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 작가가 그린 춘향 영정이 봉안된 지 60년 만에 철거됐습니다. 이달 초순까지만 해도 철거를 미루기로 하면서 남원시 안팎은 소란스러웠는데요. 광한루원 곳곳에 철거를 촉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의 현수막이 내걸렸고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가 잇따랐습니다. 철거냐 아니냐를 두고 오락가락하던 남원시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당연한 시대적 과업의 첫걸음을 내딛으면서도 끝까지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었습니다.
■ 천재 어진화사에서 친일 부역자로..’이당 김은호’
반세기 넘게 광한루원 춘향 사당에 봉안돼 있던 춘향 영정은 이당 김은호가 지난 1961년 그린 작품입니다. 원본은 남원 향토박물관에 보관되어있고, 복사본을 춘향 사당에 걸어두었는데요.
이당 김은호는 고종과 순종의 어진을 그린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로 잘 알려졌습니다. 조선 말부터 근현대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습니다. 일제에 국권이 침탈당하면서 잠시 독립운동을 했던 적도 있지만, 이내 변절했습니다.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옹호하고 전쟁 물자를 대기 위한 그림을 그려 총독부에 헌납하는 등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한 사실이 드러났는데요. 지난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가운데 미술분야에 이름을 올렸고, 지난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친일·반민족행위 705인에도 포함됐습니다.
■ 남원시, 8월 철거 돌연 연기..의회 때문?
춘향 영정교체를 주도하고 있는 남원정신연구원 강경식 대표는 지난 7월까지만 해도 남원시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을 철거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고 증언하는데요. 하지만 철거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급기야 철거 시점을 시민 여론조사를 거친 뒤로 미루겠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남원시가 의회에 업무보고를 했더니 더 다양한 시민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결정하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는 더는 수치스러운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며 들고 일어났습니다.
이미 지난 2005년, 이들은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춘향 영정 철거를 주도했지만, 남원시가 반대 여론이 적지 않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결국 흐지부지된 뼈아픈 경험을 했기 때문인데요.
남원지역 시민사회단체 요구로 지난 9월 7일, 남원시, 남원시의회 3자가 모인 자리가 마련됐습니다. 남원시의회는 남원시의회의 어떤 의원도 현재 춘향 영정 철거 반대하지 않았다며,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의견을 집행부에 전달했을 뿐이라고 장황한 해명만 늘어놓았습니다. 남원시의회 반대로 친일화가 춘향 영정 철거가 무산된 것처럼 비쳤다며 남원시장에 대한 불쾌감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간담회에 참석한 일부 남원시의원들과 춘향문화선양회 인사는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이 모두 옳은 것도 아니고, 남원 시민 전체의 의견도 아니라며, 여론 조사 이후로 철거를 연기하자는 뜻을 고수했습니다.
남원시는 춘향 영정을 철거한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낸 적이 없다며 의원님 눈치 보기에 급급했습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간담회는 서로의 입장 차만 확인하고 마무리됐는데요. 간담회를 지켜보면서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 이렇게 한 걸음 떼기가 어려운 일이었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007작전하듯 철거..그들은 왜 숨기려 했나?
춘향제 개막일이던 지난 9월 10일 오후 늦게, 남원시는 친일 청산을 위해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을 9월 안에 철거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춘향 영정을 새로 봉안하도록 하겠다는 한 장짜리 보도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보내왔는데요.
9월도 막바지에 이르는데 철거 소식이 들리지 않아 남원시에 문의해봤습니다. 담당자는 아직 철거일을 잡지 못했다는 답만 반복했습니다. 취재를 가려고 하니 철거일이 정해지면 알려달라는 요청에 “저희는 (춘향 영정이) 철거되는 모습이 보도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라는 답을 하던 담당 직원.
뭘 숨기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이유를 물으니 동문서답만 이어졌습니다.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을 내리는 모습을 반드시 보도해야겠다는 의지는 더 강해졌는데요. 물어물어 확인해보니 철거일은 바로 이튿날이었습니다. 철거 시간도 미정, 알려주겠다던 직원은 철거 20분 전에 통보…. 우여곡절 끝에 친일화가 김은호의 춘향 영정이 철거되는 순간을 영상에 담긴 했지만 지금도 언론을 대하는 공직자답지 못한 남원시 태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60년 동안 친일 잔재 방치…뉘우침 없어
이당 김은호의 춘향 영정 철거엔 고작 10분 남짓 걸렸습니다. 숱한 논란을 생각하면 허무할 정도였는데요.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업에 동참한다면서도 독립을 위해 순국한 선열의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는 시간도, 후손된 입장에서 친일부역행위자의 잔재를 서둘러 지워내지 못한 통렬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광복 75주년인 올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친일 흔적을 지우는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춘향 영정을 교체하는 작업도 그 하나였을 텐데요. 봉안된 지 햇수로는 60년, 지역 내에서 철거 논의가 시작된 지 15년 만에야 친일 화가의 춘향 영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림 한 폭 내리는 일이 왜 그리 더디고 힘들기만 했을까요? 제때 청산하지 못한 친일 잔재는 아직도 세월의 무관심과 친일파 후손들의 방해, 관광자원으로 쓰려는 지자체의 꼼수 속에 부끄러운 낯을 당당하게 들고 숨 쉬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는 친일 잔재 청산에 좌고우면하는 지자체는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이수진 기자 elpis1004@kbs.co.kr
<2020-10-05> KBS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