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110년,…아직도 끝나지 않은…친일의 역사
日, 한일병합 토대 육군무관학교 폐교 계획…마지막 생도들 일본육군 중앙유년학교 편입
A급 전범 홍사익 등 대부분 친일의 길 걸어, 잊지 말아야 할 1910년 8월29일 경술국치일
나라잃은 가슴 아픈 날, 국민들 무관심 여전…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 관련된 줄소송 대기
중국은 매년 국치일 9월18일 경적 울려 상기, 역사박물관 등 통해 아픈과거 기억하려 노력
■기억과 기념투쟁
2017년 친일파 인명사전을 주도적으로 펴냈던 국내의 한 연구소에서 일제강점기 식민통치기구 사전을 출간하였다. 발간사에서 “기념해서는 안될 인물들을 기념하는 사회는 분명 정의롭지 못한 사회다. 기억투쟁은 곧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라고 하면서 이 사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차분하면서도 강한 어조로 정리했다. 이 사전에는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식민통치기관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수록됐다. 그 가운데 중추원 항목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바로 이완용을 비롯한 권중현,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등 을사오적과 박영효, 송병준 등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다. 일제가 한국인을 보다 용이하게 통치하기 위해 키워 낸 친일파는 곳곳에 포진돼 있었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친일파 육성책, 군인들
1894년 동학농민군을 상대로 잔학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기 한반도의 물자와 인적자원을 강탈하고 훼손했다. 1910년 8월22일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의 위법체결로 대한제국은 마침내 그해 8월29일 일제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했다. 이른바 ‘경술국치’로 불린 치욕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경술국치는 생소한 역사적인 사건이자 용어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비롯한 내정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1907년 8월1일에는 대한제국의 군대가 ‘공식적’으로 해산됐다. 여기저기서 대한제국 군인들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전개됐다. 참령 박승환의 자결도 이 때 일어났다. 일제는 1909년 9월 대한제국 군부의 숨통을 끊고 한일병합의 토대를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육군무관학교를 폐교하려 했다. 그 선행작업으로 마지막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을 일본으로 데려가려는 계획을 세웠다. 1909년 8월 2일 학교장 이희두가 “황제폐하가 군부를 폐지하고 무관학교를 폐교한다는 칙령을 내렸다”고 하면서 칙령을 봉독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의 종말이었다.
생도들은 통곡했다. 하지만 엄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총 45명의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에게 일본으로 갈 것을 명했으며, 이들 가운데 김영섭만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고 모든 검사에 불참했다. 총 44명의 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일본으로 가기 위해 지식과 신체검사를 비롯해 적성검사를 차례로 받고 두 명을 제외한 42명이 일본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게 됐다. 1909년 9월3일 생도들은 일본 육군유년학교 생도들과 같은 정복을 입고 대한제국 소속임을 표시하는 오얏꽃 모표와 분홍색 금장을 달고 현해탄을 오가는 배에 조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올랐다.
일본으로 가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의 성적순 제 1등은 유명한 소설가로 알려진 염상섭의 큰 형이었던 염창섭이었다. 물론 이들 가운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생도는 따로 있었다. 홍사익이었다. 그는 일본인들도 입학이 어렵다던 일본 육군사학관학교와 육군대학을 거쳐 일제 패망 시 일본군 중장에 오른 인물이었다. 조국을 외면했던 댓가로 그는 1946년에 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지만 일본 육사시절 그가 보여줬던 실력은 일본인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09년 9월7일부터 대한제국 생도들은 일본 육군사관학교의 예비학교인 육군중앙유년학교에서 ‘극일(克日)’한다는 자세로 한국학생반으로 편성돼 훈련받았다. 1910년 9월1일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생도들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충격을 받았다. 대한제국과 일본이 합병한 것이었다. 이른바 경술국치이다. 한일병합 제1조 ‘대한제국황제는 일본국천황에게 모든 권한을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양도한다’라고 돼 있듯이 이제 무관학교 생도들은 더 이상 대한제국의 상징인 오얏꽃 모표를 달수 없었으며, 한인학생반도 없어졌다.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던 지청천과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강렬하게 전개했던 김경천, 전범으로 처형된 일본군 중장 홍사익, 대한민국 초대 육군참모총장이 됐던 이응준은 요코하마에서 “독립투쟁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두 명만이 독립운동에 자신을 바친다. 아니 육군무관학교 마지막 생도들 가운데 대부분은 친일의 길을 걸었다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중국이 기억하는 그들의 국치일
오늘날 중국 대륙의 국치일은 9월18일이다. 1931년 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본격적으로 침략한 날이다. 중국은 이때부터 1945년까지를 항일전쟁기로 부른다. 선양시(沈陽市)에 세워진 918역사박물관에는 중국의 전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이 쓴 ‘물망국치(勿忘國恥)’가 선명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항일전쟁시기 3천500만명의 중국인이 다치거나 죽었다. 비단 사람만 희생됐을까. 그들의 문화, 영토, 풍속 등도 상당 부분 훼손됐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날을 국치일로 정한 것이다. 해마다 심양을 비롯한 중국 동북지방 대도시에서는 9월18일 오전 9시18분에 경적을 울려 이날이 국치일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과 중국에는 국치일이 모두 일본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중국은 용서는 하지만 절대 잊지는 말자고 강조한다. 왕징웨이(汪精衛)를 비롯한 한간(漢奸)에 대한 역사적 단죄, 만주국 황제였던 부의를 중생(重生)했던 무순전범관리소를 운영했던 중국인의 눈으로 보면 대한민국은 아직도 ‘친일’과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애써 우리의 현실은 중국과 다르다고 자위해 보지만 과연 우리의 자화상은 어떠한가.
‘경술국치’, 나이 든 세대에게는 익숙한 용어이다. 하지만 용어일 뿐이지 실생활에서 전혀 느낌을 주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청소년들에게는 잊혀진 세월이자 먼 옛이야기다. 기성세대는 한일관계를 의식해서 또는 과거이기 때문에 라고 얼버무리며 국치일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애써 봉합한다. 가슴 쓰린 현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깝고도 먼나라 일본에게 우리의 메시지는 정확하게 전달될 리가 없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만주는 한국독립운동의 안전판이자 한편으로는 일제와 결탁한 세력들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들은 어쩌면 일제의 감시와 탄압보다 밀정이나 친일파들의 눈초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 고난의 삶을 어떻게 편안한 우리가 복원할 수 있을까. 독립운동은 나를 버리는 길이다. 그것도 온전히. 안중근, 윤봉길 의사가 그러하듯, 나를 버리고 온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바로 독립운동의 소중한 자산이자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편안한 길은 어떠한가. 나를 버리기는 커녕, 세상의 악과 결탁해 나와 같은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한다. 친일의 길을 그래서 정의나 공의와는 동떨어진 삶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변명이든간에.
2007년 민간단체에서 친일인명사전이 나왔다. 그 뒤 정부차원에서 친일단체 및 인명을 정리하는 작업이 마무리됐다. 아직도 법원에서는 친일과 관련된 줄소송이 판사들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정리되지 않는 역사의 갈무리 작업은 그만큼 지난하다. 2020년 7월 11일 ‘대한민국 국군 영웅’ 백선엽 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대 만주국 조선인 특설부대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그가 해방과 한국전쟁 속에서 한국군의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어쩌면 한국군의 민낯 같다. 독립군과는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이 해방 이후 미군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영달을 꾀했다. 뿐만 아니라 ‘청빈한 삶’을 살았고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사실은 한 개인의 삶이 어떠하게 조명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척도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역린을 한번은 헤집어서 그 상처의 환부를 도려내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역사의 책무이다.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2020-09-27> 경기일보
☞기사원문: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청산되지 못한 아픈 과거 친일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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