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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 [인터뷰]”반민특위 무너뜨린 경찰, 국민·유족 앞에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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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 아들 김정륙씨, 경찰청장 사과 요구
“이승만 대통령, 1949년 5월 담판 뒤 물리력 행사 결심”
“반민특위 해체로 친일청산 좌절…민족의 비극”
“경찰, 70년 지난 이제라도 스스로 치욕의 역사 청산해야”
유족들, 6일 오후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인간 띠잇기’ 행사

반민특위 본부 전경.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1949년 5월 말쯤이었나. 반민특위 관사로 전화가 한 통 왔어요. ‘저녁에 내가 갈 거니까 그리 알아라’. 이승만 박사였어요.”

김정륙(85)씨는 71년 전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김상덕 선생의 ‘담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식구들을 전부 부르더니 ‘나오라고 말할 때까지는 각자 방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더군요. 잠시 후 경무대 경호팀 수십명이 집을 둘러싸더니 집 구석구석을 뒤지고 겁을 주는데….”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인터뷰 내내 “반민특위 해체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우리 민족의 비극”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제헌헌법과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948년 10월 국회가 설치한 ‘친일 청산’ 조직으로, 수사권과 기소권·재판권까지 가진 특별 헌법기구였다. 초기에는 박흥식, 이광수 등 1천여명의 친일 인사를 조사하며 성과를 올렸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비협조와 탄압으로 1년 만인 이듬해 10월 완전히 해체됐다.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이 쓰던 도장.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씨의 부친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의원으로 당선된 후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6·25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이(승만) 박사가 반민특위 활동은 살살 적당히 하고, 위원회 임기가 끝나면 내각에 들어와서 함께 일하자고 했다더군요.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무엇이든 얘기하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일언지하에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요. 그렇게 화가 난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김씨가 떠올린 담판은 이 대통령의 ‘최후통첩’이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처음부터 못마땅해했다. 당시 정부 곳곳의 요직을 차지했던 친일파 청산 활동을 시시때때로 방해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을 당시 내무장관이 자신의 집에 직접 숨길 정도로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이었다.

김씨는 “부친과의 담판에 실패한 이 대통령이 회유에서 무력행사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담판 일주일 뒤인 1949년 6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을 중심으로 한 경찰 수십명이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했다. 당시 경찰은 모든 조사 서류를 압수했고, 30명이 넘는 특위 위원을 현장에서 때리고 끌고 가 고문까지 했다.

사실상 특위를 강제 해산한 ‘6·6 특위 습격 사건’에 앞서 반민특위를 지지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0여명이 연달아 구속되는 ‘프락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두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치명상을 입고 내부 갈등까지 생겼다. 반민법의 공소시효가 1950년 6월 20일에서 그해(1949년) 8월 31일로 줄어드는 법까지 개정되자 특위는 완전한 와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김씨는 당시 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경찰이 70여년이 흐른 지금이라도 공식적으로 사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경찰이 반민특위 사건을 그냥 넘기면 치욕스러운 역사가 앞으로도 계속 남게될 것”이라면서 “경찰청장이 직접 사과함으로써 스스로 마무리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반민특위 초기부터 탄압한 이승만, 정권 차원 테러까지 시도

이 대통령은 친일 인사 청산을 앞장서서 반대하며 특위 활동을 초기부터 억눌렀다.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공포되기도 전인 그해 9월 3일, 이 대통령은 “많은 사람이 선동되고 있다.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듬해인 1949년 1월 본격적으로 친일파 조사와 체포가 시작됐고 친일경찰 노덕술, 김태석 등 주요 인물의 체포도 이뤄졌다. 이 대통령은 “특별조사위원회 행동이 지나쳐 국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 “경찰 기술로 지하공작과 반란 음모를 예방해야 하는데 (특위) 조사위원들은 이런 생각이 꿈에도 없다” 등 여러 차례 특위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급기야 특위 요원을 상대로 한 암살 시도까지 벌어졌다. 수도경찰청 총감이던 노덕술과 서울시경 최난수, 중부서장 박경림 등은 테러 전문가 백민태를 고용해 범행 자금을 건네고 경찰의 권총, 실탄, 수류탄까지 줬다. 자금은 반민특위 ‘체포 1호’였던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이 댔다.

하지만 ‘백색 테러’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백민태가 평소 존경하던 인물이 테러 대상에 포함된 것을 보고 당시 국회 중진이던 조헌영·김준연 의원에게 전말을 다 털어놓은 것이다. 사건을 꾸민 자들은 1949년 2월 기소됐지만, 법원은 실제 테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관련자들을 풀어줬다.

노덕술(오른쪽 등만 보임), 김연수, 이풍한 등이 법정에 끌려온 모습.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김씨는 당시 반민특위 내부에 스파이까지 침투했다고 증언했다. 친일 청산에 대한 정권 차원의 탄압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이뤄졌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위 내 최고 의결기구에서 결정한 내용이 일선에 지시가 이뤄지기도 전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귀에 먼저 들어갔어요. 친일파들을 잡으러 가면 이미 다 숨어버린 경우가 허다했어요. 친일자 누구 하나 손쉽게 체포한 적이 없었어요.”

동료들을 배신하도록 한 것은 결국 권력욕이었다고 한다. 김씨는 “그들은 유독 장관 등 감투에 집착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지목한 A 의원은 반민특위 해산 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광복회 “올해 반드시 경찰청장 사과해야”…국회도 사과 요구 목소리 보태

독립운동가 단체인 광복회는 올해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에 대한 경찰청장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나섰다. 71년을 맞는 6일 오후에는 광복회 회원과 당시 특위 관계자 유족들이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 모여 ‘인간 띠 잇기’ 행사를 연다.

김원웅 광복회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현충일인 6월 6일은 친일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민족의 정기를 짓밟은 날이다”라며 “국가권력이 불법 부당하게 자행했던 잘못에 대해 경찰청장이 국민과 역사, 독립유공자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민특위 터 기념비. (사진=민족문제연구소 제공)

반민특위가 제헌 국회의 특별기구였던 점을 고려하면, 국회는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를 받아야 할 직접적인 당사자이기도 하다.

경찰 출신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은 “반민특위 습격 사건은 백주에 국가기관이 테러 수준의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일을 계기로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해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며 “이것은 명백한 경찰의 과오다. 경찰이 이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취지의 입장 발표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광복회와 독립 유공자들의 사과 요구를 무겁게 받아들인다.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siam@cbs.co.kr

CBS노컷뉴스 김태헌 기자

<2020-06-06> 노컷뉴스

☞기사원문: [인터뷰]”반민특위 무너뜨린 경찰, 국민·유족 앞에 사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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