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하라 고이치등 일본인이 실제 애국가 작사자 8대 혐의
기시와 에하라, 상상 그 이상 긴밀한 관계
20일 김원웅 광복회장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독일 연방 문서보관소’를 통해 확보한 안익태 작곡가의 ‘만주국 건국 10주년 음악회 지휘 동영상’을 공개했다.
김 회장은 “(애국가는) 저와 부모님도 불렀던 노래지만 저희들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야 한다”면서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가를 시대에 맞게 교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미국은 이미 두 번 교체했고 독일은 세 번 교체했다. 오스트리아는 다섯 번, 프랑스는 일곱 번 국가(國歌)를 교체했다”며 “108개 이상 나라가 국가를 지금 시대에 맞게 교체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국가를 교체하지 않은 극소수 나라 중엔 일본이 있다”면서 “(국가를 시대에 맞게) 고치지 않은 것도 일본을 따라가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회장은 안익태 작곡가의 친일·친나치 행각과 애국가 표절의혹에 대해 “이미 음악계에는 역사적 상식으로 알려졌다”고 말했다. 이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친일 반민족 권력이 장악해온 시대를 조문하는 게 우리가 해야할 역사적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의 친일 및 친나치 행적은 기존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특히 노동은, 송병욱, 이경분, 이해영 선행 연구자가 지속적으로 제기해왔으며 많은 연구 성과도 있었다. 필자는 선행 연구 업적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안익태의 보스이자 일제 고위 간첩인 에하라 고이치(江原耕一, 1897~1969년, 이하 ‘에하라’로 약칭)를 중심으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7~1987년, 아베 신조 총리의 외조부, 이하 ‘기시’로 약칭), 박정희(1917~1979년, 창씨개명: 다카기 마사오, 오카모도 미노루, 만주인맥, 멘토:기시), 윤치호(1866~1945년, 창씨개명: 이토지코, 무궁화 도입자, 애국가 작사자, 후원자: 이토히로부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년, 윤치호의 후견인),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 ,1924~1991년, 아베 총리의 부친), 장징후이(张景惠, 1871~1971년, 만주 괴뢰국 총리, 만주국 국가 명의상 작사자) 등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톺아보았다.
에하라 고이치등 일본인이 실제 애국가 작사자(?) 8대 혐의
첫째, 에하라 고이치가 작시한 것에 안익태가 곡을 붙인 <한국환상곡>이 현재 애국가의 모태가 된 <만주환상곡>이다. 안익태가 중국의 멜로디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코치를 받아 편곡하고, 에하라가 지은 가사를 <만주환상곡>의 피날레에 코러스를 삽입했다. 에하라가 지은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둘째, 안익태는 1941년 루마니아 음악연주회에서 에하라를 만나고 일·독 협회가 안익태를 후원하도록 주선했다. 에하라는 안익태의 매니지먼트 역할을 하였고 안익태는 1941~1944년 4월까지 에하라의 베를린 공사참사관 관저(Gustav-Freytag-Straße 15 in Berlin-Grunewald)에서 기거하며 숙식을 같이했다. 시문에 조예가 깊은 에하라가 작사 또는 개사하면 안익태는 <에텐라쿠(月天樂)>와 <만주환상곡>을 작곡하고 지휘했다. 안익태는 만주국환상곡을 매국의 도구로 활용하다가 시대가 바뀌니까, 그것을 다시 애국의 이름으로 재활용해 한국환상곡(Sinfonie Fantastique Korea)으로 바꾸었는데 여기에 애국가 선율이 들어있다. 1948년도 이승만 정부가 탄생하면서 이를 애국가로 지정했다.
셋째, 애국가 가사가 아무리 종일매국노라도 일본 본토인이 아니라면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 중 대표적인 네가지만 들면 다음과 같다.
① 시즈오카현 하마마쓰시의 철갑 두른 소나무(鎧卦松요로이가께마쓰)는 한국의 정이품송같은 일본의 특정 소나무다. 일본의 핵심인사만이 알 수 있다.
② 바다와 물이 산보다 먼저 나온다. 이건 거의 해양국가 일본인의 무의식 본능 차원이다.
③ 작사자가 아무리 종일매국노라해도 자기 나라를 ‘해’ 아닌 ‘달’로 비유할 수 없다고 본다.
④ 공활? 구한말 이전과 이후에도 쓰지 않았던 한국인 최고 지식인도 잘 알 수 없는 일본식 난해어이다.
넷째, 만주국 국가 가사 작사자는 명의상 중국인 총리가, 실제 작사자는 일본인이다. 또한 애국가의 ‘무궁화 삼천리’ 만주국 가사 ‘인민 삼천만 인민 삼천만’은 가사가 한 사람이 쓴 듯 매우 흡사하다.
다섯째, 에하라는 일본 기독교협회 발간 <찬미가> 1931년 1954년 가사 방역자(번역을 도와준 자)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도 1907년 <찬미가> 가사 방역자로서 제14장 애국가 가사를 방역했다 에하라가 윤치호의 찬미가 속의 가사를 한국의 애국가로 날조 작업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섯째, 1942년 3월 윤치호는 만주 수도 신경(新京 지금의 창춘)을 방문해 제2차 만주국가 명의상 작사자 장징후이 총리와 면담했다. 만주와 조선이 하나가 돼 대일본제국에 충성을 맹세하고 서적을 교환했다. 장징후이가 1937년 서울 방문시 윤치호를 만난 적 있다.
일곱째, 1942년 9월 5일 장징후이 명의, 일본인 작사, 야마타 고사쿠(안익태의 지기이자 경쟁자) 작곡인 대만주국 국가를 발표했다. 13일 후 1942년 9월 18일 안익태 작곡 에헤라 고이치 작사 한국환상곡 (만주환상곡 피날레)이 베를린에서 연주됐다.
끝으로 여덟째, 에하라 고이치는 일제강점기 만주인맥의 핵심인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원한 멘토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의 외조부) 총리의 초·중·고등학교 대학 동문이자 최측근 인사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1954~) 일본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의 고등학교와 대학 대선배였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애국가를 계속 유지하고 애국가 작사자를 미상으로 놔둔 속사정은 이런 끈끈한 관계가 아닐까 추정된다.
기시와 에하라, 상상 그 이상 긴밀한 관계
필자가 추적해본 바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와 안익태의 후견인 겸 보스인 에하라 고이치의 관계는 상상 그 이상의 긴밀한 관계다. 다음 열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기시와 에하라는 같은 해 같은 달 이틀 사이로 같은 지역에서 태어났다. 노부스케는 1896년 11월 13일 야마구치(山口)현에서 태어났고 바로 이틀 후인 15일 에하라는 오카야마(岡山)현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나 오카야마나 둘 다 혼슈 서부 쥬코쿠(中國) 지방이다.둘째, 기시와 에하라는 오카야마 초·중학교 동창이다. 기시는 당시 쥬코쿠 지역 최고의 교육도시 오카야마시 우치야마시타(内山下) 소학교와 오카야마 중학교를 진학했다. 기시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던 숙부 오카야마 전문학교 교수가 폐렴으로 죽자 3학년 1학기때 야마구치 중학교로 전학했다. 후일 도쿄의 구제 제1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에하라도 기시와 같은 오카야마시 우치야마시타 소학교와 오카야마 중학교를 나와 당시 일본최고 명문고 오카야마 제6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오카야마 6고는 국수주의 경향의 교풍 아래 정·재계와 법조계에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와 미야자와 유타카(宮澤裕, 중의원 의원 전 총리 미야자와 기이치(宮沢喜一)의 아들) 역시 오카야마 6고 출신이다. 기시의 숙부가 급사하지 않았다면 둘은 고등학교까지도 동문이었을 수 있다.
셋째, 둘 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전공 3년 선후배 사이다. 기시는 1917학번이고 에하라는 1920학번이다. 둘 다 대입시험을 독일의 필기시험만으로 손쉽게 통과했으며 도쿄대 법대에서 독일 법학을 전공했다. 둘 다 독일어에 능통하고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 문화에 매료됐다. 둘 다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천황주권론을 주장하는 우에스기 신기치(上杉愼吉)의 학설을 추종했다
넷째, 둘 다 도쿄법대 졸업 후 정부 관료의 길을 걸었다. 기시는 묘하게도 당시 엘리트들이 간다는 외무성이나 대장성을 가지 않고 2류 부서로 취급받던 농상무성에 들어갔다. 에하라 역시 주코쿠 지역 세관에서 일했다고 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으나, 구체적 근무지역과 기간은 알 수 없다. 1937년 창설된 내각정보국(CIRO)의 전신인 비밀 정보기관에서 중견 공작관 에이전트 핸들러(Agent Handler)로 근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둘다 악명높은 하얼빈 교외에 근거한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1892~1950년)의 직속상관이다.
둘 다 악명 높은 만주국 하얼빈 교외에 근거한 생체실험 731부대의 양대 수뇌다. 아사히신문 1937년 6월 12일자 보도에 따르면 기구개혁을 수반한 만주국 내각 개조를 단행해 만주국 양대 요직인 산업부 차장에 기시 노부스케를, 하얼빈 특별시 부시장에 에하라 고이치를 임명했다.
여섯째, 둘 다 만주가 출세 근거지였다. 기시는 1936년 7월부터 만주괴뢰국에서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39년 3월 총무청 차장으로 영전해 만주국 「산업 개발5개년 계획」을 입안, 만주경영의 핵심 실권자가 됐다. 1941년 도조 히데키가 총리가 되면서 귀국해 도조 내각에 상공대신으로 취임하고 1942년에는 중의원 선거에 당선돼 국회로도 진출했다.
에하라는 주 독일 만주 참사관으로 발령받아 1938년 10월 2일 고베를 출항해 독일 함부르크로 떠난다. 그리고 나찌 독일이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를 점령하자 만주국 공사참사관을 지냈다.
만주국의 특별시 하얼빈의 최고 실세 부시장은 차관급으로 그가 명의상 맡은 주 독일 만주 공사참사관은 외관상 강등이다. 사실 그는 유럽과 만주를 종횡망라하는 거물 에이전트 핸들러로서 안익태 등 수많은 에이전트를 육성, 문화 예술 사상 부분의 침투를 총괄 관장했다.
에하라는 “베를린에서 가장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약 300명의 요원”을 관리했다. 독일인과 한국인, 심지어 일부 학자와 예술가들까지 다양한 국적의 에이전트였다. 유럽 여러 나라 수도를 종횡무진 했다. 에하라 고이치는 성장급(차관급) 최고위 관료 출신 에이전트 핸들러였다.
일곱째, 둘 다 패전 이후 구속됐다가 석방됐다. 기시는 패전 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서 A급 전쟁 범죄 용의자(평화에 관한 죄)로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도조히테기 등 A급 전범 7명 교수형 집행 다음날 1948년 12월 24일 석방됐다. 에하라는 1945년 4월 5일, 히틀러 자살에 이은 독일의 항복 선언으로 소련군에 의해 신병이 인수되어 만주로 귀임했으나 소련군 전범 수용소에서 1년여 수형 생활후 1946년 12월 25일에 귀국 조치된다.
여덟째, 석방후 승승장구했다. 기시는 석방 후 총리가 됐으며, 자기 동생도 총리, 외손자 아베도 총리, 박정희 등 한국의 종일매국자를 직·간접적으로 조정했다. 에하라는 일본 우익변호사협회 청우회 간부로 거액의 수임료를 챙기며 노후를 즐겼다.
아홉째, 둘 다 한국의 애국가와 나라 꽃에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1937년 만주국 공업부 차관, 1939년 3월 총무부 장관으로 영전과 승진을 거듭하는 중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총설계했다. 만주은행에서 만주은행권을 발행했지만 거의 유통되지 않았다. 만주국의 유통화폐 대부분은 무궁화 문양이 크고 뚜렷하게 인쇄된 조선은행권 발행 지폐들이 차지했다. 이 무궁화 문양 조선은행권이 무궁화 군락지 야마구치 출신 기시의 핵심 동력원이었다. 재임 중 기시는 도쿄 근교에 일본 최대의 식물원 진다이(神代) 식물공원과 그 공원내 별도로 대규모 무궁화 화원을 조성해 1961년 10월 개장했다
에하라는 기독교 신자로서 애국가가 수록된 윤치호 역술 『찬미가』(1908년)에 영향을 끼친 일본기독교연합 『찬미가』(1903)년 판 증보 개정판 『찬미가』(1953년판)를 방역했다.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급 전범, 731부대장, 난징대학살 시체 처리반장)를 총애하여 상공부 요직 과장에 발탁하였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가 아베 신조 총리다.
열째, 기시와 에하라는 한국의 국익으로 볼 때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들이다. 이 둘과 애국가, 무궁화에 관련한 사건은 지나간 역사 문제가 전혀 아니고 현재진행형 국가위신과 국가기강, 헌정질서와 직결된 문제다.
◇참고문헌
이경분,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
이해영, 『안익태 케이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 삼인, 2019.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2)」, 민족문제연구소, 2009.
Hoffmann, Frank, 『Berlin Koreans and Pictured Koreans』(2015) (PDF). Koreans and Central Europeans: Informal Contacts up to 1950, vol. 1. Vienna: Praesens.
<2020-08-22> 아주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