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지킴이 이이화
출판인은 자기 민족의 역사를 담아내는 책을 기획해야 한다는 신념 같은 것이 나에게 있다. 나는 1976년 출판사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름 우리 국가사회가 당면하는 문제를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풀어내는 책을 만들어왔다. 1979년에 시작해 1989년 전 6권으로 끝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우리 현대사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의 일단이었다. 1986년에 시작해서 1994년 한꺼번에 펴내는 전 27권의 <한국사>는 한 출판인의 민족사에 대한 나름의 헌정이었다. 170여명의 연구자가 참여하는 한길사의 <한국사>는 근·현대사를 대폭 강화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펴낸 <한국사>에 ‘관찬’이 아닌 ‘민찬한국사’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사>는 학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서술됨으로써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나는 ‘국민독본’ 같은 한국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국사> 출간 직후부터 했다. 1980년대의 치열한 민족·민주운동이 세계화시대를 맞으면서 ‘한국사’가 더 필요할 터였다.
나는 그 무렵 대형기획 ‘한길그레이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동서고금, 인류의 위대한 지적·정신적 유산을 집대성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지속되는 한길그레이트북스를 통해 인류 보편의 지혜와 사상을 우리 사회가 새롭게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동시에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독자들의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키던 ‘로마인 이야기 현상’에 대응하는 ‘한국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누가 이를 해낼 수 있을지 궁리했다. 대학에 적을 두고 있는 교수나 연구자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논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 우리 삶에 살아 있는 역사의 육성을 들려주는 저술가라야 한다. 어디에 귀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역사가’라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 1994년 가을 ‘아치울의 결의’
연구자 170명 참여한 ‘한국사’
학술적이라 일반 독자에 부적합
호평 받은 ‘로마인 이야기’처럼
‘아름다운 한국사’ 필요성 느껴
이이화(李離和·1937~2020)! 1994년 가을, 나는 아차산록의 아치울 마을로 이이화 선생을 방문해 ‘대중이 감동하면서 읽는 한국통사’를 써보자고 제의했다. 10년 정도 걸리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정치사 중심이 아니라 사회사·생활사·문화사를 총합해야 한다. <로마인 이야기>를 뛰어넘는 장대하고 아름다운 한국사! 나와 이이화 선생은 두 손을 잡고 ‘아치울의 결의’를 하는 것이었다.
이이화 선생과 나는 1980년대부터 호흡을 맞추어 왔다. 1987년에는 한길역사강좌의 일환으로 ‘한국사상사’를 7회에 걸쳐 강의했다. 1988년에는 ‘근대민중운동사’를 역시 7회에 걸쳐 강의했다. 이이화 선생은 ‘재야연구자’로 1970년대부터 주목할 논문을 발표해왔다. ‘북벌론의 사상사적 검토’(1975), ‘척사위정론의 비판적 검토’(1977) 등이 그것인데, 나는 선생의 논문집 <조선후기의 정치사상과 사회변동>을 1994년에 펴냈다. 이보다 앞서 1988년에는 전 5권의 <인물한국사>를 펴냈다.
역사가 이이화는 늘 역사의 현장에 서 있었다. 1980년대에 나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다. 선생은 1985년부터 진행된 한길역사기행에 가장 많이 참여한 현장강사이자 역사가이드였다. “역사는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 숨쉽니다.”
1986년 5월, 2박3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국토, 우리 역사의 장엄을 새삼 확인했다. 나는 ‘지리산과 민족사’라는 주제를 내걸었다. 구례 화엄사에서 피아골 계곡을 타고 노고단을 오르는 여정이었다.
이이화 선생은 ‘지리산의 정신사와 저항사’를 발제했다. 지리산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긴 글이었다.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유몽인(柳夢寅)이 그의 책 <어우집>(於于集)에서, 금강산은 뼈다귀가 많으면서 고기가 적고, 지리산은 고기가 많으면서 뼈다귀가 적다고 한 기행문을 소개하며 “금강산이 지자(知者)와 이지(理智)의 산이라면, 지리산은 인자(仁者)와 덕성(德性)의 산”이라고 했다.
“이번에 화엄사 골짜기와 노고단, 피아골의 깊은 계곡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습니다. 나를 포근히 감싸주고 나에게 자양분을 날라다 주시던 우리 어머니. 다육소골(多肉少骨), 이렇게 먹을 것이 많고, 몸을 감싸주기에 지리산은 인간과 너무나 친밀한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덕성 속에 비극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천년만년 우리 겨레와 함께 숨쉬면서 안식처가 되기는 했지만, 피가 튀고 살점이 찢기는 비극의 역사를 이 지리산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1987년 5월, 3박4일의 지리산 역사기행을 다시 기획했다. 산청에서 천왕봉을 올랐다. 백무동으로 갔다. 제수(祭需)를 준비했다. 이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혼령들을 위해 일행이 함께 참례하는 제사를 지내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이화 선생에게 제문(祭文)을 부탁했다. 200자 원고지 30장이 넘었다. 일행은 깊은 산속에서 구슬프게 읽어내리는 선생의 제문에 눈물을 글썽였다.
1986년 9월 이이화 선생과 함께 우리는 ‘동해안 의병의 근거지’를 찾았다. 임진왜란 때부터 구한말까지 의병 봉기의 고장이었던 영덕과 영해, 한말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를 답사했다. 일행은 마을회관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이 시대의 의병은 누구인가’를 주제로 토론했다.
1987년 3월,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호남평야를 다시 갔다. 정읍시 산외면 동곡리, 동학농민군 총관령 김개남(金開男·1853~1895) 장군의 집터를 찾았다. 나는 가로세로 10㎝, 길이 2m의 말목 두 개를 준비했다. 흰 페인트를 칠하고 이이화 선생에게 붓으로 ‘김개남 장군 고택 입구’와 ‘김개남 장군 고택 구지’를 쓰게 했다. 역사기행 일행은 이제는 밭이 되어 있는 이곳에 두 말목을 세웠다.
■ 10년 작업 <한국사이야기>는 ‘국민독본’
역사의 육성 들려주는 저술가로
이이화 선생에 제의 10년간 작업
국민독본 ‘한국사 이야기’ 22권
방대한 연구 성과 담아 세상에
이이화 선생은 <한국사 이야기> 집필을 지금은 폐교된 전북 장수군 천천면 연화분교에서 시작했다.
분교 옆으로 금강 상류가 흘렀다. 한때 한길사는 그 폐교를 빌려서 역사기행·국토순례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선생은 이곳에 칩거하면서 2년 반 동안 고대사 집필을 끝냈다. 다시 김제 월명암으로 옮겨 고려사를 끝냈다.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살펴보아야 할 자료가 방대해서, 아치울 자택으로 돌아와야 했다.
1998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한국사 이야기>는 드디어 2004년 봄 전 22권이 완간되었다. 참으로 놀랍고도 힘찬 저술작업이었다. 우리의 응원과 편집작업도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세기말에 시작되어 새 세기의 벽두에 간행되는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를 나는 ‘21세기 국민독본’이라고 이름붙였다. 개인의 통사작업으로는 가장 방대하고, 지금까지의 한국사 연구성과를 총체적으로 수렴하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 장대한 작업을 해낸 이이화는 분명 ‘거인’이다. 오척이 될까 말까 한 그 체구가 뿜어내는 정신의 힘. 흔히 노작들에 대해 ‘주례사’ 같은 서평을 하지만,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에 대해서는 수많은 인사들이 경외와 찬사를 보냈다. 1986년 이이화 선생과 손잡고 역사문제연구소를 창립하는 박원순 변호사(현 서울시장)는 “사마천과 같은 철저한 역사인식과 치열한 열정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이화 선생에게 한때 한문을 배운 바 있는 박완서 선생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쓰고 싶은 글은 안 쓴다. 실로 보배로운 이 시대의 기인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 세계화시대에 더 필요한 ‘한국사 읽기’
역사를 가슴으로 느끼며 읽게 해
현실과 연결 생각하는 힘 길러줘
선생은 1991년 박완서 선생 등과 중국을 여행했다. 유람선이 신의주에 최대한 가까이 가서 강변의 북한 사람들과 지호지간이 됐을 때 그는 뱃전에 엎드려 흐느꼈다.
고향이 북한도 아닌 그의 깡마른 어깨가 북받치는 오열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이름 없는 백성들이 산지사방으로 찢기는 분단의 고통을 그는 견딜 수 없어 했다. 역사 하는 그의 자세였을 것이다.
“역사란 특정인이나 특정한 계층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면 그것 또한 바람직한 역사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되 오늘 우리의 현실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관이 중요합니다. 21세기로 가고 있는 이 세계화시대에도 민족주의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민족만이 우수하고, 우리만이 역사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국수적 민족주의 또는 배타적 민족주의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됩니다.”
선생은 각 편의 집필이 끝나면 젊은 연구자들에게 읽게 하고 비평과 의견을 들었다. 재야학자이지만 수많은 젊은 연구자들이 그의 작업을 응원하고 돕는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작업은 출판사로서는 하나의 사건이자 축제였다. 독자들의 역사 읽기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용어와 인명을 뽑아 풀이했고 그림과 사진과 연표를 곁들였다. ‘완간기념기획’으로 <이이화와 함께 한국사를 횡단하다>를 기획했다.
“저술작업을 통해 시대정신을 구현해내는 저자, 그런 저자를 성원하는 깨어있는 수많은 독자들과 함께, 이 나라 출판문화에 우뚝 서게 될 이이화 선생의 작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일단락짓게 되는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우리 출판인들은 존재한다. 10년에 걸치는 이 장구하고도 장대한 작업을 해낸 저자 이이화 선생의 그 정신과 헌신이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 잘못된 역사 바로잡는 역사가
이이화! 그는 역사를 연구하고 역사를 저술하는 역사학자였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역사운동의 최일선에서 헌신하는 역사가였다. 신군부의 독재에 맞서는 새로운 역사운동으로서 역사문제연구소 창립에 앞장섰다.
젊은 역사연구자들과 함께 미답의 역사연구에 나서는 학술운동을 펼쳤다. 동학농민전쟁을 제대로 평가하는 연구·저술작업뿐 아니라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의 선봉장을 맡았다. 2004년 11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이 출범하면서 이사장에 취임했다.
2000년 9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맡았다. 2004년 1월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해 고구려역사문화재단을 발족시키고 공동대표를 맡았다. 1991년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한 민족문제연구소 활동에 함께했다. 2004년 1월에 전개된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국민모금운동은 민중들의 역사의식과 주체의식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모금 시작 열하루 만에 목표액 5억원을 넘어섰다.
“나는 장엄한 역사드라마를 보았다”고 선생은 회고록 <역사를 쓰다>(2011)에서 말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지도위원으로 나섰고, 2009년 8월 온갖 방해를 이겨내고 출간됐다.
2009년에 발족하는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2010년에 결성되는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국실행위원회’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일제강점기 역사박물관’ 추진위원장을 맡았다.
“역사는 세상과 소통하는 실천 학문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역사를 모르면 미래를 열어갈 수 없지요.”
나는 예술마을 헤이리를 건설하면서 이이화 선생께 말씀드렸다. 여기 와서 ‘역사사랑방’ 같은 걸 해보시자고. 마을엔 역사를 이야기해주는 할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선생은 2007년 아치울에서 헤이리로 입주했다. 그러나 선생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과제가 끊임없다보니 역사사랑방 개설은 계속 늦추어졌다.
선생은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선생이 남긴 역사정신은 우리 가슴에 살아 있다. 저 역사의 현장을 앞장서서 걷던 역사가 이이화. 우렁찬 목소리로 역사와 역사의 진실을 이야기하던 이이화 선생.
■필자 김언호
1968년부터 1975년까지 일간지 기자로 일했다. 1976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현재 한길사와 한길책박물관 대표를 맡고 있다. 한국출판인회의와 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을 지냈으며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책의 공화국에서> <김언호의 세계서점기행> 등을 썼다.
<2020-04-21> 경향신문
☞기사원문: [김언호가 만난 시대정신의 현인들](9)“역사를 모르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민족사 바로 세우고 ‘실천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