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대통령 직속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공인 친일파’ 1005명을 발표했다. 이중 김백일, 신응균, 신태영, 이응준, 이종찬, 김홍준, 백낙준, 신현준, 김석범, 송석하, 백홍석 등 11명은 현충원에 잠들어 있다. 오마이뉴스는 대한민국 101주년을 맞아 현충원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들의 실상을 소개한다.[편집자말]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송석하 편에는 “1937년 9월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송석하가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그만큼 일제가 인정한 ‘인재’였다는 뜻이다. 송석하 역시 만주군 시절 일제의 기대에 부응했다. 특히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할 목적으로 설립된 만주국 간도특설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송석하. 1916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1999년 사망했다.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34년 장춘외국어전문학원을 수료했다. 이후 1936년 6월 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37년 9월 5기로 졸업했다. 견습군관을 거쳐 그해 12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송석하는 보병 27단에 배속돼 활동했다. 간도특설대가 창설된 이후에는 특설대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했다. 1941년 중위를 달고 1944년을 전후해 만주국군 상위(대위)로 진급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송석하의 공식보고서에 “1937년 11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이래 일본의 패전 때까지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으로 복무했다”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했다.
조선인 이범익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특수부대
위원회는 송석하의 보고서에 1993년 길림인민출판사가 출간한 <위만군사>를 인용해 ‘특설부대성립의 역사적 배경과 조직연혁’이란 항목을 넣었다.
“7.7사변(37년 중일전쟁의 단초가 된 사건 – 기자 주) 후, 동북항일무장세력은 부단히 장대해져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일본의 큰 위협이 됐다. 당시 위만주국 간도성장 이범익이 일본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일본이 제기한 ‘치안숙정’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자발적으로 조선총독부에 조선청년들을 모집해 항일연군을 ‘토벌’하는 특설부대를 조직할 것에 대한 건의를 제기했다.”
여기서 위만주국이란 만주국이 가짜국가였다는 뜻에서 만주국에 위를 붙인 것으로 중국은 만주국과 관련된 모든 단어에 ‘가짜’ 또는 ‘유사’라는 뜻의 ‘위(僞)’자를 붙인다.
위원회는 “일본 측이 이범익의 건의를 접수하고 즉각 건립할 것을 결정했다”면서 “안도현치안대, 훈춘국경감시대, 봉천만군군관학교, 기타 만군학교에서 일본인 군관 7명, 조선족 위관 9명, 조선족 사관 9명을 선발해 특설부대 설립을 준비했다”라고 덧붙였다.
충북 단양 출신인 이범익은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초반 경북 금산군수, 달성군수, 예천군수, 칠곡군수 등을 지낸 뒤 1921년 3월부터 조선총독부 내무국 내무부장으로 근무했다. 1929년부터 강원도지사를 지냈고 1934년 4월 충남도지사로 전임했다. 1937년 11월 만주국 간도성 성장에 임명돼 간도특설대 창설을 제안했다. 해방 후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 됐지만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해방 후 승승장구한 장군 송석하
해방 후 송석하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송석하의 선택은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그는 단기과정을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그의 육사 동기 중에는 신징군관학교를 나와 만주국에서 근무하다 신현준과 함께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꿔 귀국한 박정희 대통령도 있었다.
1948년 육사를 졸업한 지 2년도 안 된 시점에 송석하는 육군 소령으로 특진해 제2연대 부연대장이 됐다. 그해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1개 대대를 이끌고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1949년 8월 수도경비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한 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20사단장이 돼 참전했다. 1955년 1월 별 두 개인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1946년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해 1955년 1월 육군 소장이 되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1961년 육사 동기인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송석하는 한국국방연구원 원장에 임명됐다. 1963년 송석하는 전역과 동시에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겸 사무국장으로 임명됐다. 1965년 민방위개선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1969년에는 한국수출산업공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2년에는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도 맡았다. 1999년 1월 14일 만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틀 뒤인 1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상단에 안장됐다.
한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작성된 공식보고서에 “만주국군 출신 송석하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10호, 19호에서 규정하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라고 평가했다.
특별법 2조 10호에는 “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가, 19호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해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로서 일본제국주의에 현저히 협력한 행위”가 각각 명시돼 있다.
“장성급 장교”라는 이유로 1999년 1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에 안장된 송석하는 정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행 상훈법에는 “서훈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나 국가 안전에 관한 죄를 범해 형을 받거나 적대지역으로 도피한 경우, 형법·관세법·조세범 처벌법 등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사형·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금고형을 받은 경우에만 서훈을 취소할 수 있다”라고 돼있다.
▲ 송석하 (1915~1999) – 만주국 황제에게 금시계 받은 조선인 1937년 봉천군관학교 5기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만주국 황제가 주는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한 뒤 보병으로 활동했다. 간도특설대 창설 후에는 기관총박격포중대에서 복무하면서 “간도특설대의 주요 간부로 항일무장부대를 공격하고 무고한 민중을 탄압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간도특설대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 통역으로 시작해 만주 거주 조선인 친일파의 거두로 자리매김한 이범익이 일본 측에 제안해 만들어진 항일무장세력 탄압 특설부대다. 해방 후엔 김백일, 김홍준, 신현준, 김석범, 백선엽, 정일권 등 여타의 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처럼 대한민국 국군으로 신분을 바꿨다. 1955년엔 육군 소장까지 올랐다. 육사 동기인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이후엔 한국국방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이후에도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상임위원, 재향군인회 안보위원장 등 승승장구했다. ⓒ 오마이뉴스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11인 묘지 찾기
(http://www.ohmynews.com/NWS_Web/event/snmb/index.aspx)
☞ ‘현충원 국가공인 친일파 이장 촉구’ 청와대 국민청원 함께 하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87052)
김종훈 기자
<2020-04-08>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해방 후 신분 바꾼 친일파, 죽어서도 대접 받다 송석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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