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랑

심판받을 김창룡 중장의 송공비(頌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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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소개]

심판받을 김창룡 중장의 송공비(頌功碑)

신현복(申玄福)

 

이번 호에 소개하는 자료는 <실화(實話)> 1960년 12월호에 실린 「심판받을 김창룡 중장의 송공비」라는 기사이다. 일본군 헌병오장으로 소만국경지대에서 첩보활동에 종사했던 김창룡은 해방 후 남한으로 탈출해 국방경비대 정보장교로 두각을 나타냈고 이승만 정부 시절 ‘숙군과 타공’ 공작으로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던 중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과거 부하였던 육군대령 허태영의 지시를 받은 특무부대 출신자들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일 육군중장으로 추서되고 2월 3일 최초의 국군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진 뒤 안양의 사설 묘역에 묻혔다. 묘비 앞면의 묘주명(墓主名)은 이승만 대통령이 썼으며, 묘갈명(墓碣銘)은 사학자 이병도가 지었다. 이 글은 4월혁명 이후 쓰여진 것이라 이승만의 실정(失政)과 특무대장 김창룡의 악행을 언급하며 이들에 대한 역사상의 평가를 다시 내릴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김창룡의 묘갈명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사실은 김창룡 본인과 묘갈명을 지은 이병도, 묘지 조성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있던 정일권이 모두 친일파로 선정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는 점이다. 이 자료는 이순우 책임연구원이 제보해주었다. ― 편집자

 

역사의 심판은 내려지고 만다
“그 사람의 진가는 관뚜껑에 못을 박고 난 후라야 안다.”라는 말이 있지만 사실 관뚜껑에 못을 박고 난 뒤에도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흘러야만 비로소 인간의 공죄(功罪)가 밝혀지고 따라서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지는 모양이다. 이게 말하자면 역사의 심판이라는 것인가 보다. 과거에도 그랬었지만 우리들은 지금 숱한 사람들이 이 역사의 심판대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4월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전환은 필연적으로 허다한 역사의 수정을 가져왔고 이 역사의 수정은 지금도 또는 앞으로라도 계속될 것이다. 성공하면 임금이 되고 실패하면 역적이 된다(成則君王 敗則逆賊)던 옛 봉건주의적 정권쟁
탈전은 결국 ‘힘은 정의’라는 인식에 의해 지배되었고 역사의 수정도 이 힘으로 가능했었다. 그래서 진정한 역사적 심판은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후를 기다려서야만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좀 다르다. 보다 높은 비판의식은 심판의 규준을 보다 정확하게 그리고 빠르게 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우리들은 4·19 전에 이승만 씨를 두고 국부(國父)의 일컬음을 공공연히 올리는 축을 보았고 그를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에 견주어 추켜세우는 소리를 들었다. 허나 곡학아세(曲學阿世)의 무리들이 그 숫자로 봐서는 대단치 않으면서도 그 소리가 하도 높고 크기 때문에 다른 한쪽에 결연히 이 무리들을 비웃는 축이 있다는 걸 하마터면 놓칠 뻔 했던 것이다. 따라서 힘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무모하다는 걸 4월혁명 이후에 와서야 깨달은 사람이 적지 않다. 국부 이승만이 하루아침에 음흉한 독재자의 본탈을 내밀었고, 그를 위해 무수한 아첨이 집중되었던 찬양의 동상들은 허무하게도 넘어져야 했다. 그의 힘으로 만든 숱한 역사의 날조는 다시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되기도 했다.

충(忠)이냐 역(逆)이냐
4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의 육군 특무대장이던 김창룡 소장이 같은 군 내의 고위 간부들에 의해 암살되었을 때 국민들은 한동안 어리벙벙했다. 고위간부 급들이 목숨을 걸고 총을 겨눈 그 이면에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곡절이 숨어있을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저격에 관련된 고급장교들은 구류 심문에서 또는 공판정에서 입을 모아 김창룡 장군의 악랄한 행적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론으로 “나의 이번 거사가 사심(私心)에서가 아니고 정의를 위한 공심(公心)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해줄 것이다. ”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들의 말은 모두 묵살되었다. 강문봉 중장을 비롯한 몇 명은 감옥으로, 허태영 대령과 그 하수인 등은 형장으로 끌려가서 총살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한편 이 저격 관련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김창룡 부대장을 숙군과 타공(打共)의 원훈(元勳)으로 추켜세우는 한편, 그를 소장에서 중장으로 한 계급 특진시켜 육군장(陸軍葬)의 극진한 대접을 했다. 그 묘는 안양읍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양 유원지에 있는데 조국독립운동의 어느 지사의 묘에 못지않게 거대한 성장(盛裝)을 하고 있다. 포도원을 경영하고 있는 묘지기에 의해 가꾸어지고 있는 이 묘에서 문무양반의 석물(石物)이 열립해 있는가 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직접 쓴 비문 정면에다 문학박사 이병도 씨에 의해 쓰여진 묘갈명을 여기에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고 김창룡 중장 묘갈
조국 치안의 중책을 띠고 반역 분자 적발에 귀재의 영명을 날리던 고 육군특무대장 김창룡 중장은 
4289년 1월 30일 출근 도중에 돌연 괴한의 저격을 입어 불행히도 순직하였다.
이 참변을 듣고 뉘 아니 놀래고 슬퍼하랴. 아! 이런 변이 있을까 나라의 큰 손실이구나. 함이 이구동
성의 외침이었다.
그는 본시 영흥 출생으로 80년(단기 4280년. 1947년)에 육사를 마치고 그 후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
과장에 취임하여 이래 누차 숙군을 단행하여 군의 육성발전에 이바지하였다. 특히 동란 중에는 군검
경합동수사본부장으로 맹활동을 개시하여 간첩, 오열(五列), 부역자 기타를 검거 처단함이 근 2만5
천 명, 전시 방첩의 특수임무를 달성하였다. 84년 육군특무부대장에 부임하여서는 더욱 헌신적 노력
과 탁월한 지휘로써 국가 및 군사 안전보장에 기여하였다.
그 중요한 적발만으로도 85년 대통령 암살음모의 김시현 사건, 87년 남도부 등의 대남유격대사건, 88년 대통령 암살 음모자 김재호 일당을 미연에 일망타진한 그것이다.
그는 이렇듯 나라에 유공하였다.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 아! 그는 죽었으나 그 흘린 피는 전투에 흘린 그 이상의 고귀한 피였고 그 혼은 길이 호국의 신이 될 것이다.
그의 생년은 단기 4253년 11월 23일 향년은 37세로서 순직과 동시에 육군 중장에 승진되었다.
단기 4289년 2월 3일 문학박사 이병도 지음
육군참모총장 육군대장 정일권


 

그의 저격에 가담한 강문봉, 공국진 등 장성들이 제2공화국의 빛을 받아 감옥에서 나오고 그의 아름답지 못한 경력들이 하나하나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지금, 과연 이 묘갈문은 그대로 수정받지 않아도 좋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역사의 심판은 이 묘갈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미상불 두 개 중의 하나에 판정은 내려져야 될 것이다. 더욱이 이 묘갈의 필자가 우리나라의 저명한 역사가라는 데서 그리고 거기에 기록된 고 김창룡 중장의 빛나는 업적이라는 것이 의문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고 김창룡중장에 대한 이승만 정부의 호의는 극진을 극한 것이었다. 물론 그가 빨갱이를 적발 소탕하는 방첩 특무 활동의 지휘자로서 진짜 빨갱이들을 수많이 색출 검거한 업적은 엄연히 남아있다. 그러므로 4·19 이전까지만 해도 원효로에 있는 그의 집은 그의 예하 부하들인 특무대원들로 흥청댔고 남은 유가족들은 옛날 그대로 장군의 가족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4·19 이후에 와서야 그의 집은 주인 잃은 허전한 집이 되었던 것이다. 안양 그의 묘도 그랬다. 4·19 전엔 그의 옛 동지들이 자주 찾아오더니만 지금은 전연 발길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오직 올 추석에 유가족이 와서 울고 가고 벌초를 했을 뿐 술 취한 소요객(逍遙客)들만 그잘 가꾸어진 잔디 위에서 뒹굴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근방은 종이 나부랭이, 깨진 술병조각으로 꽤 어지러워져 있었다. 인생이 무상하다면 공명은 뜬구름 같은 것이지만 사람이 가고 난 뒤 공명의 평가도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그것만으로서는 값이 없는 것 같다. 요는 남긴 이름이 꽃다우냐 욕되느냐에 따라 부운(浮雲) 같다는 공명이나마 빛을 발할 수도 있고 빛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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