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오마이뉴스] 2021년 신입생에게 선물할 ‘역사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1545

‘확 바뀐’ 한국사 개정 교과서와 함께 사용될 수업 보조 교재

▲ 역사 달력 표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헌신을 공부하며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달력에 담고자 했다. ⓒ 서부원

올해도 탁상용 역사 달력을 만들었다. 재작년 2018년에도 ‘현대사 달력’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해 본 경험이 있다. 그땐 기말고사가 끝난 뒤 겨울방학을 이용해 아이들과 함께 작업했다면, 올해는 코로나로 교문이 닫혀 아이들의 재능을 활용할 수 없었다.

대신 올해 새로 부임해온 동료 교사와 의기투합했다. 그는 전공에 대한 자긍심과 수업에 대한 열정이 대단한 청년 교사다. 같은 역사 전공자로서, 그는 나의 후배 교사이기 앞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걸어가는 도반으로서, 배울 점이 많은 스승 같은 존재다.

그도 역사 교사로서 2020년 올해를 허망하게 보내는 데 대한 아쉬움이 컸다고 했다. 해를 넘기기 전에 뭐라도 하자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고, 내년 달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선물하자고 뜻을 모았다. 재작년과는 달리 예산 확보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봤다.

연초 다양한 교육 활동을 위한 예산이 잡혀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손발이 꽁꽁 묶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한 해를 보내야 했다. 교육 활동은커녕 준비를 위한 모임조차 쉽지 않았다. 학교마다 불용 처리하여 반납하거나, 비대면 수업을 지원하는 데 쓰이는 게 고작이었다.

특히, 올해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이라 이곳 광주에선 학교마다 다채로운 기념행사가 계획되어 있었는데 물거품이 된 상황이다. 하다못해 학생회 임원들과 함께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는 일조차 연기해야 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행사였는데 말이다.

일제강점기 인물을 달력에 넣기로 했다

▲ 역사 달력 앞면 10월 앞면으로, 가급적 덜 알려진 인물을 알리는 데 애썼다. 예컨대,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사실은 모두 알고 있는데, 안중근 의사를 후원한 최재형 의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 서부원

아이들의 손은 빌릴 수 없지만, 역사 교사 둘이서 만들면 시간은 단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주제를 정하고 관련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등의 작업 설계도를 함께 그렸다. 다만, 머릿속에 구상한 디자인을 컴퓨터로 편집하는 것은 달력 제작 업체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재작년엔 주제를 해방 후 현대사 속 사건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잡았는데, 올해는 바로 앞선 일제강점기를 다루기로 했다. 가치관이 물구나무선 우리 사회 적폐의 뿌리가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판단에서다. 얼추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 아닌가.

알다시피, 미소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친일의 후예들이 기득권 세력으로 거듭나 장구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그들이 수많은 정적과 시민들을 학살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해온 것이 우리의 핏빛 현대사 아닌가. 오죽하면 6.25 전쟁이 ‘친일파들의 해방 전쟁’으로 귀결됐다고 한탄할까.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하되, 내용은 독립운동가와 친일파의 면면을 다루는 것으로 정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역사는 인물사다. 아무리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도, 그와 관련된 인물의 자취가 없다면 한낱 껍데기에 불과할 테다. 우리는 사건이 아닌 사람을 통해 교훈을 얻는다.

인물을 선정하는 게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이었다. 우선, 2015 개정 교과서에 수록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배열해보았다. 달력이 그저 책상 위의 장식품이 아니라, 역사 공부에 도움을 주는 보조 교재로 활용될 수 있으려면, 교과서 내용과 연동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서다.

더욱이, 내년에 쓰일 한국사 교과서는 근현대사 위주여서 이번 달력과 조응하기 쉽다. 참고로, 이번 개정 교과서는 내용과 구성이 이전의 것과는 판이하다. 4개의 대단원 중에 3개가 개항기 이후의 역사, 곧 근현대사로 채워졌다. 곧, 1단원의 범위가 선사시대부터 조선 말까지다.

다른 교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1년 전에 모두 바뀌었는데, 한국사는 한 해 늦춰진 것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정교과서 도입이 전격 추진되다 온갖 분란을 일으키며 취소되는 사달을 겪은 탓이다. 사회적인 갈등을 겪은 만큼 새 교과서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 컸다.

착착 진행되던 작업이 난관에 부닥쳤다. 월별로 당대의 인물을 끼워 맞추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인물의 면면도 고려해야 하는 데다 월별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이라 무척 까다로웠다. 가독성을 위해서 한 달에 7~8명 넘게 배치하는 건 무리였다.

해당 인물과 인연도 없는 일자에 무작정 배치할 수도 없어 고민이 컸다. 우선, 생몰 일자와 관련 사건의 발생 일자를 일일이 조사했다. 신뢰도를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나 민족문제연구소 자료 등을 기본으로 삼았고, 인터넷 백과사전의 내용은 교차 검토 과정을 거쳤다.

삼척동자도 아는 인물만 대상으로 한다면 그다지 어려울 게 없었다. 관련 자료가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그럴 거였다면, 애초 달력 작업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교과서의 보조 교재로 활용되려면, 잊힌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것이 취지에 더 부합한다고 여겼다.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선, 반대편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인물도 다루는 게 효과적이다. 하여 드문드문 월별 빈자리에는 그들의 행적을 끼워 넣었다. 여성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도 소홀히 다룰 수 없었고, 당시 활약한 외국인까지도 챙겼다.

교사 본인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은 없었다

▲ 역사 달력 뒷면 11월 달력 뒷면에는 3일에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과 함께 친일인명사전 발간 사실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아니지만, 친일 잔재 청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러 실었다. ⓒ 서부원

사실, 이번 개정 교과서가 지닌 또 하나의 특징은 낯선 이름의 독립운동가들이 여럿 등장한다는 점이다. 당장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별도로 소개한 단원이 눈에 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두 바퀴로 연대와 경쟁을 거듭하며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려주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인물의 선정과 자료 조사, 배열에만 꼬박 일주일 넘게 걸렸다. 큰 산은 넘었지만, 정작 달력에 기록될 내용을 정리하는 일이 남았다. 해당 인물의 사진을 챙기는 한편, 백과사전 등에 수록된 행적을 핵심만 뽑아 요약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 또한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역할이 나누어졌다. 그는 달력에 삽입할 사진 자료를 챙기며 도안을 구상했고, 난 선정된 인물의 행적을 한 줄로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다. 비록 힘든 작업이었을지언정 교사로서 큰 도움이 됐다. 고백하건대, 일제강점기의 인물을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본 적이 없다.

신경 써야 할 건 또 있었다. 사진 자료 등의 저작권 문제가 바로 그것. 가져다 써도 되는 자료인지를 법적으로 따져보는 건 교사에겐 익숙하지 않은 일이다. 하여 채택한 교과서 속 자료를 우선 사용하고, 없는 건 정부 기관 등에서 가져왔다. 돌다리도 두드려본다는 심정으로 교육청에 문의하기도 했다.

달력의 뒷면도 비워둘 순 없었다. 앞면을 인물로 채웠으니, 뒷면은 그달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을 다루기로 했다. 말하자면, 3월엔 3.1운동을, 6월엔 6.10 만세운동을, 9월엔 한국광복군 창설을, 11월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는 식이다.

이 또한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사건만 올릴 순 없었다. 가능하면 사회주의 계열이 주도했거나, 당시엔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 등에 관심을 두고자 했다. 한편, 일제강점기 문화재 도굴 행위와 같은 이면까지도 담아보려 무진 애를 썼다.

1941년 12월에 있었던 호가장 전투와 해방 직전 7월에 벌어진 부민관 폭파 사건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을 소개한 건 그래서다. 또, 신라 금관이 최초로 출토된 때가 1921년이었다는 것과 함께 졸속으로 발굴된 까닭에 많은 역사적 진실이 묻히게 됐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때의 일은 아니지만,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도 부러 11월 달력 뒷면에 소개했다. 발간일이 11월 8일이어서다. 굴절된 우리 현대사가 친일 잔재 청산의 실패에 기인한다는 점을 알리려는 게 달력을 제작한 취지인 만큼 빼놓을 순 없었다.

보름 넘는 작업 끝에 얼개가 완성됐다. 정리한 내용을 업체에 건네고 원하는 디자인을 상세히 설명했다. 업체는 생소한 주제인 데다 처음 해보는 작업이라 애를 먹었다. 탁상용 달력 디자인을 고집한 그들과 수업용 보조 교재여야 한다는 우리의 요구가 소통에 혼선을 빚은 것이다.

디자인이 확정되고 교정을 마치니 출력은 일도 아니었다. 불과 며칠 만에 달력이 완성되어 학교로 배달되었다. 개정 교과서로 배울 내년 신입생들에게 나눠줄 선물이니, 겨우내 교무실에 소중히 보관할 참이다. 달력을 받고 나니, 올해의 허망함이 조금이나마 가신 느낌이다.

내친김에, 예산이 확보되고 아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내년엔 온전히 ‘현대사 속 여성’을 주제로 달력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싶다. 세상의 반은 여성이라는데, 교과서에 등장하는 여성은 여전히 채 1/10도 안 되는 것 같다. 자료를 찾는 게 쉽진 않겠지만, 이런 일은 힘들고 어려워야 제맛 아니겠는가.

<2020-12-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2021년 신입생에게 선물할 ‘역사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대박난 ‘역사 달력’, 주문 폭주에 난감해졌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