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중계를 할 때면 으레 “여기는 성동원두, 서울운동장입니다”라는 아나운서의 멘트로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성동원두(城東原頭)는 성동 벌판의 들머리라는 뜻이며, 서울운동장은 옛 경성운동장이자 한때 동대문운동장으로 통용되었던 곳을 가리킨다. 이것 말고도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을 일컬어 훈련원원두(訓練院原頭)라고 했던 사례들도 곧잘 눈에 띈다.
88서울올림픽으로 잠실경기장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운동장은 그야말로 유일무이하다시피 했던 한국 스포츠 역사의 산실이었다. 전국체전과 소년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의 어지간한 경기대회는 빠짐없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막판 탈락을 아쉬워했던 올림픽 축구나 월드컵 아시아예선전이 벌어졌던 곳도 여기였다.
하지만 서울운동장이 스포츠의 공간만은 아니었다. 이곳은 때로 정치의 공간이자 근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가까이는 체제수호 명분의 무수한 궐기대회와 규탄대회가 자주 열렸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는 해방 직후에 찬탁이다, 반탁이다 하여 좌우익이 충돌하던 때의 정치집회공간이었는가 하면 여러 애국지사들의 영결식(永訣式)이 거행되는 곳으로도 사용된 적이 많았다. 더구나 일제강점기에는 전시동원체제에 편승한 각종 행사가 자주 개최되던 그러한 장소였다.
그렇다면 이곳에 운동장 시설이 처음 들어선 것은 언제이며 또한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진 것일까? 서울도성이 지나고 하도감(下都監)이 자리한 지역에 경성운동장(京城運動場, 경성그라운드)이라는 이름으로 개장이 이뤄진 것은 1925년 10월 15일이었고, 정식 준공일은 이듬해인 1926년 3월 31일이었다.
그런데 경성운동장 앞에 꼭 함께 따라 붙는 것이 “동궁전하어성혼기념(東宮殿下御成婚記念)”이라는 수식어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동궁 전하’는 장차 소화천황(昭和天皇)이 되는 일본 황태자 히로히토(裕仁)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 당시 섭정궁(攝政宮)의 노릇을 했던 히로히토 황태자의 결혼식은 1924년 1월 26일에 있었다. 당초 결혼식은 1923년 가을로 예정되었으나, 그해 9월 느닷없는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관동대지진)의 발생으로 한 차례 연기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니까 경성운동장의 건립은 이때 황태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행사의 하나로 추진된 것이었다. 이에 관한 결정과정에 대해서는 <경성일보> 1924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어성혼기념(御成婚記念)의 운동장(運動場), 만장일치(滿場一致)로 원안가결(原案可決), 2만 평(坪)의 관유지(官有地)를 팔아 재원(財源)으로, 완성(完成)은 14년도(年度)」 제하의 기사를 통해 그 내막을 엿볼 수있다.
경성부협의회 다화회(京城府協議會 茶話會)는 16일 오후 3시부터 학교조합회의실(學校組合會議室)에서 개회되었는데 출석의원 21명으로 부청측(府廳側)에서는 타니 부윤(谷府尹), 3 이사관(理事官), 토목과장(土木課長), 내무계(內務係), 회계계(會計係) 등이 출석했고 타니 부윤으로부터 어성혼기념사업(御成婚記念事業)으로서 그라운드 건설에 관한 계획의 보고를 하고 현재의 훈련원(訓鍊院) 동부그라운드(東部グラウンド)를 중심으로 한 부근 민유지(民有地) 약 2만 평을 양도 받아 최상단(最上段)에 테니스 코트(テニスコート), 중단(中段)에 다이야몬드(ダイヤモンド; 야구장), 하단(下段)에 트랙(トラツク)을 건설하며, 그리고 이에 필요한 재원(財源)은 특별염출법(特別捻出法)을 강구하여 부비(府費)에 관계없이 하도록 관유지(官有地)의 양여(讓與)를 받아 이를 매각하여 경비에 충당하려는 것인데 그 면적(面積) 2만 4, 5천 평이지만 유효매각지(有效賣却地)는 약 2만 평으로 예상한다는 부윤의 설명을 마치자
고죠 의원(古城議員)은 “실로 훌륭한 계획이지만 어성혼(御成婚)의 기념사업이라고 하면 가장 신중히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되며, 운동(運動)도 훌륭하기는 하지만 운동 이외에 무언가 사회적(社會的) 생산적(生産的) 시설은 없는 것일까” 라고 언급한 바
타케우치 의원(竹內議員)도 이에 찬의(贊意)를 표시하고 “그라운드로서는 위치(位置)가 치우쳐진 경향이 있다”고 하며 의견을 표출하였는데 다른 의원에게 “아전인수론(我田引水論)이다” 하는 야유(揶揄)를 받았고, 이어서
이진호 의원(李軫鎬議員)이 일어나 “섭정궁 전하(攝政宮殿下)는 비상(非常)히 운동(運動)을 좋아하고 계시며 또한 목하(目下)의 부민(府民)에게는 운동을 장려하는 필요가 있어서 선반(先般) 어하사(御下賜)된 조칙(詔勅)의 어정신(御精神)으로 보더라도 국민(國民)의 원기(元氣)를 함양하는데다 경사스러운 기념사업으로서는 가장 좋은 착상이다”라고 찬성하여 결국 만장일치(滿場一致)로써 부청(府廳)의 발안(發案)에 찬성의 뜻을 표했다. 비공식(非公式)이었지만 개선후(改善後) 제1회(第一回) 회합으로 각의원(各議員) 모두 비상한 긴장미(緊張味)를 보였고, 이리하여 7시 폐회(閉會)했는데 머지않아 본회의(本會議)를 개최한 다음 어성혼(御成婚) 이전에 공표할 것이지만 확실히 기공(起工)하는 것은 13년도(즉, 1924년도)이며, 14년도(즉, 1925년도) 중에는 완성하리라 예상한다고.
여기에 나오는 이진호(李軫鎬, 1867~1946)는 일찍이 경상북도장관(1910.10~1916.3), 전라북도 장관(1916.3~1921.8)을 거쳤고 다시 총독부 학무국장(1924.12~1929.1), 중추원 참의(1931.1~1940.4), 중추원 부의장(1941.5), 중추원 고문(1943.6),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1943.10)을 지낸 친일관료의 거물이었다. 그가 경성부협의회원이 된 것은 1923년 11월의 일이며, 그는 한때 휴직 신분으로 있던 도지사 직에서 막 퇴직(1923.8)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경성부에서 기념사업의 하나로 경성운동장의 건설을 추진하려는 뜻은 이진호의 말마따나 “특히 운동을 사랑하시는 동궁 전하(東宮殿下)의 기념사업으로 운동장 설치계획을 세움은 적당한 처치”라는 것이 그 이유로 내세워졌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경성운동장의 건립부지는 몇 차례 후보지 검토 끝에 훈련원공원(訓練院公園, 황금정 6정목 및 7정목; 1925.10.14일 폐지) 일대로 최종 선정되었다.
그러나 서울도성 안쪽만이 아니라 그 바깥 지역도 포괄하여 경성운동장을 배치하는 설계가 이뤄져 있었으므로 조선산업물산주식회사(朝鮮産業物産株式會社,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 220번지 부근) 소유 토지 5천여 평을 마저 사들인 이후에야 이곳에서 건립공사가 진행되었다. 경성운동장 건립지에는 그 당시의 세계적 추세에 따라 500미터 트랙을 갖춘 육상경기장(축구장)과 아울러 야구장과 정구장 시설이 우선 갖춰졌고, 경비조달의 문제로 수영장과 기타 시설은 추후에 보완 건립되었다.
이 지역은 어차피 성벽이 지나는 자리였으므로 싼값으로 공간을 확보하자는 의도와 함께 이러한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하여 관중석으로 만들어내는 식으로 공사가 이뤄졌던 것이다. 그 바람에 이 일대를 가로지르는 성벽의 흔적은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이간수문(二間水門)도 운동장의 바 닥에 묻히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언덕 지형을 깎아내려 무지막지하게 평탄화(平坦化) 작업을 진행하였으므로 이로써 성벽이 지나는 구간은 옛 모습을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경성운동장의 개장식이 열린 1925년 10월 15일은 이 행사만이 아니라 새로 지은 경성역사(京城驛舍)의 준공과 아울러 남산 중턱에 지은 조선신궁(朝鮮神宮)의 진좌제(鎭座祭)가 동시에 벌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경성운동장의 개장식은 3일간의 일정으로 벌어지는 제1회 조선신궁경기대회(朝鮮神宮競技大會)의 입장식(入場式)과 고스란히 겹쳐졌다.
이날 식장에 직접 참석한 사이토 총독은 그가 남긴 축사(祝辭)를 통해 이러한 조선신궁 경기대회의 남다른 의미를 이렇게 설파하였다.
조선신궁이 새롭게 완성되어 본일(本日) 진좌제(鎭座祭)를 거행하는 가절(佳節)에 즈음하여 선내 각지(鮮內 各地)에서 운동선수를 불러 신전(神前)에서 이런 경기를 하려는 것은 더없이 회심(會心)의 마음을 견디지 못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전(神前)에서 기(技)를 겨루는 것을 널리 행함으로써 사기(士氣)의 발양(發揚)이 도모되어 지는데 이번에 제자(諸子)는 이에 진좌제를 맞이하여 고래(古來)의 관례(慣例)에 따라 경기하는 일에 종사하며 제자(諸子)는 적절히 평소 연마한 바를 십분 발휘(十分 發揮)하여 경기의 진정신(眞精神)을 명심함으로써 그 장쾌한 의기(意氣)를 나타내기를 바란다.
이에 개회를 맞아 일언희망(一言希望)을 술회하며 축사(祝辭)로 삼는다.
대정 14년(1925년) 10월 15일 조선총독 자작 사이토 마코토(朝鮮總督 齋藤蘇實).
경성운동장의 내력에 관한 얘기를 하노라니, 또 한 가지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하도감(下都監)의 존재이다. 훈련원 벌판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던 이곳은 훈련도감(訓鍊都監)에 속한 분영(分營)의 하나이며, 경성운동장을 건립할 당시 야구장 일대를 품고 있는 지역이었다.
특히 이곳 하도감에는 일찍이 ‘교련병대(敎鍊兵隊, 통칭 별기군)’가 설치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당시 이곳에 있던 일본인 교관이던 육군공병소위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1848~1882)가 조선인 병사들에게 끌려나와 ‘하야시쵸(林町, 지금의 산림동)’ 부근에서 숨진 일도 있었다. 또한 이때 난병(亂兵) 진압을 핑계로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왔던 광동수사제독오장경(廣東水師提督 吳長慶, 1833~1884)과 그 휘하의 마건충(馬建忠), 원세개(袁世凱) 등이 진을 쳤던 장소가 바로 이곳 하도감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때는 원세개의 진지로 변한 이곳에 조선 국왕이 3일간이나 보호라는 명분으로 피신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884년 6월에 느닷없이 오장경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고종(高宗)은 그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 탓인지 그를 제사지낼 곳을 마련하도록 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하도감 자리에 들어선 ‘정무사(靖武祠)’였다. 정교(鄭喬)가 찬술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는 이 사당의 건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1885년 여름 4월, 정무사를 세우다]
이때에 이르러 정무사(靖武祠)를 세워 청국 흠차제독 오장경(淸國 欽差提督 吳長慶)을 제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조(詔)하여 가로되, “정무사가 지금 이미 준공되었으니 오흠차의 영령을 안치할 곳이 생겼도다. 그가 동래(東來)한 위공(偉功)을 어느 날인들 잊겠는가? 지난 일을 추념(�念)하니 나의 감회가 더욱 깊어지노라. 예조참판을 보내 치제(致祭)토록 하라” 하였다.
이곳에는 오장경의 위판 외에도 청나라 전몰병사(戰歿兵士)의 위판이 함께 설치되었고, 1893년에 이르러 통령 오조유(統領 吳兆有)도 이곳에 배향되었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정무사는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이 한참 가속화하던 통감부 시기에 접어들어 훼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1908년 7월 23일의 칙령 제50호「향사이정(享祀釐正)에 관한 건(件)」에 따라 무열사(武烈祠), 선무사(宣武祠), 정무사(靖武祠) 등 일체의 사당 제사는 철폐되고 그 터는 국유로 이속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성신문> 1908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청순금지(淸巡禁止)」 제하의 기사는 정무사를 철거하려는 시도와 이것이 무산되는 과정에 대한 소식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정무사(靖武祠)를 훼철하고 오장경 씨 위패(位牌)를 매안(埋安)할 차로 재작일(裁昨日)에 장례원 전사보 윤승구(掌禮院 典祀補 尹昇求) 씨가 고유제(告由祭)를 설행하였는데 청국 총순(淸國 總巡) 및 권임(權任) 각 1인씩과 순사(巡査) 3명이 내도(來到)하여 금지(禁止)하매 윤승구 씨가 언(言)하기를 “칙령(勅令)을 봉승(奉承)한 처지에 여시(如是) 금지하느냐” 한즉 해(該) 경리(警吏)가 답하여 왈(曰) “탐지(探知)할 도(道)가 유(有)한즉 기시간(幾時間)을 고의(姑依)하라” 하고 통감부(統監府)와 각국 총영사관(各國總領事館)에 교섭 탐지한 후에 갱래(更來) 발언하기를 “차등(此等) 사건을 행하려면 통감부 각국총영사에게 교섭하는 것인데 금내졸행(今乃卒行)하니 차(此)는 위조(僞造)라” 하고 일장 힐난(一場詰難)하였다는데 필경(畢竟)은 매안(埋安)도 못하고 해(該) 제관(祭官)은 달야곤경(達夜困境)을 경(經)하였다더라.
이 사건을 계기로 이곳에 대한 관리권은 청국 총영사관으로 이양되었고, 이때 주한총영사관으로 있던 마정량(馬廷亮)에 의해 중건되면서 그 명칭도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로 바뀌었다.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사당은 경성운동장의 동남쪽 모서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1979년 4월 30일에 한성화교중학(漢城華僑中學, 연희동 89-1번지) 구내로 옮겨진 상태에 있다.
해방 직후에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바뀌고, 다시 1984년에 잠실경기장의 완공과 더불어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동대문운동장’으로 개칭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나마 이러한 시기도 잠시 이곳은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철거논의가 두드러지게 되었고, 그 와중에 지난 2003년에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행되면서 인근 노점상을 위한 대체공간으로 용도폐기된 동대문구장을 활용하면서 느닷없이 이곳은 ‘풍물벼룩시장’과 ‘주차장’ 시설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 이후 옛 동대문운동장의 관련 시설 일체는 야간조명탑(나이터) 하나를 남기고 완전 철거되었으며, 이 자리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동대문역사관,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유구전시장, 이간수문 포함; 2009.10.27. 개장)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2014.3.21. 개장)가 들어선 상태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이간수문(二間水門)이 다시 드러나 원형을 되찾게 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리고 서울성벽이 지나던 곳도 간신히 그 흔적을 표시하는 정도로만 복원이 시도된 바 있다. 하지만 일제가 그들의 황태자가 결혼하는 것을 기념하고 동시에 조선신궁의 완공을 영구히 기리는 체육시설로서 경성운동장을 건립할 때에 언덕 하나를 완전히 들어내 버렸기 때문에 옛 서울도 성의 웅장한 모습을 재건하는 것은 당분간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 되고 말았으니 두고두고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