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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친일반민족행위 규명과 친일재산 환수, 법을 통한 과거청산 한계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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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법제화와 법을 통한 친일청산

민족문제연구소가 많은 어려움을 딛고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그해 11월8일 국민보고대회를 열었다. 대회 참석자들이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로 향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토지부 등재를 ‘사정 추정’ 판결
등기명의자인 국가 물리치고
친일 후손이 토지 찾는 일 빈번
‘친일재산 포함이 타당’ 반론도

외국의 통치를 경험한 민족이 해방되었을 때 많건 적건 외세에 부역한 사람들을 단죄하려고 한다. 청산의 폭과 성격은 기억을 동원하는 양상과 방식에 좌우되는데 기억의 동원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세계체계에서 그 민족이 차지하는 지위 그리고 외세와 그 민족의 국제정치적 관계 등 거시적 조건이 과거청산을 둘러싼 정치적 여건과 함께 기억의 내용과 강도를 결정하는 데 크게 작용한다. 과거청산에는 민중의 일상적 기억이 중요하지만 정치적 지도세력의 기억, 그에 의해 정치공동체가 공식적으로 취하는 역사에 대한 정의가 결정적이다.

한국은 국제평화레짐이 형성되어간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주권국가로 인정되어 근대 국제법질서에 참여했다. 따라서 항일운동은 주권회복을 표방했고, 외세에 불법점탈된 영토를 회복한 주권국가의 부역자 처벌과 유사한 논리로 인적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동력을 생산해냈다. “친일”은 의연히 존재하는 국가에 대한 반역이며, 근대화에 기여했음을 내세워 반역을 정당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외세의 지배가 3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계속됐고 상당한 동화가 진행됐다는 현실이 있었다. 반역을 단죄하려 할 때 단죄의 근거가 되는 과거의 유효한 법질서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한 사정은 반역에 대한 처벌에 저항하는 힘과 논리를 만들어냈다. 반제국주의적 성찰성을 결여한 또 다른 외세의 개입, 분단, 공산체제와의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인적 청산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프랑스처럼 부역자를 숙청하는 법과 재판소를 만들어 운영한 나라를 보고 그 나라의 엄정한 기강을 칭찬하곤 한다. 그러나 국가에 의한 숙청은 민간에서 벌어지는 초법적 징벌을 종식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제도화된 숙청은 제도화되지 않은 폭력에 재촉되는 한편 그것을 다스리기 위해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미군정의 철저한 폭력관리로 인해 초법적 징벌이 어려웠기 때문에 반민족행위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재촉하는 동력이 제한되었다. 1947년 조선과도입법의원의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가 좌초되고 1949년 제헌의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무력화된 것은 반공을 구실로 한 조직적 방해를 넘어설 만큼 민간의 보복 동력이 크지 못했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일제의 폭력기구에 종사하면서 탄압의 기법을 체득한 공안세력에 의해 공산폭도로 몰리기 십상인 상황에서 불만을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응보를 위한 민간의 열기에 뒷받침되지 못한 채 단 한 명도 단죄하지 못하고 종료된 반민특위의 경험은 대한민국을 만성적인 정당성 결핍에 빠지게 했다. 반공과 경제성장의 이데올로기가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동원되었지만 경제성장이 민주화를 가져오고 그에 따라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게 되자 오히려 과거청산의 요구가 더욱 강렬히 분출되었다.

역사기억은 구조적 동력에 의해 자동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활동가”들의 실천을 통해 동원된다. 권위주의시대, 재야에서 널리 읽힌 <친일문학론>의 저자 임종국의 유지를 이어 1991년 반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하면서 “친일과거청산”은 시민운동으로 발전했다. 기억을 동원하는 행위는 계보를 달리하는 사건들에 매개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어간다. 그 과정에서 역설적 상황도 발생한다. 지방자치의 발전은 친일행위자를 기념하는 행사들 또한 활성화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친일과거를 공론화했고, 기념대상자의 행적조사가 민족문제연구소의 기능을 강화해주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축적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2003년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하고자 했는데 예산 지원을 당시 한나라당이 거부하자 대중의 비난이 일었다. 이것이 이미 발의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연료를 제공했다. 이 법안을 발의한 154인의 국회의원 중 49인이 한나라당 소속이었음에서 보듯이 친일과거청산의 명분은 거역할 수 없었다. 이 법안은 2004년 3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외세 지배 길어져 상당한 동화
반역 단죄 유효한 법질서 부재
‘반민족행위처벌법’도 무력화
“대한제국 형법대전 있었는데…”

기억활동가 덕분 시민운동 번져
반민족행위규명법 등 제정돼
친일행위자 기념 행사 활성화
되레 친일과거 공론화 불붙여

반민족행위규명법은 18개의 “친일반민족행위” 유형을 열거하고 위원회를 설치해 조사대상자를 선정해 조사한 후 그 결과를 공표하도록 했다. 2004년 말 법률이 개정되어 행위 유형이 20개로 늘어났으나, 일본 귀족원 또는 중의원 의원 및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 외에는 직책을 중심으로 행위를 규정하지 않았으며 “탄압에 앞장선” “집행을 주도한”과 같은 용어로 행위 요건을 강화했다.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5년 5월부터 4년반 동안 가동하여 1006명에 대해 반민족행위 결정을 내렸다.

반민족행위규명법과 자매관계에 있는 법률이 2005년 12월 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다. 사실 친일재산귀속법은 다른 배경에서, 더 일찍 논의되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친일파”의 땅 찾기가 발단이었다. 법원은 원래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사정(査定)을 받은 토지는 그 사실을 입증하면 등기명의와 무관하게 소유권을 인정했는데, 1986년 대법원은 토지조사부에 등재되었다면 사정이 추정된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친일파”의 후손이 등기명의자인 국가를 물리치고 토지를 찾는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 1995년부터는 지적전산화에 힘입어 행정자치부와 지자체가 “조상 땅 찾기”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그런 일이 더욱 쉬워졌다. “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1990년대 전반기에 대두한 것은 이를 배경으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재산귀속법은 친일파의 공격적 땅 찾기에 대항하는 방어적 성격을 갖는다는 평가도 있다.

이 법률은 반민족행위규명법이 열거하는 행위 가운데 정도가 중한 것을 추출해 그것을 범한 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의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러일전쟁 개전 시부터 1945년 8월15일까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한 대가로 취득하거나 이를 상속받은 재산 또는 친일재산임을 알면서 유증·증여를 받은 재산”을 취득의 원인행위 때로 소급하여 국가에 귀속하도록 했다. 이 기간에 취득한 재산을 “친일행위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으로 추정”했기에 귀속결정은 비교적 용이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4년간 활동해 168명이 남긴 2359필지(1113만9645㎡, 시가 2107억원 상당)의 국가귀속을 결정했다.

반민족행위 결정과 친일재산의 국가귀속은 많은 쟁송을 야기했다. 결정을 취소하라는 행정소송과 국가귀속에 대항해 소유권이전등기말소소송이 제기되었고, 반대로 친일재산에 대한 소유권이전등기 또는 제3자에게 매각한 경우 매매대금의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하는 국가의 소송도 있었다. 반민족행위규명법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받은 행위를 규정했는데, 한일합병의 공으로 수작(受爵)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면서 처분의 취소를 구하는 소송이 성공을 거두자 2011년 국회가 법을 개정해 한일합병의 공과 무관하게 작위를 받은 것 자체를 반민족행위로 규정한 것도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확정판결이 있는 경우 새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개정법률 부칙은 “한일합병의 공”으로 수작한 것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은 사람의 재산을 국가귀속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소유권이전등기를 청구한 국가가 하급심에서 패소해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사건도 있다. 이 사건 항소심에서는 광복회가 보조참가를 시도해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쟁송에서 사법부는 반민족행위 결정 및 재산귀속을 옹호했다. 헌법재판소도 개정 전후에 걸쳐 두 법률의 합헌성을 확인했다. 헌재는 사자(死者)와 유족의 인격권 침해가 과잉금지에 해당하지 않고, 소급입법에 의한 재산환수도 헌법이 표현하는 역사적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예상할 수 있었으며 달성되는 공익이 중대하므로 허용된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반론도 적지 않다. 토지조사사업에 따라 사정을 받은 토지를 친일재산에 포함시키는 것의 타당성은 한말·일제하 토지소유에 대한 역사 연구에 비추어 검토해봄직하다.

한 헌법재판관의 의견은 다수의견은 아니지만 친일청산을 위한 역사적 기억과 그것을 법제화할 때의 난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친일반민족행위를 대한제국기의 형법대전(刑法大全)이 처벌한 반역 행위로 규정하고, 반역의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환수하는 것의 정당성을 그로부터 찾았다. 동시에 일제에 의해 토지·임야사정부가 작성되기 이전에는 토지소유권에 대한 대세적 공시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달리 증명할 방법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사정을 친일재산임이 추정되는 재산 취득에 포함시킨다면 위헌이 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해방 후 60년 넘게 지나 법을 통해 과거를 청산하려는 시도는 친일에 대한 역사적 기억과 일제 지배의 결과를 수용해야만 하는 현실 및 그에 터 잡아 쌓인 법원의 기관기억(institutional memory) 사이의 모순을 노출한다.

이철우 |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0-11-24> 경향신문

☞기사원문: [기억전쟁, 미래가 된 과거](24)친일반민족행위 규명과 친일재산 환수, 법을 통한 과거청산 한계 드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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