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지금부터는 KBS가 최초로 발굴해 취재한 내용,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의 거대한 동력은 한반도를 넘었습니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그리고 이듬해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섭니다.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사건, 바로 ‘간도참변’입니다.
KBS가 발굴한 이 문서, 오늘(1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일본총영사가 결재했다고 표기돼 있습니다.
학살의 현장, 간도참변에 동참했던 한국인 경찰관들의 공적을 적은 일본 외무성 문서입니다.
일제에는 충실한 경찰이었지만, 우리 민족에겐 동포를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역자들이었습니다.
KBS는 이 자료를 토대로 당시의 참상을 돌아보는 한편, 경찰의 ‘친일 청산’ 작업은 어디까지 왔는지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홍진아 기자입니다.
[리포트]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독립군을 말살하겠다는 명목으로 간도 지역 한인 마을에 불을 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 명이 넘습니다.
[신주백/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 : “어린이부터 노약자까지 남성은 모두 다 한곳에 모아서 학살하는 형태를 취했고요. 총알이 아까워서 칼이나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KBS는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적힌 일본 외무성 문서를 최초 발굴했습니다.
일제가 이들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인데, 꼭 백 년 전인 1921년 3월 1일 결재됐다고 나옵니다.
“순사 박양운, 무장 독립군 7명을 붙잡은 공로가 크다.”
“순사 허린, 어두운 밤과 혹한을 무릅쓰고 13시간에 걸쳐 소탕 작전에 동참해 다수를 체포했다. 공적이 지대하다.”
이들이 체포한 한국인 가운데는 훗날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들도 확인됩니다.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 선생.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습니다.
한국인 순사 김학원은 김강 선생 체포에 공적이 현저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마을에 침입해 민간인 학살에도 가담합니다.
“순사 백원장, 무봉촌, 의봉촌 등 각 부락의 초토에 종사했다.”
“순사 박원식,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인정된다.”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었습니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지하로 60센티미터를 파내 마침내 보병총 35자루를 발견해 압수했다. 나정섭 순사가 열심히 찾은 결과다.”
“임기홍. 왕복 3킬로미터를 밤낮 가리지 않고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 한 마리를 노획해 왔다.”
[김광만/KBS 객원연구원 : “(간도참변에 참가한) 조선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 토벌 대장들이 공적서를 써주고 그것을 다시 간도 총영사관이 취합한 다음에 그걸 외무성에 보고를 한 거예요.”]
공적서에는 이들이 종로서, 용산서, 동대문서, 청주서 등 전국 각지 경찰서에서 차출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교수 : “간도대학살 때 군인뿐만 아니라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했고요.”]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KBS가 발굴한 이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요.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도 17명이나 확인됐습니다.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건 4명에 불과합니다.
KBS는 이번에 발굴한 자료를 보훈처에 전달할 예정입니다.
KBS 뉴스 홍진아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 배정철/영상편집:차정남/자료:영화 ‘봉오동 전투’
[단독] ‘민족 반역’ 대가로 상 받고 진급…경찰 ‘친일 역사’ 청산했나?
[앵커]
KBS 취재진은 이번 발굴 자료에 등장하는 경찰관들의 이후 행적도 추적해봤습니다.
간도참변의 공적을 인정받아 일제의 상훈을 받거나, 진급한 기록이 여러 건 확인됐습니다.
독립군을 잡던 경찰은 해방 이후에도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등 ‘친일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럼, 이후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경찰은 친일의 역사를 얼마나 반성하고 청산해왔는지 계속해서
송락규 기자가 보도합니다.
[리포트]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동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 48명의 행적을 추적했습니다.
이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입니다.
순사 백창돈, 충북 청주경찰서로 돌아왔다가 1930년 제천경찰서로 옮긴 게 확인됩니다.
퇴직 뒤 연금도 수령했다고 나옵니다.
경부보 최태욱.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1926년 경부보에서 경부로 한 계급 승급했습니다.
[김민철/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조금 특수한 경우입니다. 왜냐하면 20년대에 조선인 경부가 도에 한 명 정도거든요.”]
KBS는 이들의 행적을 추가로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질의서를 보냈습니다.
경찰은 인사관리시스템상 연관성이 있는 걸로 보이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습니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이 확인됩니다.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 간부로 재직한 동일한 이름을 찾았지만, 정작 경찰 인사기록엔 빠져 있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초대 경찰청장 격인 김구 선생의 동상을 청사에 세웠습니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습니다.
[민갑룡/2018년 당시 경찰청장 : “백범 선생님께서 남기신 애국안민의 신경찰이 되라는 가르침을 되새기고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2년이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까.
KBS가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 조사해 봤습니다.
역대 청장과 서장 중 70여 명이 친일인명사전에 실린 인물인데 별다른 언급 없이 그대로 올라와 있습니다.
일부 경찰서 건물에는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기도 합니다.
반면 경기도의 경우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병기하고 있습니다.
[김홍국/경기도 대변인 : “초상화를 뺀다거나 아예 삭제하는 그런 방식보다는 역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초상화를 그대로 두고요. 거기에 친일 이력을 병기했습니다.”]
경찰은 2019년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렸지만 독립운동 참가 경찰만 발굴했을 뿐,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내놓은 성과가 전무합니다.
이에 앞서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려 했지만, 지금까지도 진척이 없습니다.
[방학진/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 “자신의 성과를 내세우기에 급급하고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 독립에 대한 탄압, 민주에 대한 탄압, 반민특위 와해라고 하는 역사적 죄책에 대해서는 한 번도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대한민국 경찰이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공식 사과는 없습니다.
KBS 뉴스 송락규입니다.
촬영기자:유성주/그래픽:최창준
홍진아 기자 (gina@kbs.co.kr)
송락규 기자 (rockyou@kbs.co.kr)
<2020-03-02> KBS
☞기사원문: [단독] “동족 학살·독립군 체포”…간도참변 ‘한국인 경찰 48명 공적서’ 발굴
오늘(1일)은 3.1운동 102주년이다. 1919년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은 그해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이듬해인 1920년 간도 지역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전으로 이어졌다.
일제는 곧바로 보복에 나섰다. 간도 지역 독립군을 말살한다는 목적으로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잔인하게 학살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벌어진 ‘간도참변’이다.KBS는 오늘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3월 1일, 재간도 일본총영사가 결재한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오늘 밤 9시 뉴스에서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간도참변에 참가했던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일제에게는 유능한 친일 한국인 경찰, 우리에게는 동족학살에 가담한 민족의 반역자들이다.
■ KBS, 간도참변 참가 한국인 경찰관 48명 공적서 최초 발굴
KBS는 일본 외교사료관 ‘서훈 및 행상’ 분류 자료 가운데 1921년 작성된 ‘간도 사건 공적조서 보고’라는 제목의 문서에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명세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에게 상훈을 주기 위해 작성한 600쪽 분량의 문서다.
이들은 주로 첩보 수집 및 보고, 길 안내, 통역, 독립운동가에게 변절을 강요하는 귀순 업무 등을 맡았는데 독립운동가 체포와 민간인 마을 ‘초토화’에도 직접 가담했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의 구체적인 반민족 행위가 밝혀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로 훗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강(金剛) 선생. 선생은 1920년 11월 간도참변 당시 일본 경찰에 피살됐다.
KBS가 찾은 공적서에는 한국인 순사 김학원이 “김강 체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민간인 부락에 침입해 학살에 가담한 정황도 확인된다. 순사 백원장은 한인 마을 5곳을 급습하는 데 가담했고, 독립운동가 체포에도 앞장섰다.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를 보면, 간도참변의 많은 사건 가운데 가장 끔찍한 학살로 기록되는 ‘장암동 학살 사건’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도 확인된다. 당시 일본군과 경찰은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을 학살하고, 시신을 모아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순사 박원식에 대한 공적서를 보면, 일본군이 장암촌 부근에서 소탕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와 가택 수색에 용감히 행동한 공적이 뛰어나다”고 적혀 있다. 장암동 사건의 가담자들이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 한국인 경찰관, 독립운동가 체포·민간인 학살에 가담
한국인 경찰관은 독립군이 숨겨놓은 무기를 수색해 압수하는 역할도 맡았다.
“엄청나게 쌓인 눈을 치우고, 보병총 35자루를 압수한 공로”가 인정받는가 하면, “왕복 8리(3km)를 달려 독립운동에 사용된 말을 노획”해 오기도 했다.
김광만 KBS 객원연구원은 “현장에 있었던 부대장들이 간도 토벌에 참여했던 한국인 경찰들에 대한 업적을 공적서로 써주고, 간도총영사관이 공적서를 취합한 다음에 외무성에 보고했다”며 “우리나라 동포를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학살자들의 고백록이자 죄상 기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등 전국 각지에서 파견된 친일 한국인 경찰관들이었다.
만주 지역 항일운동 연구의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한중관계연구원 교수는 “간도대학살 때 조선인 경찰이 참여했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며, “일제가 조선인 경찰을 간도 현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최초의 발굴 자료”라고 강조한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증보판>에 등재 예정
올해 설립 30주년을 맞은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증보판’ 발간을 계획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증보판에 KBS가 발굴한 친일 경찰관들의 이름을 올리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독립운동가 체포, 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고, 일제로부터 종군기장을 실제로 수여한 사람들도 확인되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가 친일인명사전 개정 증보판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또 다른 과제도 남아있다. 공적서에는 간도참변 당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된 한국인 17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KBS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이 가운데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한 사람은 4명에 불과하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순국했을지도 모르는 이들에 대한 보훈처의 공적 발굴 노력이 필요하다.
KBS 사회부는 정확히 100년 전 오늘(1921년 3월 1일) 작성된 600쪽 가량의 일본 외무성 문서를 단독 발굴했다. 일제가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 48명의 ‘공적’을 일제 입장에서 적은 문서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제는 곧바로 간도참변이라는 끔찍한 보복에 나선다. 독립신문에 기술된 간도참변 희생자 규모는 3천여 명. 일제는 간도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와 수많은 민간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일제가 작성한 공적서에 이름을 올린 경찰들은 일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이들이지만, 우리에게는 같은 민족을 붙잡고 살해하는 데 가담한 반민족 행위자들이다. 간도참변에 가담한 한국인 경찰관들의 구체적 행위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이번 발굴 문서를 보면 이들이 ‘동족학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가 소상히 기록돼 있다.
KBS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공동 취재로, 이번에 발굴한 공적서에 기재된 해당 경찰관들의 소속과 계급, 주요 공적 내용을 토대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해봤다.
■ 일제로부터 상훈 받은 9명…연금 받고 진급까지
간도참변에 참가한 한국인 경찰 48명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상훈을 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확인된 기록으로만 9명이다. 단서는 1928년 8월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관보의 부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인 경찰관 9명이 1920년 12월 25일 ‘종군기장’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종군기장은 일본이 대외침략을 기념하며 전쟁에 참전한 이들에게 수여하던 일종의 상훈이다. 러일전쟁, 중일전쟁 등 각각의 전쟁마다 종군기장의 종류도 달랐는데, 간도참변에 가담했던 이들 역시 종군기장을 받았다.
충북 청주경찰서 순사 백창돈(白昌敦)은 1920년 5월 17일 간도 지역에 파견됐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1920년 10월 2일 훈춘사건 당시 적을 경계하고 재류민을 보호한 것(2) 토벌대에 배속돼 귀순자 처리 및 선전 업무 종사 등이다. 물론 이때의 ‘적’은 우리에겐 독립운동가를 뜻한다.
간도참변 이후 그의 행적을 따라가봤다. 조선총독부 연금자료에서 추가 행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간도참변 이듬해인 1921년 본래 소속돼 있던 충북 청주경찰서로 귀환한다. 이후 1930년 제천경찰서로 근무지를 옮긴 뒤 퇴직했다.
재간도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한 경부보 최태욱(崔泰郁). 간도참변 당시 일제로부터 ‘조선인 경찰관의 본보기’로 ‘공적이 가장 현저하다’고 기록된 인물이다.
그의 주요 공적은 (1) 밀정 사용 및 은닉 총기의 소재지에 관해 내사, 독립운동가 행동 조사에 관한 사무에 복무해 그 공적이 현저(2) 1920년 10월 5일~7일 출동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총영사관 경찰관과 재향군인으로 경비대를 조직해 임무를 완수 등이다. 공적서는 그가 1920년 10월부터 시작된 간도참변 당시 상당한 역할을 했음을 가리킨다.
그의 추가 행적은 1926년 1월 16이 경성일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가 간도총영사관 소속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승급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그의 계급은 경부보가 아닌 경부로 기재돼 있다. 간도참변 가담 당시 경부보였던 최태욱이 참변 이후 불과 5년 사이 경부로 진급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경찰 계급 체계는 위로부터 경무총장-경무부장-경무관-경시-경부-경부보-순사 순으로 정비돼 있었다. 대부분의 한국인 출신 경찰들은 순사 계급에 머물렀고,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경시나 경부급 인사가 되기는 어려웠다는 게 전문가들 설명이다.
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당시 조선인이 경부보에서 경부로 승진하는 경우는 특수한 경우”라며 ” 1920년대 당시 조선인 경부는 각 도에 한 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태욱이 어떤 연유로 경부로 승급했는지는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간도참변에 가담함으로써 얻은 공적이 직간접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KBS는 간도참변에 차출된 한국인 경찰관 48명 가운데 종로경찰서, 용산경찰서, 청주경찰서, 공주경찰서 등 소속 경찰서가 기재된 이들의 추가 행적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청에 공식 질의했다. 경찰은 ” 인사관리시스템에서 연관성이 있는 인물이 검색되지 않는다”며 “인사기록이 소실됐을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도 경찰이 확보하지 못한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정경찰서(현재:서울 중부경찰서) 소속으로 1920년 간도참변에 가담한 순사 장국환(張國煥). 취재진은 해방 후인 1952년 정부가 발간한 대한민국 직원록에서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한 장국환을 찾을 수 있었다. 한자까지 일치하고 계급 승급 가능성이 있어 동일인 여부를 확인해야만 했다.
하지만 경찰은 두 인물의 연관성을 확인해줄 수가 없었다. 장국환에 대한 인사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1952년 경기도 경찰국에 재직한 장국환은 정부 기록물에 등장하는 인물임에도 정작 경찰청이 보유한 인사기록에는 빠져 있었다. 경찰은 인사기록을 기준으로 인사관리시스템을 구축했기 때문에 일부 누락이 발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구 동상 세운 경찰, 친일 잔재 청산은 사실상 ‘전무’
경찰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 선생의 동상을 경찰청 본청 청사 안에 세웠다.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밝히는 차원이었다. 경무국장은 지금으로 치면 경찰청장이다.
2년여가 지난 지금, 친일 잔재 청산은 얼마나 이뤄졌을지 따져봤다. KBS는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등 274곳의 홈페이지를 전수조사했다. 이 가운데 70여 명(중복 포함)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었는데, 각 경찰청·경찰서 홈페이지에는 이에 대한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심지어 일부 경찰서 건물 안엔 여전히 친일 경찰의 사진이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충북 영동경찰서 8대 서장이었던 김상규도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등 형사로 근무하며 사상범과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앞장섰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재직 이력을 있는 그대로 표기했을 뿐 선양 의도는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경우 친일 이력을 함께 또렷하게 적고 있다. 경기도는 지난해부터 역대 도지사 가운데 친일 행적이 있는 사람은 약력에 친일 관련 기록을 표기하고 있다.
경기도 김홍국 대변인은 “친일 이력이 있는 인사의 재직 이력을 지우는 것도 사실 왜곡인 만큼, 기록 삭제 없이 친일 행적을 병기했다”라며 “친일 잔재 청산과 도민의 알 권리를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 ‘반민특위’ 습격한 경찰…사과 요구에도 여전히 묵묵부답
경찰은 2019년 이른바 ‘역사기록 전담팀’까지 꾸려 독립운동가 출신의 경찰을 발굴하는 등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유독 친일의 역사에 대해선 뚜렷한 성과를 내지 않고 있다. 경찰은 2005년에도 과거 반민족 행위를 기록하는 새로운 경찰 역사서를 발간하고자 편찬위원회까지 꾸렸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고 지금까지 아무런 진척이 없다. ‘빛’만 드러내고 ‘그늘’은 외면하는 꼴이다.
해방 후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습격한 것도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반민특위는 제헌국회가 구성한 헌법기구였지만, 경찰은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위원과 직원, 특경대원 등 35명을 연행했다. 공권력이 공권력을 습격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반민특위 활동 기한은 본래 임기보다 10개월 축소됐고 같은 해 8월 31일 특위 활동은 종료됐다. 친일파 청산 과제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한 6월 6일을 ‘국치일’로 보는 이유다. 민족문제연구소를 비롯한 역사 관련 시민사회단체들은 2005년부터 반민특위 습격 사건과 관련해 경찰에 사과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하지만 아직도 경찰의 공식 입장은 나온 바 없다.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경찰 지도부에게 과오를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는 제안을 했지만, 반민특위 와해에 대한 진정한 사죄라든지 사건 피해자에 대한 배상 노력 등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KBS 사회부는 삼일절을 맞은 오늘밤 [9시 뉴스]에서 이번에 단독 발굴한 자료를 자세히 소개하는 한편, 취재진의 추적 경위도 생생한 영상으로 전할 예정이다.<
<2020-03-01>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