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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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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국민 학살한 친일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 별세 (서울=연합뉴스)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휴전회담 한국대표를 역임한 백 장군이 육군에 기증한 군 역사 관련 기록물 중 1951년 7월 10일 유엔 대표들이 휴전회담을 위해 개성으로 가기에 앞서 기념촬영 하고 있는 모습. 휴전협정 당시 계급으로 왼쪽부터 버크 제독, 크레이기 공군 소장, 백선엽 소장, 조이 해군 중장,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호디스 육군 소장. 2020.7.11 [연합뉴스 자료사진] ⓒ 연합뉴스

지난 5, 6월 서울현충원 안장 논란의 당사자였던 백선엽 전 만주국 중위 겸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대장이 7월 10일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육군은 육군장 영결식이 15일 오전 7시 30분 서울아산병원에서 열린다고 예고했다. 안장식은 같은 날 11시 30분 대전현충원에서 열릴 것으로 알려졌다.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출생한 백선엽은 20세 때인 1940년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하고 1943년 4월 만주국 소위로 임관한 뒤, 항일군 잡는 특수부대로 명성을 날린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활약했다.

해방 뒤 잠시 고향에 체류한 그는 남쪽으로 넘어온 뒤 육군 정보국장이 되고,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친 세력을 좌익으로 몰아 제거하는 숙군 작업을 전개했다. 그런 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7월부터 육군참모총장 및 계엄사령관을 지냈고 1953년 1월 국군 최초로 대장 계급장을 달았다.

1959년 2월, 39세 나이로 연합참모본부(지금의 합동참모본부) 총장이 된 그는 이듬해인 1960년에 뜻하지 않게 군복을 벗었다.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의 격동 속에서 군대를 떠났고, 그해 7월 주중화민국대사를 시작으로 외교관의 길을 걷게 됐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 뒤로도 프랑스·캐나다에서 대사 직을 수행했던 그는 1969년 교통부장관이 됐고 1971년(51세) 장관직을 퇴임했다. 1973년 4월부터 1980년 3월까지는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사장을 지냈다.

군대를 떠난 나이(40세)와 공직을 떠난 나이(51세)가 좀 이르기는 하지만, 외형상으로 보면 화려한 공직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화려함 뒤에는 ‘가시’들이 감춰져 있다. 한국 사회의 핵심 독소들이 그 가시들에 잔뜩 묻어 있다.

백선엽의 인생

▲ 백선엽 장군 빈소 조문 11일 오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선엽 장군 빈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백선엽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인이었다. 그가 근무한 간도특설대는 친일 군인 중에서도 특별한 친일 군인들만 가는 곳이었다.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존속한 이 부대의 주력은 식민지 한국인들이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모두 7기까지 모집한 간도특설대는 총인원 740여 명 중에서 하사관과 사병 전원, 그리고 군관 절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고 설명한다. 식민지인을 이용해 식민지인을 탄압하는 일본제국주의의 방식을 실천하는 특수부대였던 것이다.

이 부대가 쏜 총탄에 쓰러진 항일투사들의 수가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살해된 항일무장세력과 민간인은 172명에 달했으며, 그 밖에 많은 사람이 체포되거나 강간·약탈·고문을 당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장교로서 이 부대에서 활약한 백선엽은 누구도 부인 못할 친일파였다.

그가 친일에 깊이 물들었다는 점은, 위험을 무릅쓰고 ‘남로당 박정희’를 구해준 데서도 드러난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를 외치는 민족주의 장병들이 일으킨 여순항쟁(여순사건) 당시, 박정희는 이들과 연관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1948년 11월 11일 체포된 박정희가 1개월도 안 된 12월 10일 석방된 것은 숙군 작업을 주도하던 백선엽 육군 정보국장이 신원보증서에 도장을 찍어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최소한 과거 만주군이나 일본군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보았을 때, 박정희는 자신들과 비슷한 배경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훌륭하고 유능한 군인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파격적인 구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박정희 구명은 백선엽이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시도하기 힘든 일이었다.

또 백선엽은 국민 학살,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것은 친일 못지않은,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중한 범죄다. 전쟁 상황 속의 민간인을 거치적거리는 존재로 치부하는 일부 그릇된 군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범죄로 비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 군사행동을 하다 보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사고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의 소유자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민간인을 죽이는 군인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 한낱 범죄자에 불과하다. 그 시절 한국에서는 그런 게 중요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마찬가지다. 범죄자가 범죄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여 범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범죄를, 백선엽은 육군 정보국장 시절에 저질렀다. 그는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창설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민간인 학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했다. 이 부대는 빨치산 토벌을 명분으로 강원도 인제, 경북 영천·청도·경산, 경남 거창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약탈하고 여성들에게 죄악을 저질렀다.

이런 일을 두고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사고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군인은 국민의 명을 받은 몸이고 국민을 지켜야 하는 몸이다. 그런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민간인인지 빨치산인지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 살상했다는 것은 애당초 국민의 신성함에 대한 인식이 없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백선엽의 동종 범죄는 한국전쟁 때도 있었다. 그는 이끄는 백야사라는 특수부대는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 하에 특히 지리산 일대에서 국민 학살을 감행했다. 백선엽의 부하들이 일반 국민과 빨치산을 가리지 않고 총을 쐈다는 점은 1951년 12월 2일부터 14일까지의 상황만으로도 명백히 증명된다. 이 12일간 이들은 4천 명의 빨치산을 잡겠다는 목표로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사살된 사람은 총 6600명이었다. 아무나 마구 죽였던 것이다.

백선엽은 6·25 전쟁 영웅으로 불린다. 육군 홈페이지의 ‘육군 소개’ 코너에 실린 다음과 같은 ‘백선엽의 전공’과 위와 같은 ‘백선엽의 국민 학살’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무겁겠는지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 중에는 보병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탈환작전, 2군단장으로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1군단장으로 설악산 부근 전투 등 다수의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움.”

그가 세운 전공이 그가 범한 국민 학살보다 더 중하다는 판단이 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백선엽을 전쟁영웅으로 섣불리 치켜세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가 전쟁영웅이라면 그가 죽인 국민들은 대체 무엇이 되는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적군이 아닌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백선엽의 일생에서 하나의 ‘패턴’처럼 자주 나타났다. 해방 이후뿐 아니라 이전에도 그는 동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가 속한 간도특설대는 항일투사뿐 아니라 민간인들한테도 학살을 자행했다. 2008년에 <한일관계사연구> 제31집에 실린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의 논문 ‘만주지역 간도특설대의 설립과 활동’은 이 부대가 “항일단체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마을 전체를 소각하거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간도특설대의 여타 구성원들을 포함해 백선엽이라는 인물의 머릿속에서 국가만 중요하고 인간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이 같은 백선엽의 행적은 해방공간의 남한 땅에서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사회발전을 저해한 이북 출신 청년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해방 뒤 북쪽에 체류하다가 월남한 그는 극우 청년단체가 아닌 군대로 가기는 했지만, 극우 청년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보를 걸었다. 서북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호림부대를 수하에 두고 그는 국민 살상을 자행했다.

백선엽은 왜 마흔에 군대를 떠났나

▲ 백선엽 장군 별세, 향년 100세 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께 별세했다. 향년 100세. 1920년 평남 강서에서 출생한 백 장군은 일제강점기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뒤 6·25전쟁 때 1사단장,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주중한국대사,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장지는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사진은 2013년 8월 경기도 파주 뉴멕시코 사격장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미8군 명예사령관 임명식에서 미군 야전상의를 입은 뒤 경례하는 백 장군. ⓒ 연합뉴스

그런데 그는 친일과 반공의 길만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인생 궤적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이인국 박사를 연상케 할 만하다. 평양에서 친일파 의사로 살던 이인국은 해방 뒤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소련파로 변신했다가 한국전쟁 중에 남하해 친미파로 둔갑했다.

만주국 중위 백선엽은 일본이 패망한 다음달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건국준비위원회 지부인 평안남도인민위원회에서 치안대장으로 활동했다. 친일파들이 빨갱이로 부르던 조직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그 시기에 백선엽은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의 비서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조만식이 김일성에게 밀리자 38선을 넘어 친미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한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꺼삐딴 리 스타일의 인생행로를 아주 전형적으로 걸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백선엽에 대해 파고들 것이 많이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왜 나이 마흔에 군대를 떠나 주중화민국대사가 됐는가 하는 점이다. 국방장관 승진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연합참모본부 총장 백선엽의 전역은 1960년 5월 31일에 있었다. 4·19혁명에 직면한 이승만 대통령이 사법처리를 피하고자 하와이로 망명한 지 이틀 뒤였다.

그해 6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연참본부총장) 백선엽 대장 사표 수리’에 따르면, 백선엽은 사퇴 성명서에서 “민주혁명의 정신에 호응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군대의 민주적 개혁의 터전을 선임자로서 닦아주려는 뜻에서 사퇴를 결심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으니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자 사퇴하게 됐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가 사퇴를 결심하게 되는 과정이 유광종 <중앙일보> 기자가 정리한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백선엽 회고록에 나온다. 사퇴하기 얼마 전에 그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의 호출을 받았다. 이 장면이 회고록에 소개돼 있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선 나를 보더니 ‘이제 다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도 옷을 벗었다’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물러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였다. 나는 그의 말뜻을 빨리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히 내게 군에서 은퇴하라는 의사를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의 하야를 지켜보면서 언뜻 품었던 생각이기도 하다. 나는 이 장관에게 ‘알았다. 잘됐다’고 말했다.”

이종찬은 현역군인 신분을 갖고 국방부장관 직을 수행했다. 그는 1960년 5월에 전역했다. 이 대화 시점의 그는 국방장관 직만 갖고 있는 상태였다.

사퇴 성명이나 회고록만 놓고 보면, 백선엽의 전역이 이승만 퇴진에 따른 의례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고위 공직을 지낸 사람이 4·19 혁명 뒤에도 계속 공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에 퇴임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다.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3·15 부정선거에는 군부 수뇌부도 개입했다. 이 점은 1960년 5월 13일에 이종찬 국방부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했던 증언에서도 증명된다. 1960년 5월 14일자 <경향신문> 기사 ‘군의 부정선거 개입 부인 못해’는 “이종찬 국방부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군대가 부정선거에 전혀 가담치 않았다고 부인하지는 못하겠다’고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바로 이 부정선거 책임이 백선엽 전역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승만 하야 뒤에 과도정부(과정)를 이끌며 국정을 책임졌던 허정 대통령권한대행의 기고문을 담은 1962년 4월 23일자 경향신문 기사 ‘허정 씨가 공개하는 과정 3개월 (5)’에 이 점이 설명돼 있다.

기고문에서 허정은 군부 수뇌부의 부정선거 가담을 규탄하는 젊은 장교들의 압력이 거셌다는 점을 설명한 뒤, 자신이 소장급 이상 장군들에게 “당신들은 자기 스스로가 잘 판단해서 좋은 구실과 계기를 만들어 자진 사퇴를 해주시오”라며 “그러면 나도 여러분의 인격과 위신에 맞도록 해외 대·공사직을 마련하여 내보내도록 노력하겠소”라고 권유했노라고 회고했다. 그런 뒤 허정은 기고문 끝에 이런 글을 달아놓았다.

“나의 이 방법은 후에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어 자진 사퇴하는 이가 많이 나왔고, 또 몇몇 분들에게는 약속대로 해외 공관의 공사 또는 대사로 임명해서 현지에 보내준 일도 있다(주: 백선엽·유재흥 장군 등의 주중국·주태국 대사직이 이때부터 마련되었음).”

이 일화는 백선엽이 친일행위와 국민학살에 더해 3·15 부정선거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적폐청산 작업이 군부에 대해서도 철저히 이뤄졌다면, 백선엽의 죄악은 좀더 명확히 세상에 드러났을 것이다. 전쟁영웅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이면의 백선엽은 독 묻은 가시처럼 온갖 부조리를 묻힌 인물이었다.

이처럼 죄악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백선엽은 자기 인생에 자부심을 품었다. 그는 자기가 선엽(善燁)이란 이름의 善처럼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했다. 위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내 이름에는 착할 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 있다. 내 회고록을 집필한 <중앙일보> 유광종 기자가 1948년 박정희 대통령을 숙군 작업에서 살려준 동기가 무엇이냐고 집요하게 묻길래, 그때에도 ‘내 이름에 착할 선이 들어 있잖아’라며 넘어간 적이 있다.

나는 그렇게 살았다는 데 만족한다. 가능하면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돕고,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살리고, 남을 해치려는 자는 힘을 기울여 막으면 좋은 것이다. 그런 마음이 정말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살렸으면 그만이다. 더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얻으려 고심할까.”

자신이 선하게 살았노라고 자부했다. 살릴 사람은 살리면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살릴 사람’이 친일파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은 항일투사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고한 민간인들이 ‘살릴 사람’과 ‘살릴 필요가 없는 사람’ 중에 후자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3·1운동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될 당시의 헌법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3·1운동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나라에서, 3·1운동을 부정하는 친일행위에 가담하고 그것도 모자라 국민들을 마구 학살한 중범죄자를 대전현충원에 모신다면, 국민들은 현충원이 어떤 사람들을 모시는 곳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2020-07-1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백선엽과 대한민국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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