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총칼로 대한제국을 삼킨 일본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각종 제도를 꼼꼼하게 손보기 시작했다.
‘한국병합조약’ 체결과 함께 제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시총독으로 임명하고 ‘조선 총독은 법률이 필요한 사항을 제령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의 긴급 칙령을 발포하였다. 그리고 1910년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관서관제를 공포하여 총독부를 설치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 관리들의 옷차림도 새롭게 규정하였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조선총독부 관리의 복식을 살펴볼 수 있는 <제국복제요람帝國服制要覽>(이하 요람)이다. 요람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바로 다음해인 1911년(명치 44년) 1월 1일, 일본의 오사카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 부록(제9828호)으로 발행되었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 복제는 1911년 6월 23일(칙령 제176호)에 제정되었기 때문에 요람은 조선총독부복제는 통감부 시절의 복제를 그대로 따라한 것[襲用]이라고 해설하고 있다.
도판 상단의 ‘帝國服制要覽’을 중심으로 우측에 ‘육군복제’, 좌측에 해군복제를 배치하고 부분별로 상세하게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복제 중 군복의 비중이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요람의 중앙에는 제복을 입은 군인과 관료들의 풍경을 그린 삽화를 수록하여 제복 착용의 예를 보여준다.
삽화 둘레는 일본 본국에서 착용하였던 ‘문관대례복’, ‘외교관대례복’, ‘유작자有爵者대례복’ 등 관료들의 복제와 ‘경찰관’, ‘사법관’, ‘세관’, ‘철도원’ 등 소속관서 직원 복제가 나열되어 있다. 또한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조선총독부’를 비롯하여 대만, 관동주關東州 지역의 관복자료가 소개되어 있다. 테두리에는 일제의 훈장을 그려 배치하였으며 요람의 하단 양 옆에는 복식과 훈장에 대한 ‘도해圖解’를 넣어 요람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였다. 즉 요람은 일제와 식민지 관료들이 착용하였던 복식의 도식을 하나로 엮어 그림으로 보여주는 ‘종합복제도판’인 셈이다.
이러한 복식은 일제 관료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조선민중들에게는 낯선 모습으로 비춰졌다.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 당시 조선 정부는 ‘의관제도에 관한 건’을 발표하여 ‘외국의 의복을 사용하여도 무방하다’는 내용의 정부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단발령에 대한 거부감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당시 조선민중은 이런 모습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거부감을 표시하는 경 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대한제국이 들어서자 정부는 1900년 ‘문관복장규칙’을 공포하여 관리들의 복장을 모두 서양식으로 바꾸도록 했고 고종 황제는 단발과 함께 복제도 서양식으로 차려입고 세상에 나타났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관복에도 변화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변화는 대한제국 상징으로 사용되던 무궁화와 오얏꽃 무늬가 일제의 오동무늬로 변하게 되었다. 즉, 나라를 빼앗김과 동시에 상징도 빼앗긴 것이다.
조선민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는 옷차림 중 하나는 칼 찬 제복 차림의 경찰과 학교 교원이었다. 식민통치의 시작은 바로 지배자의 권위와 위압감을 통한 공포정치였다. 따라서 이러한 복제는 의상이 단순히 하나의 장식품이 아니라 한 시대의 특징적인 내러티브를 보여주기도 한다.
의상은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는 특권적인 대상이기도 했다.(김은산, <기억극장>, 2017) 제복과 칼은 1910년대의 시대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조선민중에게 칼 찬 경찰과 교사는 위협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조선총독부 및 소속관서직원 복제규정은 1919년 8월 20일 칙령 제403호로 폐지된다. 헌병 경찰제 대신 보통경찰제를 실시함과 동시에 교사들이 제복을 입고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바로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조선통치 형태를 형식적으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는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3·1운동은 위압적인 복제에서도 변화를 이끌어내 공포 교실의 상징이었던 칼 찬 제복 차림의 교사도 평상복 차림으로 바뀌게 하였다.
• 강동민 자료팀장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