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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육참총장 친일파” 파문] 초대~10대는 명백… 11~21대는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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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1대부터 21대까지 모두 일제 빌붙어 독립군 토벌하던 자” 발언 팩트체크

▲ 김원웅 광복회장이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승만이 집권하여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75주년을 맞아 전국에서 열린 기념식에 광복회원들이 사용하도록 보낸 기념사 중 일부다. 기념사에선 “이들 민족 반역자들은 국무총리, 국회의장, 장관, 국회의원, 국영 기업체 사장, 해외 공관 대사 등 국가 요직을 맡아 한평생 떵떵거리고 살았다”면서 “대한민국은 친일파의 나라, 친일파를 위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명시됐다. 김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정부 주관 행사에서는 이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후에 발생했다. 같은날 제주시 조천체육관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광복회 회원이 대독한 광복회장 기념사를 들은 원희룡 제주지사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면서 “김일성 공산군대가 대한민국을 공산화 시키려고 왔을 때 목숨 걸고 나라를 지켰던 군인과 국민들이 있다. 그분들 중에는 일본 군대에 복무했던 분들도 있다. 공과 과를 겸허하게 봐야한다”라고 반박했다.

재향군인회도 18일 성명을 내고 “광복회장이 지나치게 편향된 역사관을 가졌다”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애국자에게 친일 프레임을 씌워 토착 왜구로 몰아 국론을 쪼개는 데 앞장서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김원웅 회장의 광복절 기념사 중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라는 발언은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은 확실히 맞고, 반은 친일파 범주에 따라 논의가 좀더 필요하다. (기사 하단 도표 참고)

1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부터 10대 육군참모총장 백선엽까지는 명징하게 친일행보를 보인 인물들이다. 국가에서도 공인하고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인물들이 다수다. 그러나 11대 송요찬부터 21대 이세호까지는 ‘친일파’로 규정한 공인기록이 없다. 다만 다수가 일본군 및 만주군 하급 간부로 활약하거나 일본군 장교가 되기 위해 준비했던 인물들이다.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이 국군에 뿌린 ‘친일의 씨앗’

▲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의 묘에서 내려다 본 임시정부 요인 묘역 (국립서울현충원) ⓒ 김종훈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은 국가공인 친일파 이응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무려 30여 년을 복무한 인사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조선 출신임에도 일본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 이런 인물이 해방 후 우리 군의 중추가 돼,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인사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요직을 차지하는 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

해방 후 미군정과 긴밀히 접촉한 이응준은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국방사령관 고문으로 위촉됐다. 이후 김백일, 백선엽, 채병덕 등 일본군 및 만주군 출신 군인들을 미군정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했다.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이들은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국군의 핵심이 된다. 이응준은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번째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이 때문에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위치한 장군2묘역에 묻힌 이응준의 묘에는 ‘군의 아버지’라는 글이 새겨졌다.

하지만 이응준은 일제강점기 내내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41년 일본군 육군 대좌로 승진한 이응준은 후방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며 여러 차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군인이 돼 전쟁터로 나가 목숨을 바쳐 천황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라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2009년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이응준을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해 공식보고서에 올렸다. 같은해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도 이응준의 이름은 등재됐다.

[2~10대] 침략전쟁에 공헌한 국가공인 친일파 참모총장 신태영, 이종찬, 백선엽

▲ [현충원 안장 친일파] 이응준 묘지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과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이 잠든 묘역. 바로 아래쪽에 애국지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묘역이 조성됐다. ⓒ 김종훈

3대 육군참모총장 신태영과 6대 이종찬, 7대 및 10대 백선엽 역시 모두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공인한 친일파이자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등재된 인물들이다.

신태영은 아들 신응균과 함께 부자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이응준과 마찬가지로 일본 육사를 나와 시베리아 간섭전쟁과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일제 부역했다. 김원웅 광복회장이 지난 15일 광복절 기념사에서 “조선청년의 꿈은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야스쿠니신사에 묻혀 신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 주인공이 바로 신태영이다. 그는 3대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4대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묘 역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머리맡에 있다.

6대 참모총장 이종찬은 할아버지 이하영, 아버지 이규원과 함께 3대가 국가공인 친일파로 선정된 인물이다. 1937년 중일전쟁에 참전해 상하이 방면에서 크게 활약했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중 최초로 최고등급인 금치훈장을 이종찬에게 수여했다. 당시 중일전쟁의 여파로 중국 상하이, 항저우, 난징 등 지역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총검을 피해 중국 내륙으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해방 후 이종찬 역시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서울현충원 장군3묘역 최상단에 그의 묘가 있다.

지난 7월 10일 사망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백선엽 역시 정부에서 공인한 친일파다.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공식보고서에는 백선엽이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패전 시까지 일제의 실질적 식민지였던 만주국군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협력했고, 특히 1943년부터 1945년까지 항일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라고 기록됐다.

이외에도 2대 참모총장 채병덕과 5대 정일권, 9대 이형근은 모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만주 전선과 후방에서 일군과 만군에 소속돼 직간접적으로 독립군 토벌에 역할을 한 일본군 장교들이었다.

[11~21대]일본군 하급간부 출신 다수… 독립군 토벌 기록은 없어

▲ 국립서울현충원의 상징인 현충탑 바로 뒤쪽에는 친일파 김홍준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 김종훈

대한민국 11대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지원병 출신으로 일본군 오장(부사관)으로 복무한 인물이다. 일본군으로 복무 당시 그는 전선에 나가는 대신 훈련소에서 조교 등으로 복무하며 조선 출신 청년들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데 일조했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했다. 송요찬은 제주4.3 진압군 지휘관으로 군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육군참모총장과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12대 최영희, 14대 장도영, 15대 김종오, 16대 민기식, 17대 김용배, 18대 김계원, 19대 서종철 등은 모두 학병 출신으로 1944년~1945년 태평양전쟁 후반부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그러나 전선에 나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공식 기록은 없다.

13대 최경록은 11대 송요찬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에 지원병으로 자원입대한 인물이다. 하사관후보생을 거쳐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육사 입학을 위해 대기하던 중 부상을 당해 일본군 장교가 되지 못했다. 21대 이세호 역시 1944년 일본 육군항공대 간부후보생으로 지원해 일본에서 교육을 받던 중 종전을 맞았다. 이 때문에 전선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20대 육군참모총장 출신 노재현은 일제강점기 후반부 행적이 다소 묘연한 상태다. 일부 언론에서 ‘일본군 경력이 전혀 없다’라고 강조했지만, 일본 육사를 거쳐 일본군 소위를 역임했다는 기록 역시 발견되고 있다. 다만 전선에서 활약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는 상태다.

광복회 관계자는 19일 <오마이뉴스>와의 통화에서 “1대부터 21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들은 모두 일본군과 만주군에 소속돼 활약한 인물들”이라면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과 만주군의 존재 목적은 일왕에 충성 맹세를 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맞서서 명백하게 침략전쟁을 수행했던 군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친일파라는 범주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일본군과 만주군에 부역한 친일행적에 대해서 만큼은 1대부터 21대까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2020-08-2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육참총장 친일파” 파문] 초대~10대는 명백… 11~21대는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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