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22]
명치신궁 성덕기념 회화관에 걸린 ‘한국병합’ 벽화그림
경술국치와 관련한 전시도록에 곧잘 등장하는 것으로 ‘경성 남대문’의 모습을 그려놓은 한장의 그림엽서가 있다. 여기에는 석축(石築)에 담쟁이덩굴이 제법 달라붙어 있는 남대문의 전경과 그 뒤로 흘러내리는 남산 자락을 배경으로 하여 집집마다 일장기가 걸린 가운데 내지인(內地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천황의 은덕이 가져다 준 평화를 기뻐하고 있는 양 거리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이 엽서의 위쪽에는 “명치신궁 외원 성덕기념회화관 벽화(明治神宮 外苑 聖德記念繪畫館壁畫)”라는 표시가 있고, 아래쪽에는 다시 “[77] 일한합방(日韓合邦), 츠지 히사시 필(辻永 筆), 조선각도 봉납(朝鮮各道 奉納), 명치(明治) 43년 8월 29일, 경성 남대문”이라는 구절이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제목으로만 본다면 필시 1910년 8월 29일의 상황인 듯이 오해하기 십상이나 그 시절에는 담쟁이덩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야 맞고, 실제로 이 그림의 초안이 그려진 것은 1925년의 일로 확인된다.
성덕기념회화관(1919.3.5일 착공, 1926.10.22일 준공)은 1912년 명치천황의 장례가 치러진 일본 도쿄 아오야마연병장(靑山練兵場) 장장전(葬場殿)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미술관으로, 죽은 천황과 황후의 유덕(遺德)을 연대순으로 묘사한 그림 80점(일본화 40점, 서양화 40점)이 이곳에 전시되었다. 그림의 제작은 당시의 화족(華族), 국가기관, 지방공공단체, 민간기업 등이 봉납하는 형태로 이뤄졌으며, 이 가운데 야마모토 카나에(山本鼎, 1882~1946)가 그린 ‘66번 서양화’ 「일영동맹(日英同盟, 1932년 완성)」은 조선은행(朝鮮銀行)이, 츠지 히사시(辻永, 1884~1974)가 그린 ‘77번 서양화’ 「일한합방(日韓合邦, 1927년 완성)」은 조선총독부가 각각 헌납한 것이었다.
<경성일보> 1925년 5월 2일자에 수록된 「일한병합(日韓倂合)의 대벽화(大壁畫)를 그리다, 총독부(總督府)로부터의 위촉(委囑)으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 어젯밤 입성(入城)」 제하의 기사에는 이 그림의 제작과정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그가 사방 9척(尺)에 달하는 벽화의 화재(畵材)를 찾기 위해 평양, 인천, 기타 지방에 돌아다녔으며, 파성관(巴城館, 본정 2정목 93번지)에 터를 잡고 이곳에 화실(畵室)을 꾸민 다음 약 1개월가량 머물며 타카기 하이스이(高木背水, 1877~1943)의 도움을 받아 하도(下圖, 밑그림)를 완성할 예정이라는 사실이 채록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 그림의 초안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었는지 <조선신문> 1925년 5월 20일자에 수록된 「남대문(南大門) 앞에서 명치신궁(明治神宮)의 벽화(壁畫)를 찾아서,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의 분투, 쉽지 않습니다 …… 라고」 제하의 기사는 작품의 제작 상황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명치신궁의 대벽화의 화제(畵題)를 구하기 위해 체경중(滯京中)인 츠지 히사시 화백(辻永 畵伯)은 파성관(巴城館, 하죠칸)에 투숙하고 이에 10일 정도는 매일 오전 5시경부터 본사(本社, 조선신문사) 앞의 그린에 캔버스를 세우고 파레트를 한 팔에 열심히 브러쉬를 잡고 있었는데, 벌써 19일의 아침에는 캔버스의 한 면에 남대문을 전경(前景)으로 하여 짙푸른 남산(南山)이 등장하고 있었다. 츠지 히사시 화백은 브러쉬를 놓고 말한다.
“벽화는 바야흐로 남대문 이것으로 결정하고, 10일 남짓 매일 오전 5시부터 스케치를 나와 있습니다만 이 원화(原畵)의 50배로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일단 완성되었지만 그 위에 부분 부분의 스케치를 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잠깐 한숨 돌리고 20일부터 4일간 정도는 미나미 군(南君)과 함께 평양에 다녀옵니다. 평소는 늦잠꾸러기라서 5시부터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소이다.…….”
여기에 나오는 ‘미나미 군’은 나중에 도쿄미술학교의 교수를 지내는 미나미 쿤조(南薰造, 1883~1950)를 가리킨다. 미나미는 이 당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선전) 심사원(제2부 서양화 및 조각)으로 초빙되어 경성에 체류하던 상태였으며, 때마침 츠지도 경성에 머무는 김에 선전의 심사원으로 함께 위촉되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그런데 명치천황의 위업으로 치장된 ‘한국병합’ 관련 벽화그림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었다. 도쿄부 양정관(東京府 養正館)에 설치된 국사회화(國史繪畵)에도 이와 동일한 종류의 벽화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33년 12월 23일에 황태자(皇太子, 나중의 아키히토 천황)가 탄생하자 이를 기리는 기념사업의 하나로 일본 도쿄부에서는 “국사(國史)를 통해 웅대한 조국정신(肇國精神)을 체득하고 일본정신(日本精神)을 연성시키고자” 청소년수양도장의 창건을 기획하였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1937년 12월에 준공된 ‘도쿄부 양정관’이었다. 이곳의 본관에는 회화진열실이 마련되어 일본사에서 77개의 화제(畵題)를 선정하여 이를 일본화 45점과 서양화 32점으로 제작한 벽화가 상설 전시되었다.
이 가운데 70번째 그림이 바로 나가토치 히데타(永地秀太, 1873~1942)가 그린 「한국병합(韓國倂合)」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남산에서 내려다 본 서울 전경과 저 너머로 백악산과 북한산 자락에 그려져 있고, 시가지에 그득한 기와집들마다 일장기가 나부끼는 광경이 담겨 있다. 그림의 아래쪽에는 갓 쓴 조선인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언덕길을 오르는 모습과 함께 조선인 소녀와 일본인 소년이 나란히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일장기를 잡고 만세를 부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1942년 12월에 벽화가 완성되자 <도쿄부 양정관 국사벽화집(東京府 養正館 國史壁畵集)>에도 수록되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배포되기도 했다. 더구나 1943년 5월 29일에는 자신의 탄생 기념공간으로 만들어진 이곳 양정관에 일본 황태자가 직접 들러 벽화를 하나씩 세세히 관람하고 간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듣자 하니 양정관에 걸려 있는 벽화 그림들은 1955년에 이르러 이세신궁 징고관(伊勢神宮徵古館)으로 이관되어 이곳에서 관리 진열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이래저래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가 일본에서는 영광스런 역사의 한 장면으로 치장이 되어 반영구적으로 그 흔적을 남기게 될 모양이다.
•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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