이 다툼을 이어갔다. 법원에선 방응모를 끝내 친일파로 봤다. 다만 8년에 걸친 소송에서 친일행위의 범위가 줄었다.

▲ 계초 방응모. 원래 호는 춘해였다가 뒤에 계초로 고쳤다. 친일인명사전에선 방응모를 조광 발행인으로 분류했다.

원래 반민규명위에선 잡지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 일제에 군사물품을 납품한 조선항공공업에서 발기인·감사를 지낸 행위, 조선총독부 관변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활동 등 세 가지를 친일행위로 봤다. 대법원은 이 중 조광에 일제 동조 논설을 쓰고 일제 징병을 권유한 행위만을 인정했다.

여전히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는 조선일보와 방 사장 일가가 방응모의 친일행적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서다. 방응모는 자신의 친형 방응곤의 둘째 아들 방재윤을 자신의 양자로 삼고, 방재윤의 아들은 조선일보 사주를 지낸 방일영과 방우영이다. 방상훈 현 조선일보 사장은 방일영의 첫째 아들이다.

이에 미디어오늘은 법원 판결취지와 방응모가 언론사 사주라는 점을 고려해 친일인명사전 내용 중 언론활동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살펴봤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해 백범묘소 앞을 찾은 다음날인 2009년 11월9일 경향신문 1면 사진기사.

방응모가 첫 인연을 맺은 신문사는 동아일보다. 그는 1884년 1월3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잠깐 교편을 잡았고 변호사사무실에서 대서업을 하거나 여관업 등에 종사하던 그는 1922년 6월 동아일보 정주분국을 인수한 뒤 지국으로 승격되자 정주지국장이 됐다. 1927년 5월 동아일보 정주지국장에서 물러나 동아일보 고문을 맡았다.

방응모는 금광개발로 큰 돈을 벌어 그 중 일부로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1924년 평안북도 삭주의 교동광업소를 인수했다가 1932년 교동광산을 135만원에 일본 중외광업주식회사게 팔았다. 1932년 6월 조선일보 영업국장, 1933년 3월 조선일보 부사장, 같은해 7월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1940년 8월 조선일보 폐간 때까지 재직했다. 1935년 잡지 ‘조광’을 창간했다.

1936년 8월 경쟁신문사의 불행이 시작됐다.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 조선중앙일보가 휴간하자 조선일보는 전국에서 발전 자축회를 개최하는 등 사세확장의 기회로 활용했다. 이후 방응모는 본격 친일행위에 나섰다.

그는 1937년 2월 원산 순회강연에서 “조선일보는 다른 어떤 신문도 따라오지 못하는 확고한 신념에서 비국민적 행위를 단연 배격해 종국까지 조선일보사가 정한 방침에 한뜻으로 매진한다”는 망언으로 참석자들에게 봉변을 당했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1월 조선일보 간부회의에서 주필 서춘이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 등 용어를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으로 고치자고 주장했다. 일제 입장의 표현을 쓰자는 주장이다. 편집국장 김형원과 영업국장 김광수가 반대하자 방응모는 서춘에게 힘을 실었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몇십만원 손해를 봤고 3·1운동 때처럼 신문이 민중을 지도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총독부가 조선일보 지면이 ‘국민적 입장’으로 변했다고 평가했다. 1938년 2월 총독부의 언론통제정책에 협조하기 위해 조선 내 일간신문 25개사가 만든 조선춘추회 발기인 겸 간사로 활동했다. 또 방응모는 수차례 강연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이 평화를 위한 활동이라고 왜곡·미화했고, 조광에 글로 남겼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당했고 방응모는 월간지 조광 발행인으로 취임해 친일활동을 이어갔다. 같은해 11월호 ‘조광’ 권두언에서 “국민된 자로서 누구나 실로 최후의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태평양전쟁 개전소식을 들은 뒤 감상을 적은 1942년 2월호 글에서 영국과 미국을 “동양의 원구자, 동양 전체의 죄인”으로 칭하며 “대동아전쟁은 그들에게 동양을 이탈해 세계 평화를 도모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응모는 일제가 전쟁에 이겨야 한다며 조선 민중에게 다음을 요청했다. 첫째, (일제)군관 당국을 절대 신뢰해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 것. 둘째, 일하지 않는 사람은 국민이 아니라는 관념을 가지고 국민개로운동(국가총동원)에 동참할 것. 셋째, 장기전을 대비해 물자를 절약할 것. 넷째, 전비확충을 위해 저금을 많이할 것 등을 강조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돼 방응모의 정확한 사인, 사망시기 등은 확인할 수 없다.


조선일보가 말하는 방응모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금광왕’

조선일보는 어렵던 신문사를 인수해 경영난을 돌파한 인물로 이 신문을 이끈 30인 중 한 명으로 방응모를 기록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이 신문사는 1932년 말 판권을 장악한 사채업자 임경래와 이에 반대하는 기자들 분란으로 신문을 제대로 발행하지 못했다. 당시 사장 조만식이 폐광 개발로 금맥을 발견한 방응모에게 경영을 부탁했다. 조선일보를 살리려 노력하던 주요한 역시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 인수를 설득했다.

방응모는 동아일보 정주지국장 경력이 전부일 뿐 서울에선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마흔살에 접어든 1924년 삭주 교동(다릿골) 폐광을 뚫기 시작해 3년 만에 금맥을 발견해 종업원 1000여명을 거느린 광산으로 성장시킨 인물로 알려졌을 뿐이라고 이 신문은 기록했다.

조선에서 금광개발로 거부가 된 사람은 방응모 말고도 최창학과 김태원 등이 있었다. 이들 성공으로 당시를 ‘황금광 시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방응모는 자선사업 정도였던 신문사업에 뛰어들었다. 조선일보는 잡지 ‘삼천리’ 1933년 10월호에서 “신문사업은 아직 소모사업”이라며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씨를 본받자”고 한 부분을 인용했다.

▲ 조선일보를 이끈 사람들 30인 중 하나인 방응모 전 조선일보 사장. 사진=조선일보 홈페이지 갈무리

방응모는 50만원을 내 조선일보를 주식회사로 바꿨다. 당시 동아일보 불입 자본금이 35만원, 매일신보(총독부 기관지) 자본금이 50만원이었다고 전했다. 방응모는 1933년 4월27일 ‘드리는 말씀’에서 “(조선일보는) 우리 조선 민중의 공유물”이지 “몇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고 했다.

방응모 인수 이후 조선일보가 성장했다. 1933년 조선일보 부수는 2만9341부로 동아일보(4만9945부)와 2만부 가량 차이가 났지만 방응모 사장 취임 3년 만에 6만626부로 동아일보(3만1666부)를 두배정도 앞섰다. 1935년 언론사 최초로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했고, 월간지 ‘조광’, ‘여성’, ‘소년’을 창간했다. 일제의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해 1940년 1월 출판부를 독립해 조광사를 설립했다.

방응모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다. 안창호가 입원했을 때 500원을 냈고, 안창호가 세상을 떴을 때 조위금을 내 장례를 치렀다.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 독립운동가 일송 김동삼, 만해 한용운 선생 등의 장례에도 자금을 댔다. 또 독립운동가 소식지를 찍어내는데 활자를 제공하기도 했고 ‘이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줬다.

친일 논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방응모는 일제 요구로 시국강연에 불려 다니거나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렸는데 이 단체는 본인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 지도급 인사들이 망라됐다고 기록했다.

방응모는 1950년 5·30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한 뒤 6·25 전쟁 발발 후 자택에 머무르다 7월6일 납북됐다고 한다.

<2020-03-03> 미디어오늘

☞기사원문: 친일인명사전, 조선일보 방응모를 뭐라고 기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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