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지난 6일 오후 ‘인천지역의 일제강점기 노동운동과 노동문학 현장‘을 돌아 보는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네 번째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1, 2부로 나눠 ‘인천지역의 근대 노동운동 역사 돌아보기’와 ‘노동문학 현장 탐방’ 순으로 진행됐다. 1부 해설은 이희환 인천대 인천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2부는 장회숙 인천도시디자인연구소장이 각각 맡았다.
답사단은 인천일보 강당에서 열린 사전 강의에 이어 중구청-최초의 노동쟁의 현장인 야적장-인천역-송월동 일대의 공장지대-노동문학의 현장 외국인 묘지-동일방직-인천도시산업선교회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이 교수는 사전 강의를 통해 “인천은 부산,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개항된 도시지만 수도 서울의 관문 항구로 어느 지역보다 일찍 노동자 계층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황해문화 2014년 여름호(통권 83호)에 실린 윤진호 인하대 교수의 특별기고 ‘개항기 인천항 부두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을 인용, “인천은 한국 노동운동이 처음 발화한 곳”이라고 강조했다.
이 논문은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 인천항에서 설립됐고 이 조합에 의해 1892년 이전에 이미 노동쟁의가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 교수는 “만약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한국노동운동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고 역설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1898년 함경남도 성진부두조합이 한국 최초의 노동조합이고, 같은 해 목포에서 발생한 부두노동자의 쟁의가 최초의 근대적 노사분쟁’으로 알려져 왔다.
이어 ▲정미업 선미여공들의 투쟁 ▲인천 성냥공장의 원조인 ‘조선인촌 주식회사 여공들의 지난한 파업 투쟁 ▲일본육군조병창 등을 사례를 들며 “인천은 식민지체제에 저항한 한국 노동운동의 메카이며 일제 강제동원의 현장이자, 징용노동자의 귀국항”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식민지시대 인천에서 전개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과 인천노동총동맹을 이끌었던 노동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연구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면서 “해방 이후 노동운동의 분화와 분단과정에 대한 연구를 포함해 인천 노동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2부 현장 답사 진행을 맡은 장회숙 소장은 “인천 최초의 산업지대가 형성된 항동과 북성동 일대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의 배경이었고, 북성포구를 중심으로 이태준의 ‘밤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현덕의 ‘남생이’ 등의 작품이 탄생했다”고 소개했다.
강경애의 ‘인간 문제의 무대인 동일방직과 월미도는 수많은 사연이 켜켜이 쌓여있다.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은 한 때 우리나라 방직업의 메카이자 여성노동운동의 현장으로 세인들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었다.
1934년 강경애가 동양방직에 근무하는 조선인의 고단한 삶을 그린 ‘인간문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공장에서 살인적 노동을 강요당하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를 생생한 필체로 그려냈다.
이 공장에서 1978년 발생한 ‘오물 투척사건’은 한국노동 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당시 어용노조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려던 여성 집행부를 상대로,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 노동자 5-6명이 방화수 통에 ‘오물’을 담아 얼굴과 옷에 닥치는 대로 뿌려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구사대의 똥물 사례를 받은 1백 명의 여성 노조원들이 해고를 무릅쓰고 민주노조를 사수하려고 분투했지만 끝내 신군부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장 소장은 1961년 이후 인천의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온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로 답사단을 이끌었다. 70-80년대 군사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온몸을 던져 온 산업선교회 지도자들의 고난과 노동자들의 투쟁을 설명했다.
1972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던 조승혁 목사, 1974년 미국으로 추방된 이 교회 설립자 조지 오글 목사, “도산이 침투하면 회사가 도산한다, 때려잡자 조화순”이라는 중앙정보부와 전두환 신군부의 용공 선전공세의 주인공 조화순 목사의 사연 등을 상세히 풀어나갔다.
영욕의 중심지였던 화수동은 이제 화수부두가 포구의 기능을 상실하고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낡은 집과 노인들만 남아 재개발을 기다리는 쓸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 소장은 “산업선교회 교회 건물이 민주화 기념지로 남겨져 학생들의 방문교육의 현장으로 쓰인다면 더 바랄게 없다”는 김도진 목사의 바람을 탐사단에게 전하는 것으로, 이날 행사의 현장 해설을 마무리했다.
/정찬흥 인천일보 논설위원 겸 평화연구원 준비위원 report61@incheonilbo.com
<2020-12-07>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