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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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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28일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내 여옥사 거울방에서 일제에 저항하다 수감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초상이 서로를 비추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제에 맞서는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없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시대 분위기 속에서도 직접 군인이 되거나, 남편과 자녀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한 여성들이 있었다. 국가는 이들의 헌신을 평가해 남편 뿐만 아니라 아내도 독립유공자로 인정했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몇몇 부부가 함께 안장돼 있다. 그러나 서울현충원의 홈페이지와 묘비에는 오직 남편의 공훈만 적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과 재조명이 주목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들의 공훈을 기리고 되새기는 작업은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달과 이달 두 차례에 걸쳐 서울현충원을 방문해 독립유공자 묘역을 살펴보고,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 등재 현황과 비교했다. 그 결과, 부부가 함께 안장된 경우 아내의 공훈 기록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와 묘비에서 누락돼 있었다.

서울현충원은 묘역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도 홈페이지에서 추모할 수 있는 사이버참배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독립유공자의 이름을 검색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공훈록 보기’ 코너가 있다. 그런데 서울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김학규-오광심’, ‘오광선-정정산(정현숙)’, ‘신건식-오건해’, ‘신송식-오희영’, ‘이회영-이은숙’ 부부의 경우 남편은 공훈록에 공훈이 등재돼있지만, 아내는 등재돼 있지 않았다. 같은 시기 독립운동을 함께 했는데도 아내는 어떤 활동을 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묘비도 마찬가지다. 통상 묘비의 뒷면과 측면에 안장된 사람의 이력을 기재한다. 현충원을 방문하는 시민들은 묘비를 보고 독립운동가의 이력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의 묘비 중에는 이력 기재가 빠진 경우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아내의 묘비는 상당수가 빠져있었다. 묘역 앞쪽엔 공훈의 내용을 발췌해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팻말이 세워져있는데, 공훈이 등재돼있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곳에도 소개될 수 없다.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엔 김학규-오광심 부부의 묘소가 있다(오른쪽). 하지만 남편인 김학규 지사와 달리 아내인 오광심 지사의 공훈은 서울현충원 홈페이지 공훈록에 등재돼 있지 않다. 이혜리 기자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 앞엔 공훈의 내용을 발췌해 시민들에게 알려주는 팻말이 있지만, 공훈이 등재돼있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는 이곳에도 소개될 수 없다. 묘역 앞에 비치된 안내서에도 일부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 이혜리 기자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엄연히 공훈과 관련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인물들이다.

오광심 지사는 1934년 조선혁명군 대표인 남편과 함께 만주에서 난징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했다. 1940년 여군복을 입고 한국광복군 창립식에 참가했다. 광복군 간부로서 오 지사는 선전활동과 함께 사병이 될 여성 청년을 모집했다.

“광복군은 남자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는 것이니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자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됨으로 우리의 혁명을 위하여, 광복군의 전도를 위하여, 우리 여성 자신의 권리와 임무를 위하여 광복군 대열에 용감히 참가하라.” 오 지사가 쓴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을 드림’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정정산 지사는 ‘독립군의 어머니’, ‘만주의 어머니’로 불린다. 1918년쯤 무장독립단체인 서로군정서 별동대장 및 경비대장으로 활동한 남편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뒤 독립군의 뒷바라지와 비밀 연락임무 등을 수행하며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35년 이후 난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지원했고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 일원으로 투쟁했다.

정 지사의 딸인 오희영 지사도 1940년 한국광복군에 여군으로 입대해 제3지대 간부로 활동했다. 오건해 지사는 한국혁명여성동맹과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자녀들을 보살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은숙 지사는 1910년 일제강점기 초기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남편 이회영을 직간접적으로 도우며 투신한 공적으로 훈장을 받았다.

이상은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에서 볼 수 있는 정보들이지만, 서울현충원 홈페이지의 공훈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서울현충원은 국방부 산하 기관이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2019년 6월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유치원생들이 직접 그린 태극기를 들고 애국지사 묘역을 걸어가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밖에 임시정부 요인 묘역 중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이었던 이상룡 선생의 아내 김우락 지사와,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이자 광복군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의 부인인 윤용자 지사의 공훈이 공훈록과 묘역 안내서에서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을 포함해 일부 여성 독립운동가는 정부가 최근에서야 발굴해 훈장을 줬지만, 일부는 유공자로 인정된 지 수십년 된 사례도 있다.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국가유공자인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태영 박사도 공훈록에서 검색이 되지 않았다. 반면 남편인 정일형 박사는 공훈록에서 검색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차례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발굴과 재조명을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 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며 “(그럼에도) 여성의 독립운동은 깊숙이 묻혀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여성과 남성, 역할을 떠나 어떤 차별도 없이 독립운동의 역사를 발굴해낼 것”이라고 했다.

한국 근현대사가 응축돼있는 서울현충원은 추모의 공간이면서도 교육의 공간이다. 여성 독립운동가들 묘소를 중심으로 ‘여성길’을 만들어 시민교육에 활용하고 있는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애국이라는 것이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데 현충원이 거의 남성들로 채워져있고, 여성들은 별로 없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운영돼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애초에 아내의 경우엔 독립운동의 한 주체로 국가가 인정을 잘 하지 않았고 남편이 인정되면 딸려서 함께 안장되는 형태였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여성 독립운동가들이 뒤늦게 발굴되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되는 사례가 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훈록이나 묘비에 이력이 정확히 안내되지 않고 있는 것은 문제”라고 했다.

3월 현재 기준 독립유공자 총 1만6685명 중 여성은 526명(3.15%)이다. 서울현충원 측은 “지적한 부분을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2021-03-10> 경향신문 

☞기사원문: 독립운동가 부부 함께 안장됐는데, 공훈록·묘비에서 사라진 ‘여성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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