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하다 붙잡힌 동포는 숨이 붙은 채 땅에 묻혔다
태평양전쟁에서 열세에 몰린 일제는 1944~1945년 조선인 군속(인부, 군부) 1만여명을 오키나와에 급히 배치했다. 당시 미군은 오키나와의 조선인 군속 포로를 ‘노예노동자(slave laborers)’라고 표기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조사·발표한 ‘오키나와 강제동원 조선인 희생자 피해실태'(책임연구원 김민영 군산대 교수) 자료에 따르면 오키나와 게라마 제도의 일본군 특설수상근무대에서는 1945년 3월 탈주 또는 식량을 훔쳤다는 이유로 13명의 조선인을 처형했다. 처형 지휘자인 오노다 조장은 “1926년식 권총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죽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이같은 실상을 알리기 위해 인천일보는 3월4일자 지면부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사장 김용덕)과 함께 오키나와에 ‘강제동원’ 되었던 경북 상주 출신 장윤만(1917~1963)씨의 수기 ‘태평양전쟁 실기집’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와 함께 김영선, 이인신, 이공석씨 등의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구술자료 등을 토대로 일본 북해도 탄광 감금생활, 남태평양 미래도의 조선인 살해 및 식인사건 전모, 남태평양 밀리환초의 조선인 반란사건 등도 잇달아 7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민족문제연구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료 지원도 받을 예정이다.
장윤만씨는 1944년 6월10일 경북 상주군 공성면에서 일제에 강제 징용되어 1년 동안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군속으로 동원됐다. 1945년 6월8일 미군에 체포됐고, 오키나와 포로수용소를 거쳐 1946년 11월20일 집으로 귀환했다.
그는 자신이 겪은 감금·학대·살육의 현장을 몰래 메모해 왔다. 그리고 귀향 후 병석에서 친동생인 장재달(당시 중학생)씨에게 자신이 두루마리에 적어온 수기를 일기와 3.4조 형식으로 정서하도록 했고, 1948년 2월 완성했다.
이 수기집은 딸 장현자(70·전 반도상사 노조위원장)씨 부부가 보관 중인 것을 국립민속박물관 안정윤 학예사가 발견,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다음은 장윤만씨의 ‘태평양 전쟁 실기집’ 본문의 주요 부분이다.
/글·정리 김신호 기자 kimsh58@incheonilbo.com
<2021-03-03>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