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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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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상임이사 조세열

4월 25일 평생을 민주화와 인권증진에 오롯이 바친 김병상 몬시뇰께서 하느님 곁으로 떠나가셨다. 1977년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기도회를 주도했다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대책위원회’ 위원장, ‘목요회’ 상임대표, ‘굴업도 핵폐기장 철회를 위한 인천시민모임’ 상임대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공동대표 등을 맡아 한국사회 곳곳의 불의에 저항하고 약자를 보듬은 진정한 목자의 삶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는 뒤늦게 인연을 맺었다. 2008년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실용주의를 기조로 삼을 것이라던 세간의 예측을 비웃듯, 철저하게 과거로 회귀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통일 분야와 과거사 관련 문제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두드러졌다.

과거사 청산의 제일선에 서있는 민족문제연구소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오를 정비하고 반동 국면에 대응할 태세를 갖춰야만 했다. 먼저 2대 이사장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별세 이후 공석으로 있던 이사장직에 연구소의 위상에 걸맞은 어른을 모셔 구심을 세워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종훈 신부님께서 “인품으로나 신념으로나 이 중책을 감당할 수 있는 훌륭한 분이 계신다”고 귀띔을 해주셨다. 그 분이 바로 김병상 신부님이셨다.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현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께서 주선한 자리에서 김병상 신부님은 “도움이 된다면 역할을 다 하겠다”고 흔쾌히 어려운 책임을 맡아 주셨다.

2008년 10월 17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그는 “연구소 출범과 함께 내걸었던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매진하겠다. 이는 거대한 역사문화운동을 전개하는 단초이며 발판”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김병상 신부님은 2009년 11월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완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후 2013년 지병으로 이사장직을 사임하실 때까지 참으로 중요한 순간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물론 전체 역사정의 실천운동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주셨다.

▲ 친일인명사전을 백범선생께 헌정하고 나서 기념촬영하는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

이명박 정부의 역사왜곡과 시민운동 탄압이 노골화하고 있던 시기에도, 김병상 신부님께서 꿋꿋하게 버팀목이 되어주셨기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변함없이 가열찬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강제병합공동행동,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사업 등을 시작하고 기초를 놓은 것이 그 보기이다. 또 역사정의실천연대를 발족하여 친일·독재 미화와 교과서개악 저지 투쟁을 전개하고 역사다큐 ‘백년전쟁’을 제작하는 등 수구세력의 역사변조에 전면 대응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김병상 신부님은 종교가 현실을 떠나 존재할 수는 없다고 늘 말씀하셨다. 친일문제도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사회문제들이 친일 청산 문제와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한 뿌리라고 생각한다. 예수는 하느님과 맘몬을 둘 다 섬길 수 없다고 말했다. 친일이나 오늘의 사회 문제나 다 맘몬을 선택한 결과이다. 회개해 하느님을 선택하는 길, 그게 친일 청산이고 오늘의 사회 문제에서 진짜 벗어나는 길이다.”

가톨릭 교회가 일제침략기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친일인명사전』에 교단의 주요 인사들이 수록된 점을 비난하는 데 대해서도, 교회의 호교론적 변명을 비판하면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일갈하셨다.

불의와 부정에는 단호한 입장으로 일관하셨지만 실제 우리가 뵌 김병상 신부님은 자신을 낮추는 겸양이 몸에 배인 온화한 분이었다. 당신께서 “민주화운동과 사목에 기여한 바 없이 대접만 받아 부끄럽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며, 후진들에게도 항상 ‘앞선 자의 오만’을 경계하셨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말씀하셨듯이 김병상 신부님은 “길고 긴 민주화의 여정 내내 길잡이가 되어주셨던 민주화운동의 대부”이셨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소중한 분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후배 성직자들에게 형으로 불릴 정도로 소탈하고 격의 없는 분이기도 하였지만, 우리 연구소 식구들에게는 한 결 같이 인자한 할아버지요 아버지처럼 대해 주셨다. 두 손을 잡아주시던 그 분의 따뜻한 눈길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회고록 『따뜻한 동행』에서도 드러나듯 신부님은 정의로우면서도 포용하는 사회를 지향하셨다. 늘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한 따뜻한 동행자셨다. 이제 신부님께서 남기신 뜻을 실천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생전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사회와 역사 정의 실현의 길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늘에서도 지켜보시고 저희들이 불의에 맞서 나아갈 수 있도록 변함없이 이끌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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