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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소리] [인터뷰] ‘전쟁의 그늘’ 펴낸 신기철 소장··· 민간인 학살을 승전으로 왜곡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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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일산서구 금정굴에서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소장ⓒ권종술 기자

“지금 전국의 한국전쟁 기념시설을 찾아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범죄의 현장에 승전비를 세웠다. 이곳 아산의 민간인 학살도 가해자들에겐 여전히 공적으로 되어 있다.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 민간 차원에서도 역사를 다시 재구성해 평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시기다.”

지난 2019년 5월, 충남 아산서 열린 민간인 학살 유골 발굴 개토제 현장에서 만난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연구소장은 전쟁 승리로 기록된 역사의 뒷면을 파헤치고 있었다. 신 소장은 경찰과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국방부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와 전국 각지에 세워진 승전비와 기념관엔 승리한 전투로 왜곡된 채 기록돼 있다면서 이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그 성과를 ‘전쟁의 그늘’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책 ‘전쟁의 그늘’ⓒ인권평화연구소

신 소장은 어린 시절부터 성장해 온,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고양에서 벌어진 금정굴 사건을 접한 이후 사건 진상규명과 함께 전국의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해 왔다. 그는 지난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2006년부터 2010년까지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위원으로 일했다.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을 마친 지금도 금정굴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그는 그동안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멈춘 시간 1950’, ‘전쟁범죄’, 국민은 적이 아니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한다’,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 ‘황금무덤 금정굴 거짓에 맞서다’, ‘한국전쟁, 전장의 기억과 목소리’ 등 10권 넘는 책을 출간하며 한국전쟁 과정에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진실을 다뤄왔다. 이 중 한국전쟁 전후로 학살당한 민간인 1만4천343명의 명단을 수록한 책 ‘한국전쟁과 버림받은 인권’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상하는 제12회 임종국상 학술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10권 넘는 책을 쓰며 추적해 온
민간인 학살의 진실

그가 이렇게 10권이 넘는 책을 쓰면서까지 한국전쟁, 그 가운데서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파헤치게 계기는 무엇일까?

“진실화해위원회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활동 기록은 그 기관의 활동이 멈추면 모두 국가기록원으로 사라지게 된다. 일제 하 강제동원 조사나 친일파 조사, 의문사 조사, 친일재산 환수 조사 등의 기록은 그때뿐이었다. 그리고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다시 문제가 제기되곤 한다. 그동안 무엇을 했길래 다시 원점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일까? 지금 가동되고 있는 사회적참사조사위원회나 5.18진상조사위원회에서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제기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제가 몸 담았던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부터 평가와 반성, 성과의 확대 작업이 필요함을 느낀다. 저는 개별 피해를 넘어 지역과 더 나아가 전국적 사건의 해석, 세계적 공통점 비교 분석까지 계속해 나갈 생각이었고, 역사적 진실에 대한 평가도 중대한 목표였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오랜 기간 민간인 학살을 추적해온 그였지만 ‘전쟁의 그늘’을 출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려진 민간인 학살의 진실을 밝혀내기도 어렵지만, 승전으로 기록된 역사를 뒤집어 그것이 학살이었음을 밝혀내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국가보안법과 분단체제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현실에선 ‘이적(利敵)’이란 공격이 언제 날아들지 모를 위태로운 연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이 될까봐…….
청년은 물론 어린이, 여성, 노인까지 학살

“고양 금정굴 사건의 경우도 전쟁 시기 발생한 전투의 하나였다는 주장이 있었다. 저는 ‘1950년 10월이면 전선이 북쪽으로 훨씬 넘어가는데 뭔 헛소리야’라고 주장했고, 민간인 학살을 부수적 피해의 하나로 돌리려는 책임 회피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역을 확대하면서 보니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50년 7월 집중되었던 국민보도연맹 사건은 남은 청년들이 적이 될까봐 우려해서 저지른 대량 학살이었고, 1.4후퇴 시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을 집중적으로 학살한 사건들이 발견되었다. 가해자들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래의 적을 제거하는 행위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신 소장이 연구를 진행하고, 책으로 출간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가해자인 경찰과 국군이 과연 어떤 마음으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연구를 하며 당시 학살이 적을 제거하는 전투행위처럼 벌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2018년 8월 진행된 충남 아산시 배방면 설화산 민간인 학살 피해자 발굴 현장 모습. 흙더미속에서 세상밖으로 나오는 민간인피학살자.ⓒ구자환 기자

또, 정확한 학살자 규모를 파악하고자 하는 차원의 연구이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자는 100만 명 이상이라는 주장이 많았지만, 실제 확인되는 기록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국방부가 쓴 ‘한국전쟁사 4권’ 760쪽에는 이승만 정부 당시 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기에, 100만 명 넘게 학살됐다는 주장이 거짓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왜 확인이 되지는 않는 것일까?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적’, ‘인민군’은
민간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사’와 각종 기록, 현장 증언 등을 종합한 신 소장의 결론은 학살이 전투로 뒤바뀌어 기록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먼저 토벌 작전(1950년 9월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남한에 고립된 인민군을 소탕하기 위한 전투)의 피해에 대한 기록을 봤다. 예상했던 것에 대부분 일치했다. 비무장 민간인들에 대한 공격인데 노획물은 소총 몇 자루에 기관총까지 등장했다. 전투로 위장했던 것이다. 제가 최근 직접 조사한 사례는 곡성이었다. 화려한 전쟁 공원으로 보아 대단한 전투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은 달랐다. 과장되었지만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상주 화령장 전투를 기념하는 화령전승기념관. 상주 화령장 전투는 남하하는 인민군에 큰 타격을 입힌 중대한 전투였다고 한국전쟁사 등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철 소장은 이런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신기철

심지어 인민군 주력 부대와의 전투로 기록된 것 중에서도 민간인 학살을 전투로 둔갑시킨 사례가 많았다고 신 소장은 말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그는 가장 유명한 전투로 손꼽히는 화령장 전투, 낙동강 전선의 전투, 인천상륙작전 등을 꼽았다.

“화령장 전투에는 패잔 인민군을 소탕한다면서 사살한 마을 주민들이 확인되었다. 전투 역시 일방적으로 우마차를 공격한 것이어서, 이를 전투라고 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낙동강 전선의 전투는 실제 피란민의 죽음이 더 많았다. 너비 7~8 키로미터의 주민 거주지를 소개했으니 해당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것이라며 영흥도와 덕적군도에서 벌어진 섬 주민 학살 사건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인민군도 없었고 인민위원회라 해봤자 한 달이나 있었는지 의문스러운 지역이었다. 그리고 수시로 해군 첩보부대들이 드나들었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사는 총살당한 섬 주민들을 ‘적’으로 만들어놨다. ‘한국전쟁사’가 말하는 ‘적’, ‘인민군’은 민간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피란민과 민간인이 인민군으로,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인민군 범죄로 둔갑···….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 책에서 신 소장은 여러 사례와 각 지역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앞서 소개했듯이 피난민, 주민 등이 적으로 몰려 목숨을 잃었다. 충북 영동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처럼 미군이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한군이 잠입했다며 폭격과 기관총 발사로 민간인들을 살해한 것을 ‘한국전쟁사’는 인민군이 지뢰지대를 통과하면서 피란민을 앞세워 지뢰를 제거하려 했던 행위로 왜곡했다. 하지만,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인해 학살의 진실이 세계에 알려졌고, 인민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임이 밝혀졌다.

아울러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도 다뤘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의 북진 이후 후퇴하던 12월 초까지 이북 지역에선 민간인 학살, 폭격 등에 의한 인명 피해(부상자 포함) 등으로 268만 명이 고통을 겪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건은 신천 학살 사건이다. 미 1군단 24사단 19연대가 진입하면서 벌어진 이 사건의 피해자는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3만 5천 명이 넘는다. 당시 신천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피해였다.

신천 학살과 관련한 유물들ⓒ기타

이런 사건들은 한국전쟁의 성격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한국전쟁은 민간인 피해가 군인들의 사상과 비교해 훨씬 많았던 전쟁이었다.

“전체 한국전쟁 피해자 600만 명 가운데 민간인은 350만 명에 이른다. 부상자까지 포함한 통계지만 사망자과 실종자만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여기에 전쟁 초기 8개월만 비교하면 더욱 큰 차이를 보인다. 남한 지역의 경우 국군 피해 8~9만 명에 민간인 피해가 100만 명을 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민간인 학살 사례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형무소 재소자 사건,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 수복 후 부역 혐의 사건, 미군 폭격 사건, 1.4후퇴 시기 예비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다. 이는 전쟁이라기보다 학살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의 태도만 본다면 친위 쿠데타라고 봐도 될 것이다.”

학살이 전공으로 뒤바뀌면서 학살 가해자에게 훈장이 내려지기도 했고, 국립묘지에도 안장됐다. 이런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아직 갈 길이 멀다.

“학살이 전투로 둔갑되었다는 주장은 아직까지 저만 하는 것 같다. 국방부가 스스로 알아서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지만 거짓 기록 위에서 70년 동안 특권을 누려왔던 고급 장교들이 사과하지 않을 것 같다. 이제라도 한국전쟁사를 역사의 영역에 포함시켜 일반 연구자들의 연구와 논문 발표를 유도해야 할 것 같다. 전쟁사의 진실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한국전쟁사와 전투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불경으로 여기는 풍토가 빨리 사라져야겠다.”

인민군, 좌익세력 등이
자행한 ‘적대세력 사건’도 조사 필요···….
하지만, 우익이 저지른 사건을
인민군이 저지른 사건으로
조작하는 등 왜곡 심각

이런 풍토와 국가보안법이라는 실체 때문인지 민간인 학살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일각에선 좌익이나 인민군도 학살을 저질렀다면서 국군과 경찰의 민간인 학살을 희석하려 시도하곤 한다. 상대편 역시 학살을 저질렀다고 해서, 우리 국가가 저지른 학살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 소장은 인민군과 좌익세력 등이 자행한 이른바 ‘적대세력 사건’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게 남한 군경이 저지른 사건에 대한 왜곡이 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올해 초 조사한 화순 지역 사례를 들며 민간인 학살이 우익과 좌익 모두에 의해 벌어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 전 국군의 토벌 작전 학살이 있었지만, 이는 인민군의 점령기 동안 큰 보복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피해는 수복하는 국군과 경찰에 의해 발생했고 이를 피하려고 입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은 총살당하든가 소개지역으로 이동했고 토벌 국군은 마을에서 빠져나갔다. 마을은 소수지만 다시 입산했던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 청년들은 가족들을 학살당한 모습을 목격한다. 그리고는 공격이 쉬운 마을 내부 배신자를 상대로 보복을 한다. 얼마 뒤 다시 토벌 국군이 마을에 진입했다.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악에 바친 빨치산으로 살아남았다. 이들은 체포되거나 죽을 때까지 투쟁한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악순환이 벌어졌다. 모두 죽을 때까지 말이다. 그래서 이 유형의 사건들은 수복 후에 발생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심지어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이라고 기록됐지만, 실제론 경찰 측 치안대가 주민을 학살한 사건을 조작한 사례도 발견된다. “대표적인 사건이 고양 지역의 타공결사대 사건이다. 1950년 9월부터 11월까지 고양경찰서 신도지서의 치안대 활동을 보조해온 조직이 이후 군검경 합동수사본부 김창용 본부장에게 연행된 뒤 좌익조직으로 조작된다. 결국 이들 타공결사대에게 학살당했다는 100여 명의 주민들은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자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가족들이 2019년 5월 22일 국회 앞에서 희생자들의 유골을 놓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과거사법 또는 진화위법) 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2019.05.22ⓒ정의철 기자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비롯해 과거사와 관련해 풀어야 할 과제가 아직 많지만, 10년 만에 다시 가동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직 정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출범을 선언하긴 했지만, 국민의힘이 야당 몫인 위원 4명의 추천을 아무런 이유없이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의힘이 추천을 해도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신 소장은 “과거청산을 반대하는 분들이 9명의 위원 가운데 4명이나 차지할 예정이다. 그 중 한 분은 상임위원으로 민간인 학살 사건 조사를 총괄할 것으로 예상된다. 진실규명 결정을 받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분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정밀한 조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가
분단 상황에서 내전 또는 국제전 중
독재 권력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독재를 극복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

신 소장은 2기 진실화해위에 대해 이런 바람을 전했다. “민주적이고 공정하고 투명하게 운영되어야 한다. 신청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설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2기 위원회는 처리하지 못했던 사건이나 새로 나타난 사건들을 조사하는 것에 그치는 위원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1기 위원회의 연장으로 과거 청산 작업 완성이 자기 임무라고 생각한다.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덮는 곳이 아니라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살려내는 것이 임무다. 전쟁 시기는 물론 이후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희생된 수많은 열사, 희생자들을 역사 속에서 되살려내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서 3년 뒤에는 조사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거나 권한이 없어서 못했다는 말보다는 과거 청산의 다음 단계로 가자는 말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일은 2기 위원회의 출발과 함께 진행되어야 할 일일 것이다.”

2016년 3월 충남 홍성군 민간인 유해발굴이 종료되면서 66년 전의 민간인학살 유골들이 드러났다.ⓒ공동조사단

지난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한 이후 10년 간의 작업을 통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사건의 시기별, 유형별, 지역별 분석을 해온 신 소장은 이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역사적 의미와 가해자, 가해 행위 분석을 통한 재발 방지 연구에 도전하고 있다. 제 인생에 이 과제를 마칠만한 시간이 얼마 없을 것 같습니다만, 여기에 더해 이후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의 연속성을 규명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저와 제 주변 인사들의 인생도 이 과정에서 만나 어우러져 왔다. 당시 희생당한 친구들도 있고 여전히 실종 상태에 있는 친구도 있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했지만 결국 여전히 실종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저는 조사관이기도 했지만, 신청인의 입장에서 가진 분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제가 겪었던 시대 역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70년 전에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이후 현대사의 열쇠라고 믿고 있는 저로서는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대해 전쟁의 연장선 상에서 재해석에 도전해 보고 싶다.”

어떤 이들은 아직도 과거를 이야기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신 소장은 진정 미래로 나가기 위해 넘어야 산은 민간인 학살 등 과거사라고 강조한다.

“저는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피해가 분단 상황에서 내전 또는 국제전 중 독재 권력에 의해 벌어진 전쟁범죄, 반인륜범죄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독재를 극복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여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를 이루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저는 이 운동이 광범위한 관심과 지지 속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민주화운동하는 분들이나 통일운동가, 평화운동가, 심지어는 인권운동가들조차 주목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 역사 영역에서는 거의 소외되어 있고, 과거사라며 특별한 분야로 제한하는 경향이 큰 것도 주요 원인 중 하나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과거사 영역을 더 확장시키지 못하는 저를 더 반성하게 된다. 곧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2020-12-15>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인터뷰] ‘전쟁의 그늘’ 펴낸 신기철 소장··· 민간인 학살을 승전으로 왜곡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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