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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어진좌10주년기념 은뢰恩賴

1862

조선신궁어진좌10주년기념 <은뢰> 표지

<은뢰>, 발음부터 어렵다. 뜻은 ‘천황’의 위엄한 자태 또는 존엄한 ‘천황’이 내려와 온 세상에 가득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목부터 이 책자의 편찬 방침이 ‘천황의 은혜’가 곳곳에 미쳐 발전한 조선의 모습을 시각적이고 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은뢰>는 1937년 11월 조선신궁봉찬회에서 조선신궁 건립 1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사진첩이다. 따라서 메이지 ‘천황’을 제신으로 하는 조선신궁의 모습을 중심으로 조선의 자연, 문명, 모성, 의례 등 350여 점의 사진 이미지 삽입, 총 338쪽으로 구성하였다. 책자의 크기는 가로 26cm, 세로 36.5cm이며 재질이 좋은 종이를 사용하여 고급스러움을 추구했다. 비매품인데도 불구하고 발행년도를 달리하여 여러 쇄를 찍었는데 배포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조선을 통치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증정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은뢰>의 소장처는 독립기념관과 연세대 등 몇몇 대학도서관과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데 인쇄 수량에 비해 발견된 것은 많지 않다. 연구소는 수집본과 기증본(즈시 미노루) 총 2점을 소장하고 있는데 모두 1940년 판본이다.

<은뢰>는 총설편, 제1편~제5편,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설편에서는 신궁의 창립 유래와 진좌제 등 조선신궁을 개략적으로 소개한다.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내선융화’의 정서를 시각화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제1편~제5편은 1925년부터 1935년까지 11년을 11개의 장, 5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각 장마다 해당 년에 일어난 사건과 각종 의례 등을 기록해 연보적 성격을 보여 주는데 각 지역의 신사와 명승고적 및 메이지 ‘천황’의 제사를 고르게 배치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현인신現人神’인 ‘천황’의 실체는 사진첩에 나타내지 않고 있다. 대신 인간의 모습이 아닌 신성한 자연으로 표상된다. 나무, 해, 구름, 빛 등 자연의 모습을 신비로운 광경으로 이미지화하였다. 또 경성 전역의 야경 사진과 제신의 신체를 싣고 달리는 기차 등의 이미지를 통해 ‘천황’은 조선에 문명을 가져온 상징으로 표상되었다. 이러한 상징 기법은 “조선의 산천 가득히 생생한 발전모습이야말로 진실한 신광(神光)의 현현(顯現)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호도 ‘은뢰’ 즉 ‘천황의 은혜’”이며 “조선 전역 곳곳에 부는 신풍(神風)”과 함께 “내선동근(內鮮同根)의 사상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몽환적 분위기의 이미지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은뢰>는 기념사진집의 성격과 함께 식민통치의 이념을 정서적 차원에 호소하는 선전물이다. 식민통치권력이 ‘사진’이라는 시각매체를 통해 식민통치의 역사를 기록하고 스스로 어떠한 판타지를 꿈꾸며 그것을 선전하려 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강제병합을 하자마자 대한제국의 국가제례를 폐지하고 일본의 국가신도로 대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조선신궁 건립이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과 일본 황실의 선조로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제신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조선신궁은 국가신도의 제사뿐 아니라 조선총독부의 주요 시정과 행사를 알리는 의례 공간이 되었고 공식행사에는 반드시 이왕가를 참여시켰다. 또한 조선신궁은 조선 및 경성 관광 코스의 하나로 반드시 포함시켰으며 황국신민화정책이 전면화되면서 모든 학교와 단체의 공식적인 신사참배가 이뤄지는 내선일체의 공간으로 자리잡는다. 이들에 대한 참배는 결국 일본 황실의 조상을 섬기고 일제의 조선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었다. 신사 참배는 조선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하려는 상징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해방 이후 민중이 가장 먼저 파괴한 것이 바로 조선신궁이었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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