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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기슭 군경유자녀원의 앞뜰에 남겨진 러시아제 대포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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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톺아보기•23]

남산 기슭 군경유자녀원의 앞뜰에 남겨진 러시아제 대포의 정체

1934년 9월에 경성신사의 섭사(攝社, 부속신사) 형태로 창립된 노기신사의 전경을 담은 채색사진엽서이다. 신사로들어서는 입구에는 예전에 상수도 수원지로 사용하던 저수지가 있었으며, 이곳에는 일본 닛코 동조궁에 있는 신교(神橋)를 본떠 만든 진홍색 나무다리가 가로질러 걸쳐 있었다.
해방 이후 남산 기슭의 ‘군경유자녀원’ 구내에 그대로 남아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1967년 3월 1일에 육군사관학교 군사박물관에 의해 수습되어 그곳으로 옮겨졌고, 지금도 육군박물관 야외전시구역에 배치 전시되고 있다.
옛 신문자료를 뒤지다가 <동아일보> 1962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전쟁고아 관련 탐방기사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러시아제 대포의 모습이다. 알고 봤더니 이곳 군경유자녀원은 옛 노기신사 자리였고, 대포 역시 노기신사의 유물이었다.

어느 특정한 주제에 관심이 꽂혀 이에 관한 흔적이나 단서를 찾기 위해 해묵은 신문자료를 맹렬히 뒤질 때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정작 찾고자 하는 내용은 아니 나오고 이것과는 전혀 무관한 별스럽고 흥미로운 자료들을 우연하게 마주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지금 소개하려는 <동아일보> 1962년 6월 27일자에 수록된 「6.25의 유산(遺産) ③ 전쟁고아(戰爭孤兒)」라는 제목의 연재기사가 바로 그러했다. 

러시아제 대포의 모습이 더욱 또렷이 보이는 중학생들의 단체 촬영 사진이다. 사진의 뒷면에는 “1962, 남산예식장 안, 졸업앨범”이라고 쓴 메모가 남아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여기에는 서울 남산에 있는 ‘군경유자녀원’(軍警遺子女院, 예장동 8-6번지; 지금의 사회복지법인 남산원)에서 양육하고 있는 전쟁고아들의 실상을 알리는 가운데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이 곁들여진 것이 퍼뜩 눈에 들어온다. 스무 명 남짓한 아이들이 잔뜩 매달려 있는 것이 처음에는 무슨 나무기둥이나 놀이기구인줄 알았더니 기사의 말미에 “무심히 뛰어노는 전쟁고아들 … 그들이 장난감으로 삼고 있는 대포는 일로전쟁 당시의 유물이다”라고 설명한 구 절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대포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수집하여 보관하고 있는 낱장 사진 묶음 속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십여 명의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함께 촬영한 이 단체사진에는 대포의 모습이 훨씬 더 또렷이 드러나 있다. 사진의 뒷면에는 “1962, 남산예식장 안, 졸업앨범”이라고 쓴 메모가 남아 있으므로 두 사진은 거의 동일한 시기에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고아원의 앞뜰에 남아 있는 대포라니, 이건 어찌 된 연유일까? 이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이 바로 노기신사(乃木神社)가 있던 자리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잘 알려진 바대로 일본군육군대장이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는 러일전쟁 당시 제3군사령관으로 여순공략(旅順攻略)과 봉천점령(奉天占領)을 성사시킨 당사자였고, 이로 인해 일본인들에게는 굉장한 전쟁의 영웅으로 치부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러한 전공을 세우는 과정에서 무수한 부하장병들을 희생시켰으나 자신의 두 아들 카츠스케(勝典)와 야스스케(保典)도 이때 전사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비난은 크게 상쇄되었다고 알려진다. 특히, 그는 자신의 주군이던 명치천황(明治天皇)이 숨지자 장의절차를 마치고 돌아오던 1912년 9월 13일, 바로 그날 아내와 함께 할복자결로 순사(殉死)하였다. 이 일로 이미 군신(軍神)으로 추앙받던 그의 위상은 거의 신화의 경지에 오르게 되며, 일본의 각지에는 죽은 노기를 추앙하여 그를 제사지내는 노기신사가 잇따라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흐름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일찍이 그를 ‘국민교화(國民敎化)의 수호 신(守護神)’으로 떠받들던 조선노기회(朝鮮乃木會)라는 무리가 나타나 노기신사의 건립을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1932년에 노기 대장 내외의 20년식년제(二十年式年祭)를 맞이하고 때마침 ‘만주사변(滿洲事變)’이라는 시국의 변화에 따라 국민정신작흥상(國民精神作興上)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노기신사의 건립이 본격화하였다.

<노기신사헌영집>(1936)에 수록된 1934년 9월 13일에 거행된 노기신사 진좌봉축제 당시의 광경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이에 남산 왜성대 옛 조선총독부 청사의 후면에 자리한 통칭 ‘앵계(櫻溪, 사쿠라타니)’의 저수지(貯水池) 지역을 편입하고 그 안쪽의 국유지 1,721평(나중에 2,400평으로 확장)에 대한 무상대부(無償貸付)를 함께 청원하여 이곳에 건립부지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933년 10월 18일에는 경성신사 경내사(京城神社 境內社)로서 노기신사의 설립에 대한 조선총독의 허가가 정식으로 내려졌다. 

이에 따라 1934년 4월 12일에 지진제(地鎭祭), 8월 13일에 신전 상동식(神殿 上棟式), 9월 12일에 정천좌제(正遷座祭), 9월 13일에 진좌봉축제(鎭座奉祝祭)를 거행하는 것으로 노기신사의 건립이 완료되었다. 노기신사에서 예대제(例大祭)를 거행하는 때는 9월 13일인데, 이는 1912년에 노기 대장이 명치천황을 따라 죽은 것이 바로 이날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신문> 1935년 9월 13일자에 수록된 노기신사 가농포(加農砲, 캐논포) 제막식의 광경이다. 여기에 보이는 러시아제 대포는 러일전쟁 당시의 전리품으로 노획했던 것으로 노기신사 진좌 1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여순요새사령부에서 기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의 입구 쪽에는 일광 동조궁(日光 東照宮, 닛코 토쇼구)의 신교(神橋)를 본뜬 진홍(眞紅)의 목교(木橋)를 가설하였으며, 일찍이 여순함락 때 러시아군을 이끌던 스텟셀(AnatoliiM. Stoessel, 1848~1915) 장군이 바쳤다는 준마(駿馬)를 본떠 만든 동상도 이곳에 배치되었다. 이와 아울러 노기 장군 내외가 사용하던 구두, 의류, 트렁크와 같은 유품을 다수 가져와 이를 보관하였고, 이것들과 각종 봉납품을 진열 전시하기 위한 보물전(寶物殿)이 1936년에 따로 건립된 바도 있다. 

그렇다면 이곳 노기신사에 러시아제 대포가 등장하는 것은 어느 때의 일이었을까? 이에 관해서는 <조선신문> 1935년 9월 12일자에 수록된 「경성 왜성대(京城 倭城台) 노기신사 대제(乃木神社 大祭), 본일(本日) 전리포 제막식(戰利砲 除幕式)」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남아 있다.

왜성대의 노기신사에서는 항례대제(恒例大祭)의 서막(序幕)으로서 12일 오전 10시부터 전리포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인데 이 대포(大砲)는 여순요새(旅順要塞)의 백은산 구보루(白銀山 舊堡壘)에 비치되어 있던 것으로 동계관산 포대(東鷄冠山 砲台)와 서로 호응하여 노기군(乃木軍)을 호되게 괴롭히던 22구경(口徑, 포신길이) 15리(糎, 센티미터) 가농포(加農砲, 캐논포)이며, 당시의 주포(主砲)로서 노국(露國) 오브니프회사제(製)의 거포(巨砲)인데 여순함락(旅順陷落)과 함께 성상(星霜) 30년(年)을 여순요새사령부(旅順要塞司令部)에서 소장(所藏), 금회(今回) 사령부에서 노기신사에 기부(寄附)하여 신역(神域)을 장 식하게 된 것이다. 당일(當日)은 정각(定刻) 전에 노기회원(乃木會員)을 비롯하여 재향군인(在鄕軍人), 청년단원(靑年團員) 등 다수 참렬하여 청불(淸祓), 제막(除幕), 봉고(奉告)등의 제의(諸儀)를 엄숙하게 집행할 예정이다.

이 기사를 통해 ‘군경유자녀원’ 마당에 남아 있던 러시아제 대포는 러일전쟁 당시의 전리품으로 보관되어 있던 것을 노기신사 진좌 1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1935년 9월에 여순요새사령부가 기증하는 형태로 노기신사 안에 반입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이 대포는 일종의 군사유물이라고 간주된 탓인지 1967년 3월 1일에 육군사관학교 군사박물관에서 이를 수습하여 그곳으로 옮겨놓았고, 지금도 서울 노원구 공릉동의 육군박물관 야외전시구역에 그대로 남아 있다.

사회복지법인 남산원 측에서 제공하는 옛 사진자료를 살펴보니 노기신사의 신전 건물들은 196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꽤 오랫동안 잔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도 이 구역에는 ‘타카기 토쿠야(高木德彌, 담배 및 서양잡화점 주인)’라든가 ‘코바야시 토우에몬(小林藤右衛門, 황해도 장연군 소재 낙산광산 광업주)’ 등의 기증자 이름을 새긴 옛 노기신사 시절의 석물(石物) 잔석이 여럿 남아 있어서 이곳이 침략전쟁 시기에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인 배후공간의 하나였음을 묵묵히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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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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