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75주년 기획 – 공유지 위에 선 친일파 ②] 서정주 집과 시비, 관악구 예산으로 관리
김성수, 서정주, 조택원, 김기수, 함화진, 주요한.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및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동상 및 시비, 기념관 등이 공유지에 수십 년째 자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광복 75주년을 맞아 오마이뉴스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현장에서 이를 직접 확인했다. [편집자말]
“서울미래유산 서정주 가옥”
서울지하철 사당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위치한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 ‘서정주의 집’ 대문 옆쪽에 붙은 표지석 내용이다. 2013년 서울시는 서정주의 집을 “시작(詩作)의 산실로 시인의 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장소”라면서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해 발표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서울을 대표하는 유산 중 등록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은 유무형 자산을 보전하기 위해 서울시가 마련한 프로젝트다.
관악구 역시 이에 발맞춰 서정주의 집을 “시인의 숨결과 생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미당의 주요 유품들과 저서들을 전시하고 있다”면서 관악구 홈페이지에 ‘인기명소’로 소개했다. 현재 이곳은 관악구청 재산으로 등록돼 관리 운영되고 있다.
2003년 서울시는 서정주의 집을 매입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은 미당 서정주의 집이 한 건축업자에 매각될 상황에 놓이자 시비 7억 5000만 원을 들여 매입했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매입은 했지만 공사비를 확보하지 못해 서정주 집은 빈집으로 방치됐다. 2009년 오세훈 서울시장 재임 당시 서울시는 시비 10억 원, 구비 2억 5000만 원을 추가로 투입해 서정주의 집에 대한 개보수를 진행했다. 대문 우측 마당에 ‘미당 서정주의 집’이라는 파란색 간판까지 올려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서정주의 집’은 2011년 정식 개관했다. 이후 기념관 형태로 서정주의 유품과 시집, 사진 등이 전시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앞서 서정주는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시를 통해 학병과 지원병, 징병을 선전하고 선동했고, 산문을 통해 문인으로서의 ‘문필보국’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바 있다.
관악구 곳곳에 남은 서정주 흔적
서정주는 2000년 사망할 때까지 말년 30년을 서울시 관악구 남현동에서 살았다. 이 때문에 관악구에는 ‘서정주의 집’을 포함해 서정주와 관련된 기념물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서울 지하철 사당역 6번 출구 남현예술정원 입구에 세워진 서정주의 시비도 이 중 하나다. 지난해 1월 기존의 수경공원을 철거하고 새롭게 개장한 남현예술정원에는 서정주의 시 <신부>가 시비로 설치돼 있다. 미당의 시비 맞은편에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원수의 시비 <겨울나무> 역시 설치돼 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정주의 집과 더불어 관악구 인기명소로 등재된 관악산호수공원에도 서정주의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1997년 12월에 조성된 관악산호수공원은 서울대학교 정문 우측, 관악산 진입로에 자리한 도시자연공원이다. 관악구는 시비 앞쪽 안내판에 “우리구에 거주하며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미당 서정주님의 관악사랑 정신을 담은 시비를 세워 애향심을 표상으로 했다”라는 설명을 기재했다.
‘서정주의 집’을 포함해 시비 등을 직접 관리하는 관악구는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서정주 시인에 대한 시민들의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면서 “서울시에서 (서정주의) 집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했고 이에 따라 (관악)구에서는 최소한의 예산을 투입해 운영·관리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관악구는 “절충안을 찾고 있다”면서 “협의를 거쳐 서정주의 (친일 관련 내용을 포함하는) 안내판 등을 설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정주의 집 등 기념물을 폐기하거나 용도변경을 할 계획이 있느냐’라는 질문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서 “민원 역시 상대적이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서정주가 친일파인데 친일행위를 한 사람을 기릴 필요가 무엇이냐’라고 말하지만, 다른 쪽에선 ‘시인을 시인으로 평가해야 한다’면서 미당 서정주라는 사람의 업적에 대해 말한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안내판에 미당의 친일행적 부분을 기록하면 열람하는 시민들이 판단하지 않겠냐”라고 밝혔다.
미온적인 관악구… 춘천·부천 등 2019년 서정주 시비 철거
관악구는 서정주의 기념물 철거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서정주의 시비 등을 보유했던 일부 지자체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2019년 5월 춘천시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춘천문학공원 내 자리한 서정주, 최남선 등의 시비를 철거해 땅에 묻었다. 춘천시는 시비가 있던 자리에 “이곳, 춘천문학공원에 불손하게 들어앉은 일제강점기 친일 문인들의 흔적을 이곳에 묻는다. 슬픈 역사도 버릴 수 없는 우리의 것이나 민족의 아픔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까닭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표지석을 세웠다.
사례는 또 있다. 2019년 8월 부천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관내 서정주의 시비 3개를 포함해 주요한, 노천명 등 국가공인 친일파로 등재된 인물들의 시비를 철거했다. 당시 부천시는 “시민들로부터 친일파의 시비를 철거해 달라는 민원이 꾸준히 제기됐다”면서 “문화예술분야에서의 친일잔재 청산을 위해 친일파 시비를 철거했다”라고 밝혔다. 철거된 빈자리에는 정지용의 시 ‘향수’를 담은 시비를 설치했다.
2019년 11월, 충남 태안군 주민들은 서정주의 시비를 세우려던 군의 건립계획을 집단적으로 반대해 취소시켰다. 당시 건립추진위원회는 서정주가 1956년 학암포를 찾아 ‘학’이란 시를 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군비 2000만 원을 들여 학암포해수욕장 인근에 높이 2m, 폭 1m 크기의 서정주 시비 건립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태안참여연대 등 지역 시민단체들이 중심이 돼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진행했고, 그 결과 시비 건립은 전면적으로 취소됐다.
이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실장은 4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서정주 기념물 철거는 결국 단체장의 의지 문제”라면서 “이미 서정주의 시비를 철거한 지자체가 존재한다, 당장의 철거 등이 제한된다면 객관적인 사실을 담은 안내판이라도 바로 설치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관악구에 자리한 서정주의 집을 비롯해 사당역과 관악산에 세워진 시비에는 그의 친일행적과 관련된 기록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다.
<2020-08-14>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