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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일보]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시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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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식 파괴하는 ‘식민 잔재’… 치욕의 ‘역사 청산’ 훼방
日, ‘을사오적’ 신변 보호에 만전… 형법 조문도 사라져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친일청산 대상 ‘반민족’에 국한
해방 후 일제강점기 유·무형 일제 잔재 허무는데 실패
친일 인맥, 각계 주류로 행세하며 과거 청산 저지·방해

■ 왜 일제 잔재 청산인가

현실정치에 몸담은 인사들은 ‘토착왜구’라는 비판에도 자신들 기득권을 지키는데 너무나 의연하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그런데 우리의 ‘일제 잔재’ 청산 논의는 흔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나치부역자를 처단한 사례와 비교한다. 나치에 의해 몇 해의 점령당한 프랑스는 부역자들 처단에 단호하고 철저했다. 우리는 몇 배나 긴 식민지배를 당하고 “왜 이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냐”고 개탄하기 급급하다. 식민지배가 길어질수록 부역자는 이에 비례하여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저들을 처단하고 청산하는 작업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1940년 당시 프랑스는 국민국가가 확립된 지 오래된 상태였다. 적국과 협력하는 반국가행위에 대한 형법상의 엄격한 처벌조항은 이미 완비하였다. 반면에 을사늑약 당시 대한제국은 근대적인 국민국가가 아니었다. 황제를 배반한 대신과 지도급 인사들은 ‘역적’으로 비판을 받았을 뿐이다. 이른바 ‘을사오적’에 대한 처벌은 의열투쟁 일환으로 암살시도가 전부였다. 통감부 설치 이래 일제는 이들 신변 보호에 만전을 기울이는 가운데 처벌할 형법 조문은 깡그리 사라졌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친일청산이 ‘반국가’ 아닌 ‘반민족’ 행위를 대상으로 삼은 이유도 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으리라.

■ 남북분단과 6·25전쟁은 일제 잔재의 가장 커다란 생채기이다

해방 이후 독립국가건설론은 이념적인 대립과 미국과 소련이라는 외세에 의하여 한민족이 바라는 방향으로 진전되지 않았다. 이념적인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다수의 힘’에 의하여 역사무대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강화된 냉전체제는 결국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분단국가 수립하고 말았다. 이념적인 격화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6·25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소련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북한은 새벽에 남침을 개시하여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단숨에 점령하였다. 국군은 병력과 열악한 무기 등으로 한 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밀려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 미국 주도로 개최된 유엔 안전보상이사회는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다.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하여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군이 개입하여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는 순간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인명은 약 450만 명, 남한의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는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초래하였다. 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은 인적·물적 손실과 더불어 불신감을 증폭시켜 적대감을 고조시켰다. 전쟁이 발발한 지 70년 지난 한반도는 영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 상태에 있다. 상호 신뢰에 의한 평화공존론 모색에 힘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된다.

■ 10월 유신은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이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적·물적 토대를 허무는데 실패했다. 반민족적·반민주적 지배구조나 의식은 온전히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친일 인맥은 각계에서 주류로 행세하면서 과거 청산을 저지하는 방해꾼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노예교육과 우민화 정책으로 한국인에게 노예의식과 패배주의를 만연시켰다. 민족자존의 의식이나 의지는 원천 봉쇄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폭압적인 관료제와 권위주의적인 법령체계로 헌병과 경찰 등은 한국인들에게 오직 순응과 복종만을 강요했다. 일제 잔재 중 가장 구조적이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큰 분야는 바로 법과 제도 의식 등이었다. 유신체제는 사상과 양심, 신체의 자유를 유린하는 가운데 획일적이고 억압적으로 사회를 통제하였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 시행된 각종의 국가주의적 시책은 식민지배정책을 답습한 결과였다. ‘황국신민의 서사’와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한 반상회나 치안유지에 관한 여러 법령 등은 이를 방증한다. 10월 유신은 식민지 지배구조의 재현이자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였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미명하에.

■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는 가치기준이다

강제병합 110주년과 광복 75주년을 맞는 올해는 우리 근현대사를 성찰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야만적인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일본은 잘못된 과거사에 대한 반성보다 오히려 정당화에 급급하다. 양심적인 세계인들이 공분하는 현실에도 전혀 반성하려는 기미조차 찾을 수 없다. 급속히 우경화하는 현실은

결코 간과해서 안 된다. 일제 잔재는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남아 고착되는 경향마저 보인다. 나아가 민족의 의식세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등 우려를 자아낸다.

우리 사회에는 유·무형의 식민잔재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는 언어·문화·교육·생활 등 일상사 전반에 걸쳐 민족의 의식세계까지 지배한다. 일제가 식민지배하면서 남겨놓은 부정적 유산을 너무 흔히 볼 수 있다. 의식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가운데 일상사에 언저리에 잔존하는 현실이다. 황국신민서사탑·관청건물 등과 같은 건축조형물 형태인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무형의 형태이다.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으로 문화관광부는 ‘일제문화잔재 지도 만들기’를 추진했다. 이는 식민지배 가해자인 일본의 위정자와 극우세력에 의해 역사 왜곡과 우경화가 노골화하는 상황에 대한 자구책 일환이었다. 우리 내부 자성에 의한 ‘자아 찾기’라는 사실에서 크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해방 75년 동안 우리는 이를 청산·극복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대통령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런데 ‘보수정권’ 출현으로 중단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일시적인 활동으로 과거 인적 청산을 위한 자료 수집에도 힘겨운 기간이었다. 사단법인 민족문제연구소는 정부가 하지 못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하여 연구자는 물론 사회운동가 등에게 잘못된 인물 평가를 되새기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이리하여 국가기관과 민간단체의 긴밀한 협조도 물론 정부를 비롯한 범시민적인 뒷받침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을 각인시켰다.

▲ 1995년 3월1일 문민정부가 옛 조선총독부건물 철거 선포 이후, 같은 해 8월15일 청사 중앙 돔의 첨탑(노란색 원)을 시작으로 다음해에 철거작업을 완료했다. 당시 철거된 조선총독부 중앙 첨탑은 현재 천안시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 올바른 정신적인 가치기준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가 중요하게 인식하는 분위기이다. 과거는 주목되지 않는 하찮은 것이나 현실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굴절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와 미래는 일상사와 관련하여 분명 중요하다. 올바른 현실 인식과 활동은 과거 잘못된 원인부터 밝혀내고 고쳐나가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특히 과거의 것들이 고쳐지지 않고 현실에 남아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왜색은 시대와 상관없이 일본의 영향이 짙게 밴 문화 경향을 뜻한다. 저급하고 천박한 일본의 문화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임에 분명하다. 명백히 일제 잔재와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일제 잔재는 식민지시기에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의도로 벌인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식민지배구조의 유제라는 측면에서 엄연히 왜색문화와 차별성을 지닌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고 영속화시키기 위해 한민족 삶의 깊숙한 지배논리를 강요하고 합리화했다. 일본과 한국은 ‘과거청산’이라는 관점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다. 일본은 종전 이후 군국주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한 반면 한국은 친일세력을 청산하지 못했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나 의식과 생활적인 면에서는 한창 거리가 있다. 광적인 ‘집단주의’는 이웃 국가에 대한 비수로 성큼 다가온다. 한국은 민주화의 역동성에서는 일본보다 앞서고 있으나 ‘내부 분열’이 심각하다.

일제 잔재 청산은 올바른 정신적인 가치기준을 세우는 지름길이다. 이미 친일세력은 대부분 죽었으며 법적인 책임도 소멸된 상태이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올바른 진상규명을 통해 학문적·역사적인 과거 청산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향한 힘찬 진군에 동참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남북통일을 향한 지렛대로 삼자

한국사회 발전상을 흔히들 ‘한강의 기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현실은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에 충분조건이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진전된 정치·사회적인 민주화와 지방자치제, 한국문화의 세계화 등은 한국인의 저력과 위상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이와 과정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순탄하게 진전되지 않았다. 많은 진통과 갈등이 수반되었으나 좌절하지 않고 묵묵하게 ‘자기역할’에 충실하였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든든한 에너지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지 훌쩍 75년이나 지났다. 거족적인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1년을 맞았다. 그때 함성이 우리 귀에 메아리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가슴이 뭉클하다. 그런데 외형과 달리 이면에는 잘못된 과거사 생채기도 주변을 기웃거린다. 바로 식민지배가 남긴 일제 잔재는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장애물로 공존하는 현실이다. 이 중에서 가장 가슴 쓰린 현실은 남과 북으로 갈라진 분단국가라는 엄연한 사실에 누구나 공감하는 공통분모이다. 평화로운 남북통일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연유한다.

김형목 사단법인 선인역사문화연구소 연구이사

<2020-11-08> 경기일보 

☞기사원문: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자]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시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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