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친일청산을 웃음거리로 만든 박흥식 석방
해방 75년이 된 지금까지도 미완의 과제인 친일청산. 이를 한 편의 웃음거리로 만든 상징적 사건이 있었다. 친일청산 대상 1호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화신 재벌 박흥식이 1949년 4월 21일 풀려난 일이 그것이다.
고도의 상징성을 띠는 이 사건과 더불어 친일청산은 힘을 잃고 약해졌다. 그 뒤 도리어 공격을 받기까지 했다. ‘빨갱이’들의 음모로 매도되고 사회 퇴행의 원인인 양 치부됐다. 박흥식 석방은 친일청산이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를 예고하는 한 편의 그림이었다.
1903년 8월 6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태어나 친일파 재벌로 성장한 박흥식이 얼마나 많은 반민족행위를 저질렀는지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했는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세로 길이가 26센티미터이고 글씨가 빽빽한 이 사전에서 웬만한 친일파들은 길어봤자 반 페이지, 유명한 친일파들은 두세 페이지 정도를 차지한다. 그에 비해, 박흥식은 4페이지 하고도 6분의 1 페이지를 차지한다. 사연이 무척 많은 친일파인 것이다.
‘친일청산 대상 1호’ 박흥식의 반민족행위
진남포상업학교를 중퇴한 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16세 나이로 진남포에서 미곡상을 차린 박흥식은 재벌이란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박흥식’ 하면 떠오르는 서울 종로 화신백화점 외에도 다종다양한 회사들을 거느렸다.
박흥식은 직물업·제지업·인쇄업·유통업·부동산업과 비행기 제조업까지 경영했다. 거기다가 학교도 설립해 교육사업을 병행했다. 1, 2년마다 한 번씩은 회사를 신설하거나 합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업을 벌였다.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제약을 받던 시절이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한국인이 일본 기업과의 경쟁에 밀려 숨도 쉬기 힘들 때였다. 그렇지만 그는 제약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는 한계를 극복할 장치가 있었던 것이다.
사업 무대를 평안도에서 서울로 옮긴 1926년(23세) 무렵의 박흥식에 관해 <친일인명사전>은 “이 시기 조선총독부 외사과장 다나카 다케오와의 친교를 배경으로 일본 제지회사들과 특약을 맺고 국내의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 등과 신문용지 전속구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상업적 성공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서술한다. 정경유착이 사업 성공의 발판이었던 것이다.
기업인의 친일은 대개 다 기금 헌납 정도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박흥식은 그렇지 않았다. 사업에서처럼 이 분야에서도 그는 왕성하고 의욕적이었다. 위에 열거한 업종들에 더해 ‘친일업’까지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마치 사업을 하듯이 친일도 열렬히 했다.
박흥식은 총독부에 기금을 내는 것은 기본이고, 일본군에 비행기를 제공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까지 직접 차렸다. 또 기업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글과 말로도 친일을 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글을 실어 “대동아경제권 건설을 위해 동아경제블럭을 형성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미국과 영국의 격멸을 부르짖으며 학도병에 지원할 것을 종용했다.
또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활동까지 겸했다. “촉탁보호사는 사상범들이 출옥 후 다시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皇道)정신을 자각하고 충량(忠良)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임무를 담당했다”고 <친일인명사전>은 말한다.
그의 죄상을 죄다 열거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제국주의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감사로도 일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담해 인력과 물자를 전쟁에 동원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그 때문에 표창장도 많이 받았다. 조선총독이 주는 공로상은 기본이고, 일본 교육진흥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일본 제국교육협회장한테서도 상을 받았다. 또 히로히로 일왕(천황)을 직접 만났다. 일본을 위해 웬만큼 공을 세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43년 12월 17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배알 1주년 – 지성으로 봉공’에서 박흥식은 “나는 산업경제계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특히 반도 출신으로서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 황공하옵게도 배알의 광영에 욕(浴)하였는데, 지척에서 용안을 봉배(奉拜)한 때의 감격은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습니다”라며 ‘배알 1주년’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감격을 표했다. ‘배알의 광영’을 마치 목욕하듯이 뒤집어쓴 것이 그토록 강렬한 감동이 됐던 것이다.
친일파 풀어준 재판부, 무죄 구형한 검사
사업도 많이 하고 돈도 많아서 안 그래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인물이 그처럼 글과 말로도 열렬히 친일을 했으니, 반민특위 체포 대상 1호로 선정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격멸을 부르짖었던 그는 체포를 피하고자 미국행 여권을 준비했지만, 1949년 1월 8일 체포돼 독립운동의 상징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당시 언론보도도 ‘첫’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박흥식 체포에 의미를 부여했다. 3일 뒤 발행된 <동아일보> 기사 ‘박흥식씨 수감’은 ‘반민법 첫 발동’이라는 부제목 하에 “특위는 10일 공보 제1호로 박 체포 경위를 공식으로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친일청산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해방 직후의 전 민족적인 친일청산 요구가 조만간 충족되리란 기대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기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과 친일보수 세력이 반민특위를 빨갱이로 매도하고 경찰까지 동원해 총격 테러를 가하는 상황에서, 반민특위가 ‘체포 1호’를 오래 붙들어두기도 힘들었다. 결국 박흥식은 보석(보증석방)으로 풀려나 감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수면 부족으로 신경이 쇠약하다는 게 보석 결정의 사유였다.
1949년 4월 22일자 <경향신문>은 보석에 반발하는 반민특위 검찰관(검사)들의 집단사퇴 표명을 보도하면서 ‘반민법 운영에 이변’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과 친일청산의 어두운 운명을 예고하는 ‘이변’으로 이 사건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수면 부족과 신경쇠약을 이유로 친일파를 풀어준 재판부는 욕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뇌물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있었다. 그러자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장이 직접 한마디를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김종인이라는 아홉 살짜리 손자를 둔 김병로 특별재판부장 겸 대법원장은 위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검찰관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있는지는 모르나 재판관에게 있어서는 그런 사실은 전혀 없을 것으로 나는 믿는다”고 답했다.
그 뒤 박흥식 사건은 세상의 분노를 자아내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담당 검사인 정광호 반민특위 검찰관은 그해 9월 26일 구형 때 황당한 모습을 보였다. 원래의 담당이었던 노일환 검찰관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뒤 사건을 새로 배정 받은 정광호는 유죄가 아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해 9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 ‘박흥식씨에 무죄’에 따르면 정광호가 내세운 무죄 이유는 아래와 같다.
“본인으로서는 피고에 대하여 구형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고 본다. 원래 반민법의 입법 정신은 일제 잔재를 숙청하는 데 있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고 따라서 기소 사실은 편중적이었으며, 공소를 기각하려 하였으나 이미 기소된 것이니만큼 부득이 구형하지 않을 수 없는 괴로운 심정을 억제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이상과 같은 구형을 하는 바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으로 인해 반민특위가 박흥식을 편파적으로 대했다고 언급한 뒤, 이미 기소된 것이라 어쩔 수 없이 구형할 수밖에 없는 괴로운 심정을 고백한다면서 무죄 선고를 요청했던 것이다.
잠시 뒤의 재판부 선고 때도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재판부 역시 박흥식을 편들었다. 그해 9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반민 피고이던 박흥식씨’에 따르면, 박흥식이 일본을 위해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 활약은 없었으며, 신문에 쓴 글도 타의에 의한 피동적인 것이었을 뿐이라는 무죄 선고 이유가 제시됐다. 세상이 다 아는 박흥식의 친일을 부정할 길이 없으므로 ‘실질적 활약은 없었다’, ‘시켜서 한 일이다’ 등의 논리를 꺼냈던 것이다.
그런데 판결 이유 중에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안 도산 선생에게 많은 원조를 했다’는 부분이다. 박흥식이 도산 안창호와 친분을 유지하며 도움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덮기 힘든 박흥식의 죄상을 안창호와의 인연으로 가리고자 했던 것이다. 박흥식의 친일 혐의를 벗겨주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에게 독립운동가의 영예까지 씌워줄 뻔했던 것이다.
박흥식이 안창호의 수감 생활과 출소 이후를 도운 것은 1938년까지다. 그런데 1937년부터 박흥식은 촉탁보호사를 겸하면서, 출옥한 항일투사들을 회유했다. 박흥식의 안창호 후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대목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이라 할 수 있다.
‘반민특위 체포 1호’ 박흥식의 석방은 친일청산의 운명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반민특위에 불들린 여타 친일파들도 박흥식처럼 풀려났고, 친일청산이 도리어 빨갱이들의 음모로 매도됐다. 그렇게 친일청산이 무산된 상태로 벌써 60년 넘게 세월이 흘러버렸다.
박흥식 사건은 친일이 아니라 ‘친일청산’이 청산된 부조리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이 사건은 ‘친일청산은 쉽지 않다’는 이미지를 조성하는 데 기여했다. 친일청산을 지지하는 쪽에는 분노를 주고, 반대하는 쪽에는 희망과 요행을 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박흥식 석방이 상징하는 부조리가 청산될 가능성이 2020년 4월 15일부터 현저히 높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친일청산의 성공 가능성이 21대 총선을 계기로 한층 더 제고된 것이다.
2016년 촛불혁명 이후로도 친일청산 및 과거사 청산을 계속해서 조롱하고 비웃고 훼방하던 보수세력 상당수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사실상 몰락했다. 저세상에 있을 박흥식과 그 동지들의 얼굴이 어두워질 만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박흥식을 비롯한 친일파들이 다시 한번 불려나와 진짜 심판을 받게 될 날이 조만간 다가오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는 전조(前兆)라 할 수 있다.
<2020-04-2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친일파 풀어준 이유가 수면부족과 신경쇠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