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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꿈꾸는 수인(2)
– 마키아벨리와 사마천, 그리고 이병주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3. 사마천으로서의 이병주
이병주를 작가가 되도록 만든 건 투옥인데, 감방에서 사마천을 만난 계기는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의 <사마천-사기의 세계>라고 밝힌다. 필시 일본평론사(1943)나 문예춘추사(1959) 판본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사연은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생략한다.
두 번째로 이병주가 역사와 만난 건 2차대전 중 일본 군속으로 끌려가 전몰한 동포들의 명단이 발표되던 시기인 1966년 7월, 마르크 블로크를 통해서였다. 작가는 이 인물에 감동받아 「변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여섯 아이의 아버지며 나이가 이미 53세를 넘은 블로크는 소르본 대학의 교수인 신분으로 일개 대위로서 자진 군에 입대했다. 불란서가 항복한 뒤 곧 항독운동에 참가, 리옹 지방 레지스탕스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그러다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6월 16일 나치스의 흉탄을 맞고 생을 마쳤다.((<마술사>, 한길사, 81)
이 작품도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그러나 정작 이병주에게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심어준 것은 역시 사마천이지만, 누가 봐도 사마천이 되기에 그는 체질적으로 너무나 세속적이고 속물적이며 현실적인 데다 두뇌회전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래서 초기에 그는 역사 대하소설을 쓰면서 정치사적으로는 이미 권력을 쥔 세력을 거스르지 않도록 정치사적인 기득권 세력을 인정하면서 이를 논증해 나가는 형식의 글쓰기를 시도했으며, 그 일련의 작품들은 마키아벨리즘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이 계열의 작품은 냉전체제의 반공의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집권층 지향적인 성향을 지닌 지식인들을 즐겨 내세우고 있다.
그렇다고 일생을 마키아벨리즘으로 허송하기에는 그래도 진실을 보며 희생도 수용하라는 마르크 블로크의 충고는 물론 사마천의 영혼의 외침을 그는 외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사마천의 사관으로서의 글쓰기로 돌아선 뒤부터의 작품은 권력의 피해자거나 수난자에 초점을 맞추며, 권력자일 경우에는 비판적 관점이 주류를 형성하게 배치한다.
어림 잡아보면 사마천의 관점으로 이병주가 선회한 것은 1982년 <그해 5월>부터가 아닐까싶다. 바로 박정희 피살(1979.10.26.) 이후부터 이병주는 참아왔던 비판의 해부도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게 옳은 것이다.
국가관이나 민족국가의 정통성보다는 현실정치적인 접근과 통치력의 실세를 중시했던 마키아벨리즘적인 단계의 시각과는 달리 사마천의 단계에서는 통치권력의 집행이 얼마나 역사적인 당위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시각으로 분석해낸다. 물론 이런 분석의 가치기준은 민족사적인 입장을 취한다.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그해 5월>과 <‘그’를 버린 여인> 등을 들 수 있다. 현대사에 등장했던 역대 집권세력과 그 비판세력과 진보세력을 민족적 허무주의의 관점에서 싸잡아 야유에 가까운 비판을 가한 게 전반기의 마키아벨리즘 계열의 소설이었다면, 후반기 작품은 균형감각을 갖추고서 진지하게 논구해 들어가는 보고문학적 요소가 더 강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전기의 작품이 문학적인 형상화와 구성이 치밀한 데 비하여 후기 작품은 실록적 요소가 더 강화되는 한편 허구적인 사건은 거의 사라지며, 정론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아마 작가의 연륜문제도 영향이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의 정치적인 이해뿐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친 과거사 청산의 기초자료는 물론이고 처세술적인 읽을거리로도 손색이 없다고 평할 만하다.
<그해 5월>은 이병주의 현대사 5부 연작의 마지막 편에 속한다. ①일제 식민 말기부터 한국전쟁까지의 회색적으로 방황하는 지식인을 다룬 <관부연락선>, ②같은 기간을 다루되 좌우의 이념적 변별성을 뚜렷하게 경계선으로 삼아 좌익 투사들의 입을 빌려 좌익을 비판하도록 만드는 빨치산 이야기인 <지리산>, ③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 사건을 비판하면서도 그의 집권과정을 합리화한 <산하>, ④분파와 좌절로 얼룩진 것으로 평가절하한 좌익운동사의 르포 격인 <실록 남로당>까지가 마키아벨리즘적인 이병주의 현대사 연작들이다. 사마천의 역사의식을 처음
으로 발효시킨 소설이 현대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⑤<그해 5월>이다. 이 소설은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개막된 드라마가 장장 18년을 끌다가 1979년 10월 26일 밤, 이윽고 그 막을 내렸다.
”라는 주인공 이사마가 1979년 10월 27일 일기장에 적은 기록처럼 박정희 통치 만 18년을 탐구대상으로 삼는다.
<사기>처럼 기전체(紀傳體)로 각종 사료와 논평을 곁들여 엮는 형식을 취한 이 소설은 차라리 ‘5·16의 역사적 평가를 위한 한 우수한 관찰자의 기초자료 모음집’ 같다.
여기서 연작 5부의 보너스나 부록 같은 작품 <‘그’를 버린 여인>이다. 이 소설은 박정희에게 두 번째 여인에 해당하는 특이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인간 박정희의 역사적인 삽화를 다루고 있다. 이병주가 이 소설을 쓰게 된 중요한 동기는 이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김재규가 “박정희의 가슴팍과 머리에다 대고 탄환을 쏘아넣은 사실”이란 점이라고 밝힌다.
“‘그’를 버린 그 여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그런 결단에 이르지 않았을지 모른다”라는 게 작가의 인과응보식 역사의 변증법이다.
4. 이병주와 박정희의 첫 만남
부산의 명 일간지였던 <국제신보>의 상임논설위원으로 이병주가 영입(1958.11.5.)된 것은 전임자인 명 주필 황용주(黃龍珠)가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떠나간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영입과정에 대해서는 ① 이병주 자신은 <국제신보>의 김형두 사장이 황용주에 대항할 만한 사람을 구하다가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했고, ② 김형두의 회고로는 인물을 찾다가 “감탄을 불금케 했던 인물로 진주농고의 후배이면서 전 주필 H(황용주) 씨와는 동창 간으로 마산대학에 재직중인 사람”에다 “천하호걸이며 재사이자 소설가인 나림 이병주”(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 시대> 까치글방, 2013, 301쪽)였다고 했는데, 두 주장에는 별 차이가 없다.
이병주는 희대의 명문으로 <국제신보> 주필(1959.7.1.)에 이어 편집국장 겸 주필(1959.9.25.)로
부산지역뿐이 아니라 전국적인 명 논설가로 명망을 누렸다. 이승만 독재시절이라 시국은 답답했으나 사설은 끗발 나가던 이 시기에 부산군수기자사령부 사령관(1960.1.21.~7.30 전라도 제1관구 사령관으로 전보)이었던 박정희를 이병주는 처음 만났다. 신도성 도지사가 경남도청 의회 회의실에서 기관장 회의를 소집했던 자리였는데, 이병주는 <국제신보> 사장대리로 참석했던 것이다.
회의가 시작되기 얼마 전 여윈 몸집으로 작달막한 군인이 육군 소장의 계급장을 달고 색안경을 쓰고 가죽으로 된 말채찍을 든 채 회의장에 들어섰다. 도지사와 인사를 나누고 도지사가 지정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곤 회의장을 둘러보는 듯 하더니 획 하고 나가버렸다.
회의가 시작되었는데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호기심이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도지사에게 물어보았다. 그 군인이 누구며 무슨 까닭으로 이곳까지 왔다가 불참하고 돌아간 이유가 뭐냐고.
신도성이 쓴 웃음을 띠고 한 대답을 요약하면, 그는 2관구 사령관 박정희 소장인데 자리가 도지사석과는 먼 말석인 것이 불만이어서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것이었다.(이병주, <대통령들의 초상-우리의 역사를 위한 변명>, 書堂, 1991, 90쪽. 이하 모든 인용문은 이 책) 그 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고조되자 4월 10일 전국비상계엄령이 내렸고,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을 맡은 박정희가 지역 기관장들을 소집해서 이병주도 참석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앉아 있던 <부산일보> 주필(황용주)이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장군 곁으로 다가
가서 “아, 너 복세이키 아니야?”라고 하니 박 장군은 “음, 너 코류슈구나” 하며 서로 손을 붙들고 얘기를 주고받다가 황용주가 이병주를 불러 “이 사람이 박정희 장군이다. 나완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었지. 그동안 소식을 몰랐더니만 20수 년 만에 만났구먼”이라고 소개했다.
이후 황용주는 역시 대구사범 동창으로 의사인 조증출과 함께 이병주도 동석시켜 어울렸는데, 술자리에 앉기만 하면 박은 “이 주필, 이래 갖고 나라가 되겠소”라며, “이놈저놈 모두 썩어 빠졌어” “학생이면 데모를 해야지. 이왕 할 바엔 열심히 해야지”, “도대체 오열(간첩)이란 게 뭣고. 오열이 어딘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유당이 필요로 하겠다 싶으면 출동하는 모양이지? 국민을 편하게 할 방도는 생각하지도 않고 생사람 죽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원!” 등등 “욕설과 비난을 섞은 열변을 토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이승만의 이름은 물론이고 어느 사람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입에 올리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4월혁명이 나자 박정희는 학생들이 쿠데타를 망쳤다고 투덜거렸다.
1960년 4월 27일자 <국제신보> 사설에 「이대통령의 비극! 그러나 조국의 운명과는 바꿀 수 없었다」라 하고는 그가 물러난 지금은 이승만의 공죄를 논할 시기 아니다, 학생들에 배척받는 이승만은 결코 적이 아니라며 동정론을 폈다. 물론 이병주가 쓴 글로 그의 한계가 엿보이는 내용이었다. 이걸 보면 나중 <지리산>과 <산하>, <남로당>에서 이승만을 추켜세운 이병주의 역사의식을 예단할 수 있다.
그 며칠 뒤 이병주가 황용주, 박정희와 만나자 박정희는 “두 주필의 사설을 읽었는데 황용주의 논단은 명쾌한데 이 주필의 논리는 석연하지 못하던데요. 아마 이 주필은 정이 너무 많은것 아닙니까?”라고 이승만에 동정적인 걸 따지고 들었다. 이에 이병주는 “밉기도 한 영감이었지만 막상 떠나겠다고 하니 언짢은 기분이 들대요. 그 기분이 논리를 흐리멍덩하게 했을 겁니다.”라고 변명하니, 박은 “그거 안 됩니다. 그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간이나 해먹었으면 그만이지 4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후세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도 춘추의 필법으로 그런 자에게 필주(筆誅)를 가해야 해요”라고 단호했다. 이에 이병주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거론하며 변명했으나 박정희는 “독립운동 했다는 건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라고 응대했다.
이어 박정희가 일본 청년장교들의 반역사건(5·15, 2·26 두 사건)을 거론하자 황용주는 “케케묵은 국수주의자들”이라고 단칼에 비판했다. 이에 박은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라고 항의하여 논쟁이 벌어졌다. 황이 “고루한 생각”이라고 하자 박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가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등등으로 둘 사이의 논쟁은 이어졌다.
황 : 국수주의자들이 망친 일본을 자유주의자들이 일으켜 세운 거다.
박 :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
황 : 배워야 할 것은 기백이 아니고 도의감이다. 도의심의 뒷받침이 없는 기백은 야만이다.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3, 조선일보, 2001, 186~187쪽)
이 대화로 박정희의 역사의식이나 정치관과 민족관의 피상성과 밑천의 마각이 드러나고도 남는다. 그리고는 이내 5·16쿠데타가 닥쳤다. 쿠데타 직후 <국제신보>는 사설 「민주발전에의 획기적 대사업이 되도록 혁명군사위원회의 성의 있는 노력을 바란다」(1961.5.17.)로 군부의 행동을 환영했다. 마치 쿠데타 세력과 교감이라도 있었던 투라 해도 지나칠 건 없다. 그만큼 박정희-황용주-이병주 사이에는 주석에서 온갖 정치론을 다 펼쳤던 게 입증된 셈이다.
그 나흘 뒤 오후 5시, 경찰은 편집국에서 이병주를 연행했다. 경남도경 유치장에서 만난 이병주와 황용주는 “이상하게 돌아간다. 그자? 우리는 도의혁명을 하자고 했는데 반공혁명이 뭐꼬?”(안경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까치, 2013, 359쪽)라며 어리둥절했다.
5. 쿠데타 직후에 구속당한 이병주
여수순천 병란(1948) 때 군부 내의 남로계 관련자 명단을 넘겨줌으로써 극형을 모면한 트라우마가 박정희에게는 강하게 작용했다. 이 전력 때문에 5·16 직후 미국이 그의 사상을 의심하자 쿠데타 세력은 좌익, 혁신정당, 교원노조, 각종 노조 지도자, 보도연맹원을 영장 없이 체포했다.(이석제, <각하, 우리 혁명합시다>, 서적포, 1995)
그래서 4천여 명 구금, 608명 혁명검찰부 회부, 216명 기소, 190명 유죄판결을 내렸다. 자유당 때 사형언도자 중 미집행 백여 명은 일거에 처형시켰다.
“박정희는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의혹을 받자 민족일보의 조용수를 자신의 면죄부의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김삼웅, <한국 현대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황용주는 한달 만에 풀려났으나 이병주는 ‘특수범죄처벌 특별법’ 제6조 위반으로 기소됐다.
정당 사회단체 간부로 반국가적 행위를 한 자에게 10년 이상 사형이었던 이 법. 그런데 이병주가 뒤집어쓴 ‘교원노조 고문’ 직함이 기록도 증언도 없자 논설위원 3명을 더 연행했다.
한편 경찰 공작반에서는 앞잡이를 시켜 남로당 재건운동을 탐색 중 한 청년이 걸려들었다. 이런 것도 모른 채 이병주는 경찰이 내사 중인 바로 그 청년의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식은 1961년 5월 22일이었다. 결혼식장에서 일망타진해 남로당 재건 공범으로 엮을 계획이었는데 공작반의 내막을 모르던 다른 부서에서 하루 전인 21일 이병주를 신문사에서 덜컥 체포해버렸다.
공작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병주는 필화로 내몰렸다. 연행된 동료 논설위원 중 변노섭(1930~2005)은 사회당 경남도당 준비위원회 무임소 상임위원으로 날카로운 논설 필자였기에 이병주와 공범으로 엮였다.(<그해 5월>, 한길사) “그런데 술친구였던 박 대통령이 자기를 2년 7개월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잡혔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원한이 사무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참았다. 그러다가 박 대통령이 죽고 난 다음에는 예를 들어 <‘그’를 버린 여인>에서처럼 박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
다. ”(남재희, <통 큰 사람들>, 리더스하우스. 2014, 54쪽)
바로 이병주가 마키아벨리에서 사마천으로 변신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사마천의 사관으로 쓴 두 편의 소설은 우리 시대 정치소설로서는 최고봉을 형성하고 있다.
(2015년 이병주 심포지엄 발제 및 여러 강연을 간추려 재정리한 글로 <한국소설, 정치를 통매하다>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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