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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일왕 머리를 베었어야” 법정서 일갈한 선비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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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6일, 순국 102주기 맞는 만송 유병헌(1842~1918)을 기리며

▲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 현충사에 전시된 만송의 초상. ⓒ 서대문독립공원 전시사진

8월 26일은 경북 칠곡의 선비 유병헌(劉秉憲, 1842~1918)의 순국 102주기다. 1918년 이날, 그는 보안법과 주세령 위반으로 복역하던 대구 감옥에서 8일간의 단식 끝에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77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면서 시작된 그의 항일 투쟁은 일제 치하의 납세뿐 아니라, 토지조사 사업까지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세 차례의 투옥 끝에 마침내 옥중 순국한 것이다.

유병헌은 1842년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에서 유익원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호는 만송(晩松). 그는 진주 민란(1862)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과 강화도 조약(1876) 등을 겪으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 칩거해 학문에 전념할 수밖에 없던 어지러운 시대였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면서 국권을 침탈하였을 때 그는 예순셋 노인이었지만, 이 강골의 선비는 서책을 덮고 조약의 무효화와 왜적 격퇴를 주장하는 상소로 여론을 환기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지 않아 결국, 경술국치(1910)에 이르자, 죽기를 각오하고 대궐을 바라보며 통곡한 뒤 곡기를 끊기도 했지만, 그는 일제에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유병헌은 ‘오적 성토문(聲討文)’을 큰길 가에 게시하여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오적(五賊)과 송병준·조중응 등 정미칠적(七賊), 이용구 등 일진회의 매국 행위를 매섭게 꾸짖었다. 또, 경상·전라·충청 등 삼남의 시골 선비들에게 서찰을 보내 일제에 항거하기를 촉구했다.

“한 나라에 해가 둘일 수 없다. 조선의 해는 고종황제뿐이다. 일왕(日王)은 인정할 수 없으니, 첫째, 망국의 한일합병을 혁파하라. 둘째, 경술국치를 투쟁으로 회복하라. 셋째, 국치 오적을 주살하라. 넷째, 일왕의 모든 법령과 그 행위는 부정하라. 다섯째, 일왕이 내린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어떤 조세나 부역도 응하지 말라”, 납세거부 주도한 유병헌

그는 총독과 일본 내각은 물론, 청나라와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각국 공관에 서신을 보내 병탄의 불의함을 항의하면서 세계여론에 호소했다. 1911년 친일 주구(走狗)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의 송덕비를 충청도 청산(충북 옥천)에 세우려 하자, 바로 청산향교에 이를 엄중히 항의하는 통문을 보내기도 했다.

▲ 금오산 선봉사로 가는 길가 바위에 새긴 만송의 글씨.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 이 바위는 세 차례나 부근을 찾은 끝에 간신히 발견했다. ⓒ 장호철

일제는 유병헌을 회유하고자 작위 수여와 은사금(恩賜金)을 제안했다. 강제합병에 협조한 대가로 일왕이 친일파 귀족들에게 준 은사금과 작위는 ‘은혜로운 돈’이 아니라, 매국의 상급(賞給)이었다. 그가 이를 단호히 거부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1911년 5월 논설 ‘은수변파록(恩讐辨破錄, 은혜와 원수를 분별하여 부숨)’을 써서 은사금 받기를 거부하면서 일제를 규탄하고 국민의 각성을 촉구했다.

“대저 은혜와 원수는 마치 백과 흑 같아서 변별할 필요 없이 일목요연한 것이다. 아! 섬나라 오랑캐가 세력을 얻어 우리나라를 빼앗고 우리 임금을 쫓아내고 우리 생민을 도탄에 빠트리니 이는 나의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저들은 도리어 재물로 우리 늙은이들을 유혹하여 은사금이라고 하니, 이 어찌 흑을 가리켜 백이라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간교한 꾀로 함정을 삼고 재물과 이익으로 미끼를 삼는 데 불과하니, 조선 사람을 함정에 몰아넣고 말 것이다.

(……) 차라리 원수의 칼에 죽을지언정 원수의 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을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무릇 우리 조선인은 이를 보고 경계하고 삼갈지어다.”

1911년에 인동군이 관내 면서기의 급료를 충당하려 면마다 부담금을 할당하자, 북삼면장도 각호당 21전 8리의 부담금을 매겨 이를 징수하려고 했다. 유병헌은 이를 비판하면서 네 차례에 걸쳐 이 명령에 불응하라는 내용의, ‘광고’·’민폐 혁파의 건’·’각 마을 모든 이에게 게시한다’·’널리 천하에 고(告)하는 문(文)’ 등의 격문을 썼다. 그는 세 차례는 이를 약목면 헌병파견소 게시판에 게재하였고, 마지막 1부는 지니고 있다가 일본 헌병에게 압수당했다.

바위에 새긴 회한과 우국충정

이 일로 유병헌은 1911년 12월, ‘불온 언론 유포’라는,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개월 형을 선고받아 첫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듬해 2월 초하루, 그는 숭오리의 금오산 아래 선봉사(僊鳳寺) 대각국사비로 가는 길가 바위에 “덧없이 변하는 세태에 울면서[읍창상(泣滄桑)] / 이 산에 들어오게 되었노라.[입차산(入此山)]”라는 글씨를 새겼다.

▲ 생가 근처에 있는 ‘통곡 바위’에 만송이 새긴 두 줄의 글귀.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 우리 임금을 잊지 못하노라.” ⓒ 장호철

첫 옥고를 치른 뒤에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현실에 대한 회한을 가누지 못했던가. 그는 같은 해 7월 25일에도 생가 근처에 있는 강릉 유씨 중시조 유창(劉敞)의 영정각 있던 자리 뒤의 ‘통곡 바위’에 두 줄의 글귀를 새겼다. 그가 바위에 글을 새긴 것은 그 자신의 진정을 스스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북망통곡(北望痛哭)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니 / 오왕불망(吾王不忘) 우리 임금을 잊지 못하노라.”

유병헌은 1912년,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세원 확보와 토지 수탈 목적과 식민지적 토지제도를 확립하고자 시행한 토지조사 사업(1910~1918)에 따른 측량을 원천 거부했다. 그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논밭마다 꽂아둔 측량 푯말을 죄다 뽑아버린 것이다.

그는 창덕궁에 세금을 내겠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에 납세를 거부함으로써 일제의 통치를 전면 부정한 것이었다. 유병헌은 약목과 김천의 헌병대, 김천경찰서 등에 불려가 조사를 받고 대구 감옥에 갇혔다. 그해 12월 유병헌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토지조사법 위반, 토지측량 총규칙 위반 혐의로 금고 5개월 형을 선고받고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1914년에 총독의 명령으로 문안드리려 한다며 총독부 수석 서기 야마카게(山陰)가 찾아왔다. 야마카게는 그를 회유하고자 “봄바람 봄비(춘풍춘우 春風春雨)가 꽃을 잘 피우게 하지만, 잘 떨어지게도 한다, 어제 친구가 오늘 원수가 되니 인간 만사가 다 꽃과 같다”라는 내용의 시를 쓰자, 유병헌도 시로 응답했다. 

“하죽하송수세태(夏竹夏松隨世態) 여름 대나무 여름 소나무 세태를 따르는 듯하나 / 동송동죽유수여(冬松冬竹有誰如) 겨울 대나무 겨울 소나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 청천지유조선일(靑天只有朝鮮日) 푸른 하늘에 오직 조선 태양만이 있을 뿐이니 / 창해추성필부지(滄海椎聲必不遲) 창해 역사의 철퇴 소리 머지않아 있으리.”

1915년에는 그의 명성을 듣고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기려수필(騎驢隨筆)>의 저자 송상도, 만해 한용운 등 숱한 지사들이 그를 찾아와 시국을 논했다. 일제는 독립운동 단체와 무관하게 홀로 저항을 이어온 그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18년 2월, 칠곡군청에서는 유병헌이 양조 면허 없이 밀주를 빚은 사실을 알아내고 가택을 수색하여 막걸리 4되를 압수하였다. 이에 분개한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칠곡군수와 약목면 헌병대 등에 자신의 의지와 일본 패망을 예언하는 글을 보냈다. 

 “우리 조선에서 태어나서 우리 황제를 배반하고 일본을 따른 군수와 같은 자는 개와 말만도 못한 자이다. 세금은 우리 황제에게 내야 한다. 죽어도 적국에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보다 일본의 법률을 따를 것이 아니다. ” – 칠곡 군수에게 부치는 첫 번째 글(1918.2.7.)

“우리 국가를 망하게 한 놈은 왜놈이고 이 보복의 생각은 한시라도 잊은 적 없다. 그리고 나 스스로 술을 만들고 나 스스로 마시는데 감히 일본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 – 칠곡 군수에게 부치는 두 번째 글(1918.2.7.) 

1918년 3월, 유병헌은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과 주세령 위반 혐의로 징역 1년과 벌금 20원을 선고받았고 공소(항소)했다. 당시 법정에서 그는 “지세(地稅)도 안 내는데 주세(酒稅)를 내겠느냐. 너희 일왕(천황)의 머리를 베어 그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지 못한 게 한이다”라고 일갈하여 파란을 일으켰다.  

“지세도 안 내는데 주세를 내겠느냐”  

4월에 대구 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에 대해 원심판결이 취소되어 금고 6개월로 감형되었으나, 그의 결기는 여전했다. 감옥에서도 항거를 멈추지 않아,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다 감옥에 갇혔으니 ‘조선독립 만세’라도 크게 부르자고 제의하여 조선독립 만세 소리가 매일 철창을 뚫고 복도에 울려 퍼지게 했다. 유병헌의 옥중 충절은 경상도는 물론 충청도까지 퍼져나가 인동, 영덕, 경주, 울산, 청산 등지에 그의 행적을 기리는 목비(木碑)가 세워졌다고 한다.

숭오리 산 34번지의 만송 묘소. 길라잡이 없이 한 시간 넘게 산등성이를 헤맨 끝에 찾았다. 기일이 가까워지는데, 봉분엔 아까시가 자라고 군데군데 꺼졌다. ⓒ 장호철

어느 날, 그는 아들 홍열(洪烈)을 불러 “7월 20일(음력) 아침에 옥문 앞에 와서 시신을 거두어 가라”라고 일렀다. 을사늑약 이후, 한결같은 결기로 일제에 저항해 온 십몇 년의 투쟁을 돌아본 뒤, 절명시에서 밝혔듯 “나라 운수 끝내 회복되기 어려우니 / 감옥에서 죽는 것 달갑기만 하다”라며 그는 마침내 자진할 것을 결심한 것이었다.

세 번째 투옥되어 복역한 지 일곱 달,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곡기를 끊은 지 여드레 만에 만송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마감했다. 가족들이 시신을 받아 여관에서 염습할 때, 옷에서 나온 ‘절명시’에서도 “차라리 끓는 물 속 괭이처럼 죽을지언정 / 개 염소 같은 왜놈 신하 될 수는 없다”라는 결기의 서슬이 푸르렀다.

대구 감옥에서 북삼까지 백여 리를 운구하는데, 삼남의 유림과 선비들이 길게 줄을 지어 애도하였고, 마을 들판에 조문객이 구름처럼 하얗게 모여들어 일경이 민란을 염려할 정도였다고 한다. 만송 유병헌은, 비록 포의의 선비였으나 망국을 부끄러워하며 경술년에 자진한 매천 황현(1855~1910)을 뒤따랐으니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다.

을사늑약 전후부터 경술국치, 삼일운동에 이르기까지 자정(自靖) 순국한 지사는 모두 61분에 이른다. 그중 경상도 출신은 18분인데, 칠곡 인근에서는 유병헌 외에 성주의 장기석(1990 애국장), 군위의 박능일(1990 애족장) 두 분이 있다.

▲ 순국선열 일람표. 칠곡 근처엔 유병헌 선생 말고도 성주의 장기석, 군위의 박능일 선생이 자정 순국했다. ⓒ 유교넷 홈페이지

장기석(1860~1911)은 일왕의 천장절(일왕 생일) 경축식 참석을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구인하려 하자 일경을 목침으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대구 감옥에 갇혔다가 옥중 단식으로 순국했다. 박능일(1859~1917)은 경술국치 이후 민적법에 따른 신분등록을 거부하고 예안과 풍기 등지를 전전하다가 “원수를 섬기고 사는 것은 바다에 빠져 죽는 이만 못하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영일 앞바다에 투신 순국했다.

유병헌의 생가에서 7Km 거리인 북삼면 오태동(현재는 구미시 오태동)에 악덕 친일 부호로 경상북도 관찰사를 지낸, 제3대 국무총리 장택상의 부친 장승원(1852~1917)이 살았다. 1904년 왕산 허위(1962 대한민국장)의 추천으로 경상북도 관찰사로 나아간 장승원은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1907)에 군자금을 대기로 허위에게 약속하였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 악덕 친일 부호로 광복회원에게 처단된 장승원의 생가. 아들인 국무총리 장택상의 의 호를 따 ‘창랑고택’이라 불리나, 주인이 바뀌면서 원형을 거의 잃었다. ⓒ 장호철

1912년 왕산의 형 허겸(1991 애국장)이 거듭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장승원이 오히려 이를 밀고하는 바람에 허겸은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1908년 처형된 스승 허위의 시신을 수습한바 있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1963 독립장)이 다시 군자금을 요구하자, 장승원은 이조차 거부하고 일제에 밀고하려고 했다. 이에 결국 장승원은 1917년 11월 광복회원 채기중(1963 독립장)과 강필순에게 처단되었다.

그가 간 ‘순국’의 길, 장승원의 ‘매국’의 길

장기석, 박능일 선생은 모두 17, 8년 연하인데도 오히려 만송에 앞서 순국의 길을 갔다. 비록 교유에 이르진 못하였을지라도 선생은 이들 행적을 전해 듣고 있었으리라. 벼슬이 경상북도 관찰사에 이어 궁내부 특진관에 이르렀던 영남의 만석꾼 장승원도 만송보다 10년 아래다. 넘치는 부와 영화를 누렸지만, 그보다 한 해 앞서 비명에 갔고, 반민족행위자로 부끄러운 이름을 <친일인명사전>에 올렸다. 자진에 앞서 선생은 이들의 엇갈린 운명을 돌아보진 않았을까.

1990년에 정부는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를 기리고자 후손들이 1963년 숭오리 옛 집터에 재실 ‘숭의재(崇義齋)’를 세웠다. 같은 해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 세운 ‘만송 유 선생 순국기념비’는 2015년 칠곡군 왜관읍 애국 동산으로 옮겨졌다.

▲ 1963년 칠곡군 약목면 복성리 선암봉 아래 세웠다가 2015년 칠곡군 왜관읍 애국 동산으로 옮겨진 ‘만송 유 선생 순국기념비’. ⓒ 장호철
▲ 만송을 기리고자 후손들이 1963년 숭오리 옛 집터에 세운 재실 ‘숭의재(崇義齋)’. 집안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퇴락하여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 장호철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광복 전에 피살, 옥사, 처형 등으로 목숨을 바친 분들을 ‘순국선열’이라 이른다. 지금 서대문독립공원 독립관 현충사에는 만송을 비롯하여 모두 이천팔백서른다섯(2835위)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들 위국 충정의 결과가 오늘날 조국이라는 수사는 진부할지언정 옷깃을 여미며 곱씹어야 할 역사적 진실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경술년으로부터 110년째 맞는 8월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실립니다.

<2020-08-2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일왕 머리를 베었어야” 법정서 일갈한 선비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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