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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그는 일제에 충성한 일본군 장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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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 [편집자말]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신응균 묘지 아버지 따라 친일파가 된 아들, 대한민국은 ‘포병의 아버지’라 불렀다 친일파 신응균의 묘는 국립서울현충원 가장 안쪽에 자리한 일본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 건너편에 위치한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에 위치해 있다. ⓒ 김종훈

1945년 4월부터 시작된 일본과 미국의 오키나와 전투는 치열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신응균 스스로도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해방 후 한참이 지나서야 “미군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라는 말을 듣고 미군에 투항한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1946년 5월 신응균은 수년 만에 만난 부인에게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했다. 당시 그의 부인은 훗날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가 된 노라노(NORA NOH)씨다.

“가까스로 살아나 산속에 숨어 지내며 게릴라전을 계속했소. 그러다 부상을 당해 어느 일본 여인에게 구조되었소. 그리고는 그 여인의 집에 은신하며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았었소. 그런데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들이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준다지 않겠소. 그 소문을 듣고 나는 용기를 냈소.” – <나의 선택 나의 패션> 중 일부 / 중앙일보. 2006.12.26.

▲ 전역 후 국방부차관에 임명된 신응균 ⓒ 국가기록원

신응균은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육사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이다. 신응균이 태어날 때 신태영은 일본 나고야 3사단에서 복무 중이었다.

신응균은 아버지를 따라 일본 육군사관학교 53기로 입학한 후 스무 살인 1940년 2월 졸업했다. 이후 일본 육군과학학교 포병과, 육군중포병학교에서 신식 군사기술을 습득, 42년 12월에 대위로 진급한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신응균은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일본군 장교’에서 ‘대한민국 장교’로 변신

1946년 3월,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신응균은 다른 친일파 출신 군인들과는 다소 다른 행보를 걸었다. 진명여고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하지만 1948년 7월, 제주 4.3 항쟁과 남한 단독정부 출범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다시 군으로 들어갔다.

항공이등병으로 입대해 보좌관으로 역할하며 국방법과 국군조직법 등을 기초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는 일은 고위직 업무였지만 직급은 이등병이었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에 “신응균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것을 반성하는 뜻으로 이등병으로 입대했다는 설도 있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신응균은 이등병으로 입대한 지 한 달만인 48년 8월, 대한민국 육군 장교가 됐다.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1949년 3월, 병기에 관한 모든 실무를 책임지는 특별 참모부서의 우두머리인 육군본부 병기감을 거쳐 호국군 간부학교 교장, 포병연대장, 육본 포병감 겸 포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 땐 야전포병사령관으로 활동했다. 야전포병사령관은 대한민국 국군 포병의 최고 책임자다.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은 신응균을 두고 ‘한국 포병의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그는 2사단장, 육군관리부장을 거쳐 육군 중장에 올랐다. 48년 7월 이등병으로 입대한 지 만 7년도 안 돼 대한민국 육군 3성 장군이 된 것이다.

1959년 별 세 개를 단 장군으로 예편한 신응균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주 터키대사로 부임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1961년에는 국방부 차관을 거쳐 주 서독대사로 임명됐다.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 초대 국방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됐으며 73년부터 82년까지 재향군인회 부회장을 지냈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한 신응균

▲ 1945년 6월 7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오키나와 전투 상황 ⓒ 공훈전자사료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신응균이 일본군 장교로 오키나와 전투에 적극 참여한 사실’을 근거로 ‘국가공인 친일파’로 결정해 발표했다.

“신응균은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중포병학교에서 복무하던 중 전세 악화에 따라 오키나와에 파견됐다. 신응균은 독립 중포병 제100대대 중 일부를 직접 지휘하면서 종전까지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전에 직접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위원회가 신응균의 보고서에 직접 인용한 후지와라 아키라의 <일본군사사>에 따르면 “(오키나와 전투는) 적의 손에 함락되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은 천황제 이데올로기 전쟁관이 만든 비극”이었다. “3개월의 격전 끝에 오키나와 의용군을 포함한 약 10만의 수비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 과정에서 은신처와 식량을 빼앗긴 20만의 오키나와 현민 역시 전화의 희생양이 됐다.”

신응균 자신도 오키나와 전투 참여에 대해 <(일본 육사·해사)동기생사 정간보>에 기록을 남겼다.

“우리 대대는 1944년 6월 중포교에서 편성된 현역병 정예부대였다. 7월 중순 큐슈 북단에서 승선해 오키나와로 향했다. 미국 잠수함이 출몰하는 위험한 항로였지만 우군기의 계속된 호위로 비밀리에 무사히 나하에 상륙했다. 나는 선임 소대장이었기 때문에 대대 주력으로부터 떨어져 89식 150mm 캐논포 2문의 소대를 이끌고 오키나와 본도 북부를 맡고 있는 독립혼성 제44여단에 배속됐다.”

▲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평화의 비에는 많은 꽃들이 놓여져 있습니다. ⓒ 제주다크투어

신응균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 오키나와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구축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대부분 ‘군부(군대에 소속된 잡역부)’라는 이름을 달고 강제동원됐지만 정확한 규모나 피해 상황은 지금까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중·일 3국 공동역사편찬위원회가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에는 “주민 사망자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집단자결로 내몰려 죽은 경우와 스파이 혐의로 살해된 경우, 피난했던 참호에서 군대가 쫓아내 죽은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면서 “총알받이로 내몰린 오키나와 주민과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 온 한국인‧대만인 등 식민지 주민, 군국주의에 세뇌당해 스스로를 소모전에 바친 어린 병사들이 오키니와 전쟁의 희생자”라고 기술되어 있다.

90년대 들어 오키나와 남부에 위치한 평화공원 안에 ‘평화의 비’가 세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리지 않고 24만여 명의 전사자 이름이 새겨졌다. 이 중에는 한국인 364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 82명, 대만인 34명 등의 이름도 포함됐다.

박정희 건너편의 신응균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에 신응균의 묘가 있다. ⓒ 김종훈

1996년, 신응균은 일흔 다섯 나이에 사망한 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1묘역에 묻혔다. 김백일,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과 마찬가지로 국립묘지법 제5조 1항 마항목 “장성급 장교 또는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 중 전역·퇴역 또는 면역된 후 사망한 사람”이라는 게 근거다.

두 마리 호랑이 석상이 지키고 있는 장군1묘역 입구 바로 뒤쪽이 신응균의 묘다. 그의 묘 건너편에는 신응균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4기수 후배인 박정희 대통령 묘소가 있다.

그의 묘 하단에는 “조국의 국방, 외교, 과학기술분야는 물론 로타리인으로서 초아의 봉사활동에 이르기까지 부끄럼 없는 소신으로 다방면에 업적을 남겼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신응균의 묘는 2009년 그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규정된 이후에도 그대로다. 현행 상훈법 제8조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 신응균 (1921~1996) – 일제강점기엔 일본 군인, 해방 후엔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일본 육사 출신이자 30년 넘게 일본 군인으로 복무한 친일파 신태영의 장남으로 1921년 일본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1940년 2월 스무살 나이에 일본 육사 53기를 졸업했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가 발발하자 일본군 장교로 참전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는 “신응균은 독립 중포병 제100대대 중 일부를 직접 지휘하면서 종전까지 일본군의 오키나와 방어전에 직접 참여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응균이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해 활약했을 당시?오키나와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끌려와 비행장 구축 등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해방 후엔 미군에 투항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육군본부 병기감, 포병연대장을 거쳤다. 한국전쟁 땐 야전포병사령관으로 활동, 대한민국 국군은 지금도 그를 ‘한국 포병의 아버지’로 부른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2020-03-3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대한민국 포병의 아버지? 그는 일제에 충성한 일본군 장교였다. 신용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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