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창간 100년 맞아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기획전 시작
1939년 6월, 일본군 육군특별지원병(1938~1944년 시행) 이인석이 전사했다. 첫 조선인 지원병 전사자였다. 민족정론지를 자처하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앞다퉈 ‘이인석 영웅만들기’에 나섰다. 아래는 이들이 쓴 기사다.
적진에 돌입, 역습 적을 분쇄 – 1939년 9월 6일 <조선일보>
영예의 전사한 이인석 가정방문기 – 1939년 7월 9일 <동아일보>
신질서의 ‘초석’ – 1939년 10월 1일 <조선일보>
고마운 주검 – 1939년 10월 3일 <동아일보>
제일선에 세운 무훈 – 1940년 1월 3일 <조선일보>
성전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는 지원병 – 1939년 7월 23일 <소년 조선일보>
고 이인석 상등병에 금치훈장을 하사 – 1940년 7월 16일 <동아일보>
은막(영화)에 나타날 지원병 생활 – 1939년 12월 16일 <동아일보>
두 언론은 이들 기사를 통해 “현지로부터의 보고에 따르면 이(인석) 일등병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와중에도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동료들에게 성전의 완수를 부탁했다”라며 “각지에서는 이인석 군의 명예로운 죽음을 본받아 ‘나도 일본 군인으로 전장에 나가겠다’는 지원의 열기가 더해지고 있다. 이처럼 전사의 드높은 명예를 지킨 죽음에 조선 사람들은 고마움과 경의를 표하고 있다”라고 썼다.
또 “고 이인석 일등병은 전사 보도 직후 상등병으로 승급했고 군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금치 훈장을 받았다”라며 “이처럼 지원병 제도는 내선일체의 구현, 황국신민에의 출발이 되고 있으며 그 성과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나가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원병의 성장과 멜로 등을 테마로 한 영화 ‘지원병’이 제작된다”라며 “이 밖에 나니와부시(일본 정통음악)로 각색되는 ‘오호 이인석 상등병’은 그의 행적과 황국신민다운 일화를 주요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 이 같은 시도와 성과에 거는 기대가 크다”라고 소개했다.
총독부가 언론을 “굴뚝”이라 칭한 이유
<조선일보>·<동아일보> 창간 100년을 맞아 두 신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는 기획전시회가 11일 시작됐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가 발행을 허가한 1920년부터 1940년 폐간되기까지 20여 년간에 걸친 두 신문의 부일 협력 행위를 추적한다”라며 10월 25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일제 부역언론의 민낯’ 기획전을 진행한다. 전시회가 시작된 8월 11일은 80년 전 두 언론사가 폐간된 날이기도 하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하고 식민지역사박물관이 주관하는 전시회는 총 4부(▲ 조선의 입을 열다 ▲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 ▲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 ▲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로 구성돼 있다.
‘1부 조선의 입을 열다’에선 <조선독립신문> 등 항일 지하신문과 이에 맞서 일본의 ‘문화통치’ 하에서 만들어진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굴뚝이 있어 연기가 잘 배출되면 그 파열을 막을 수 있는 겁니다. 총독부가 조선어신문을 허용했던 것은 바로 굴뚝을 만들어준 것과 같은 격이고, 조선의 긴장된 공기를 완화하는 데 아주 좋은 분출구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 조선총독부 미즈노 렌타로 정무총감, <조선통치비화>(1937)
이러한 기조에 따라 1924년 이광수는 동아일보에 논설 ‘민족적 경륜’을 썼다. 당시 재일 조선일 유학생 단체들은 이광수와 동아일보를 비판하는 성토문을 내는데, 민족문제연구소는 전시회를 통해 최초로 이 성토문을 일반에 공개했다. 성토문에는 “동아일보사를 중심하여 조직된 일본의 제국주의적 자본벌의 전위대는 조선 독립운동의 본질을 거세하고 있다. (중략) 조선의 민중으로 하여금 영원히 일본의 제국주의 자본벌의 굴레 밑에서 굴종하게 만들려고 한다”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2부 황군의 나팔수가 된 조선·동아’에선 손기정 마라톤 선수(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 사진에서 일장기를 없앤 사건 이후 <동아일보>의 입장을 담은 여러 글이 전시돼 있다.
“동아일보가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일으킨 것은 참으로 공구함을 금할 수 없던 차에 새 사장을 발행인으로 허가받고 발행정지 처분 해제의 은혜로운 명을 받았으므로 (중략) 황실국가에 충근을 다하여 성의로써 조선통치에 익찬할 것을 방침으로 별지 항목에 따라 서약합니다.” – 1937년 6월 1일 주식회사 동아일보 대표 백관수
“금후부터 한층 더 근신하여 다시는 이러한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주의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을 기하려 하옵니다.” – 동아일보사 사고
‘3부 가자, 전선으로! 천황을 위해’에선 기사 초반에 소개한 ‘이인석 영웅만들기’와 같은 일제 침략전쟁 미화 행위를 담고 있다. ‘4부 조선·동아 사주의 진면목’에선 방응모·김성수의 친일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
서로 친일신문이라 비방한 조선·동아
1985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서로를 친일 신문이라고 비방했던 내용도 전시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민족혼을 일깨운 탄생,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 – 1985년 4월 1일 <동아일보> 조용만 칼럼 (동아일보, 민족혼 일깨운 탄생)
“김(성열) 사장, 제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반일, 친일 논쟁에 에스컬레이트 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 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김성수)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 1985년 4월 14일 <조선일보> 선우휘 논설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
“<조선일보>가 친일 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 – 1985년 4월 17일 <동아일보> 보도 (애독자 제현에게 알려드립니다)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동아일보> 초대 사장. 친일 계보가 속속들이 파헤쳐져야 한다.” – 1985년 4월 19일 <조선일보> 보도 (우리의 입장 :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
전시 첫날임에도 11일 오전 찾은 현장에선 여러 관람객을 만날 수 있었다. 김상일(62, 서울 중구)씨는 “어제 이러한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 첫날 오전부터 찾았다”라며 “국민들 마음속에 언론인은 그대로 지식인이 아닌가. 이 사회를 잘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불의에 야합하고 놀아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라고 말했다.
이어 “힘이 없는 약소국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라며 “예나 지금이나 일부 언론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전시를 통해 국민들이 자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라고 덧붙였다.
함세웅 신부는 “민족을 배반한 불의한 무리가 많이 있는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를 대표하는, 100년 전 태어나면 안 됐을 언론이었다”이라며 “민중의 혼을 썩게 만든 두 언론은 지금도 건재하다. 당사자들의 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며 전시회에 왔다”라고 말했다.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학예실장은 “두 언론사가 민족지의 이름으로 존재할만한 신문인지 그들이 써놓은 기사로 그 민낯을 드러내는 전시회”라며 “전시회를 통해 부역 언론을 청산하지 못한 후과를 뼈저리게 되새겼으면 한다”라고 설명했다.
전시회와 함께 ‘지금, 언론개혁을 말한다’를 주제로 한 연속 특강도 진행된다. 이날 김종철 <뉴스타파> 자문위원장(1강, 8월 11일)을 시작으로 장신 교원대 교수(2강, 8월 13일), 박용규 상지대 교수(3강, 8월 18일), 정준희 한양대 교수(4강, 8월 20일),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5강, 8월 25일),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6강, 8월 27일)이 강사로 나설 예정이다.
<2020-08-11>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본군 지원한 조선인 죽자, “성전에 참가” 극찬한 조선·동아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