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대정 원년(1912년) 10월 4일 동광원(東光園)에서 발행한 <일본역사사진첩>이다. 연구소 소장본은 한 차례 증보를 거쳐 대정 2년(1913년) 6월 8일에 발행한 정가 6원의 제3판본이다. 불과 10개월 만에 세 번째 인쇄를 한 것으로 보아 판매량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진첩>은 총 284쪽에 걸쳐 근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전후부터 1912년까지 일본 역사의 여러 사진 자료를 보여준다. 일본의 근대화 과정 속에 일어난 사건, ‘천황’과 가문의 인물들, 정치·군사 분야의 주요 인물, 일본과 밀접한 관계인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요인물 사진 등이 실려 있다. 특히 일본의 팽창을 보여주는 침략전쟁의 현장 등이 사진으로 게재되어 있는데 주요 사진들은 일본 근대사에서 ‘자랑스러운 승리의 역사’로 기록하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관련된 이미지이다.
일본 근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대한제국과의 관계인데 <사진첩>에서도 ‘강제병합’까지의 과정을 사진으로 간략하게 보여준다. 이토 히로부미와 순종의 서북순행, 요시히토 황태자의 한국방문, 조선민중에게 주어진 태형(笞刑)의 모습 등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조선의 모습이다.
<사진첩> 본문 160쪽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게재되어 있는데 이는 1906년 12월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이 특파대사로 도쿄에 갔을 때에 이토 히로부미 내외에게 한복을 지어 선물로 건네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것이었다. (민족사랑 2017년 10월호 참조) 무엇보다 눈에 띄는 사진은 본문 162쪽에 등장하는 사진들이다. 훈장을 패용한 예복을 입은 이토 히로부미, 이토가 하얼빈역에 내리기 전에 병사들이 플랫폼에 도열해 있는 모습, 저격 당하기 1분 전에 기차에서 내려 모자를 벗는 이토 히로부미, 포승줄에 묶인 안중근 의사, 의거에 사용되었던 권총과 탄환 등이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1909년 7월, 일본 내각회의에서 「한국병합에 관한 방침」이 통과되었고 절차상 남은 것은 병합시기와 국제사회의 양해뿐이었다.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와 조선 문제에 관해 러시아와 협상하기 위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그 순간 이토를 죽음에 이르게 한 총성 뒤에 “한국, 만세”라는 외침이 있었다. 이토는 1905년 ‘천황’의 특명전권대사로서 ‘을사조약’을 강요해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았으며,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내던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킨 주권침탈의 주범이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암살한 15가지 이유를 말하며,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그해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안중근은 한국인에게 침략의 원흉을 총살한 영웅이지만, <사진첩>에서 보듯이 일본인에게는 근대화의 원훈(元勳)을 암살한 ‘흉행자(兇行者) 안중근’으로 각인되었다. <사진첩>의 마지막에는 14쪽에 걸쳐 ‘일본역사사진첩 대조일반(對照一斑)’이라는 56개의 항목이 적혀 있다. <사진첩>에 수록된 사진과 연관된 역사를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53번째 항목인 ‘한국병합’에서는 강제로 맺은 ‘병합’을 ‘전례가 없는 위대한 업적(曠古の偉業)’ 으로 조선민중은 영원히 ‘천황의 은혜(聖澤)’를 받는 경사스러운 사건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식민지 조선’으로 전락하여 사라지고 ‘일본역사사진첩’에 박제되고 말았다.
• 강동민 자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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