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마당]
중국에서 온 편지
김춘련 중국 거주, 후원회원, 양세봉 장군 동생 양시봉의 외손녀
지난 1월 9일 방학진 기획실장이 “효창독립커피에 양세봉 장군 커피를 만들고 싶다”는 문자와 함께 사이트를 보내왔다. 사이트를 열어보니 아이디가 참신하여 좋다고 답장을 보냈다.
며칠 후 “양세봉 장군의 직계 후손은 없지요?” 또 문자가 와서 양세봉 친손주 양철수가 이북에서 살고, 2014년 8월, 2018년 겨울 두 번 중국에 왔을 때 내가 만났던 적이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열흘이 지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구술 허은, 기록 변창애, 민족문제연구소) 표지와 “시집살이” 내용 넉 장을 위쳇으로 보내왔다. 방실장은 아무 말을 안 했지만 보내준 문장이 뜻이 있을 거 같아 꼼꼼히
봤다. 순간 열흘 전에 물어봤던 문자가 뇌리에 떠올랐다.
허은 여사님 글에 “왕청문에서 일본놈들이 끌어다 때려서 죽였단다. 죽이고 나서도 ‘저놈은 죽여도 그래도 죄가 남는다’면서 죽은 사람의 목을 또 잘랐단다. 그리고 그(양세봉)의 세살 된 어린애까지 데려다 죽이고…후손이 없어서 아직 유해는 못 찾은 거 같았다.”
양세봉은 1934년 8월 19일에 변절한 아동양의 총에 맞아 이튿날 새벽에 눈을 감았다. 당시일주일간 장례식을 지니고 25일 흑구산 기슭에 시신을 안장했다. 이튿날 일본 통화영사관분관에서 양세봉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용차에 일본군경을 가득 싣고 향수하자촌에 들이닥쳐 양세봉의 시신을 파내라고 위협했다. 흑구산 기슭에서 양세봉 시체를 파온 일경은 또 김도선에게 양세봉 목을 작두로 자르라고 호령했다. 그러나 김도선은 “우리 독립군 사령관의 목을 절대로 자를 수 없다”라고 완강히 거부하자 총을 쏘았다. 그리고 양세봉 머리를 작두로 잘라 조선의복에 싸서 통화사령관으로 가져가 통화, 산성진 등지에서 전시하였다. (조문기·정무, <양세봉> 278쪽)
허은 여사님이 “늦게까지 만주에 있다가 나온 분한테 들은 거”라고 했는데 잘못된 풍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때 함께 죽은 사람은 세 살된 어린애 양의준이 아니고 김도선이었다. 양의준은 1932년 5월, 청원현 소산성자에서 태어났다. 글에 나오는 시동생은 양세봉의 둘째 동생 양시봉이다. 양시봉과 양세봉 부인 윤재순이 수백리 길을 걸어 양세봉 부대를 찾아가 아들을 보여주었다. 양세봉은 그때 본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후에 그 아들은 이북에서 1957년 3월 15일 임무수행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희생되었다. 당시 나이는 26살이었고 직무는 정치부대대장이었다. (양철수,<계승> 11쪽) 양세봉 친손자 양철수는 1956년 2월 10일 조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라는 말도 떼기 전에 양세봉의 아들 양의준은 돌아갔고 한돌이 지나원인 모를 고열을 심하게 앓더니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영영 불구의 몸이 되었다. 양철수는 현재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 국가 1급작가이고 그의 대표작으로 아동문학창작집 <희망의
날개>, <계승>(2007.6)이 있다.
양세봉에게는 생전에 딸 둘, 아들 하나 있었다. 맏딸은 1920년 신빈현 금구자에서 태어났다.
“1931년, 양세봉 가족을 멸족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김씨성으로 고쳐 신빈현에서 청원현 소산성자에 이사 온 후 얼마 안 되어서의 일이었다. 단오날 양세봉의 맏딸 귀녀의 성화에 김화순이 두 살 난 자기 아이는 업고 12살 난 귀녀의 손을 잡고 거리에 나갔다가 일본놈의 폭격에 귀녀는 즉사했고 그녀도 피못에 쓰러졌다. 왼쪽 발목이 골절되었고 다리에 수많은 파편이 박혔다. 수개월동안 병상에 누워 생사박투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그때 입은 상처가 흐린 날이면 아픈데 파편이 박혀 있는 곳은 더욱 쏜다고 하였다.”(<요녕조선문보> 1998.5.28) 김화순은 돌아가실 때까지 그 파편이 다리에 있었다.
둘째딸은 1928년 5월 중국 신빈현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양의숙이다. 1917년에 중국 신빈현에 이사온 뒤부터 1946년까지 장장 28년간 양시봉, 김화순 부부가 양세봉 가족까지 12식구를 거느리고 수없이 이사 다니며 파란 많은 곡절과 시련을 겪었다. 양세봉의 둘째딸 양의 숙 부부가 중국 신빈현 왕청문 향수하자향에 묻혀있던 양세봉의 머리 없는 유해를 1961년 평양 근교에 안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가 1986년에 평양 열사릉원에 이장했다.
허은 여사님이 쓴 책과 특히 김동삼 손부 이해동님이 쓴 <만주생활77년>을 읽으면서 그분들이 겪은 고난의 생활이 어쩌면 나의 외할머니 김화순이 겪은 일과 너무나 비슷하여 구구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았다. 외할머니 생전에 나한테 들려줬던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한 유감이 컸다. 비록 고인이 되신 조문기, 유연산, 강룡권 등 분들이 외할머니 생전에 취재하고 글을 남기었지만 워낙 양세봉의 공이 크다
보니 양세봉 할아버지 사적만 기록으로 남겼을 뿐이었다. 그때 외할머니가 고생한 이야기도 많이 했을텐데 묵혀버린 것 같아 매우 아쉬웠다. 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다더니…
2021.2.1.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