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패망 몇 개월 전부터 우리의 독립투쟁 단체들은 해방을 예감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던 미국의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단체들은 머지않아 맞이할 해방과 함께 추진해야 될 거사인 신생조국 건설의 설계도를 짰다. 그것이 바로 ‘건국 강령’ 이었다. 그 독립투쟁 단체들을 대별하면 넷이었다. 김구 세력, 이승만 세력, 박헌영 세력, 김일성 세력. 그런데 이승만을 제외한 세 단체의 건국 강령에는 신기한 우연 일치가 생겼다. 각기 멀리 떨어져 의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강령의 첫번째, 두번째가 꼭 거짓말처럼 똑같았던 것이다.
첫째, 모든 친일파를 처단한다. 둘째,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이런 우연 일치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 두 가지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민족적 열망이었고, 전 국민적 요구였던 것이다. 그 열망과 요구에 명확한 응답을 하지 않고는 새 조국의 정권을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생겨난 ‘우연 일치적 필연’이었던 것이다.
분단상황의 불행 속에서 임정의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당연한 순서로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그 역사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민족정기의 샘이고, 민족 미래의 등불인 반민특위는 친일경찰들이 휘두른 폭력 난동으로 처참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대통령 이승만은 그 폭거를 방조했다. 그는 유일하게 건국 강령을 제시하지 않았고, 그의 정권은 각 분야 친일파들의 옹위와 지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부터 친일파들은 맘껏 득세하며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고, 이 땅은 비양심과 무질서의 천국이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다시 곱씹어야 한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우리가 정의로운 세상, 참된 민주주의 세상을 원한다면 부정과 불의의 뿌리를 깨끗이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확실한 길은 이제라도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명기된 죄상에 따라 냉철하게 단죄해야 한다. 또 ‘다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지 말라. 프랑스와 독일과 이스라엘의 냉엄함을 보라. 우리가 얼마나 직무유기를 해왔는지 반민족적 범죄에 공소시효란 없다.
<2020-06-06> 광복회보
☞기사원문: [기고] 조정래, “반민특위를 부활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