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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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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제1묘역의 문용채와 최석용이 독립운동가였다고?

최근 제주 4.3 사건 73주년을 앞두고 제주 4.3 사건 당시 체포돼 육지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6.25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실종된 335명에 대한 재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왜곡된 역사 하나를 바로잡는 순간이었다.

제주 4.3 사건의 역사는 서울 동작동에 있는 국립서울현충원에도 서려 있다. 기자는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4.3길’을 걸으며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주 4.3 사건의 아픔을 되돌아본 바 있다. 이때 미처 다루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국립서울현충원 ‘4.3길’을 보충하는 뜻도 담아 두 명의 장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의 장군 제1묘역에는 제주 4·3 사건과 관련된 인사로 이미 동작민주올레 시즌1에서 소개한 ‘제주의 의인’ 김익열 장군(관련 기사: 제주와 대화한 군인, 민간인을 짓밟은 군인)말고도 사건 당시 경찰과 군인 간부로 가해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 넷의 묘가 더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경찰서 서장이었던 문용채(1916~1976, 제1장군-72)와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 경무부 공안국장이었던 김정호(1909~1970, 제1장군-39), 이승만 정부의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1910~1950)과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이었던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친일행위를 한 인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 중 경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문용채와 군 간부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최석용의 묘비명엔 그동안 알려져 있지 않았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는 만주국군 출신의 문용채

▲ 문용채의 묘 문용채는 만주국군 헌병 상위에 오른 인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 그는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도 경찰간부였다. ⓒ 김학규

문용채는 1937년 봉천군관학교를 제5기로 졸업했다. 김백일(김찬규), 김석범, 김홍준, 송석하, 신현준(신봉균) 등 5명의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가 그의 동기다. 문용채는 만주국군 헌병 소위로 임관한 후 일제 말 헌병 상위로 진급해 평천헌병대 대대장까지 지냈다.

문용채가 정부 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에서 제외된 이유는 위 5명의 동료와 달리 간도특설대에 입대하지 않고 헌병으로 진로가 잡힌 덕분이었다.

경찰 간부로서 제주 4.3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문용채

문용채는 해방 이후 경찰이 돼 제주감찰청 수사과장을 거쳐 1947년 9월부터는 제1구경찰서장이 됐다. 문용채는 경찰 간부로 제주에 부임하면서 자연스럽게 제주 4.3 사건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문용채가 경찰이 된 사연은 해방 직후 우리의 실상을 반영한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만주에서 서둘러 귀국한 문용채는 군사영어학교를 나와 남조선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지만, 경비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사표를 내고 경찰로 전직했다.

문용채와 마찬가지로 만주국군 헌병 상위였다가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정일권에 따르면 문용채는 청주 7연대의 A중대장과 춘천 8연대의 A중대장에 연이어 임명됐으나, 두 차례 연속으로 먼저 온 장교들이 중대편성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고수하고 있어 부임하지 못했다고 한다.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문용채는 사표를 내고 경찰로 전직했다고 한다. 정일권은 이를 “초창기 인사관리의 허점”으로 설명했다.

문용채가 제1구경찰서장에 취임한 직후 “경민 협조로 민주경찰 건설에 노력”하겠다면서 밝힌 아래와 같은 포부는 그가 제주 4.3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접근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도민 여러분은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하야 항거의 태도를 취하지 말고 이해 깊은 협조만이 민주경찰을 완성시키는 근본적 요소인 만큼 도민 각자는 안심하야 직장 봉공에 노력하야 주기를 바란다. 끝으로 본도 경찰관들이 애국심에 불타는 정열과 책임감 그리고 날로 증진되어 가는 태도율(態度率)에 대하야 깊은 감명을 느끼고 마지않는 바이다.”(<제주신보>, ‘경민 협조로 민주경찰 건설 노력-1구서장 문용채씨 신임 포부담’, 1947. 10. 10.)

문용채는 민주경찰의 완성을 위해 제주도민들에게 ‘무조건 경찰을 신뢰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한 반면, 1947년 3.1 발포 사건 이후 응원군까지 동원해 탄압을 강화해온 경찰에 대해선 감명을 느낀다며 되레 응원했다.

문용채는 4.3 봉기 초기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열과 4.3 봉기를 이끈 남로당의 김달삼 간에 이뤄진 4.28 평화협상안의 실현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5월 1일의 오라리 방화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오라리 방화사건은 봉기군이 벌인 방화와 학살극으로 알려졌지만, 경찰과 우익 청년단이 평화협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

문용채는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하는’ 경찰 트럭에 동승해 취재를 허가받은 <동아일보>의 정선수 기자에게 “만약을 위하여…”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권총을 빌려주면서까지 사건이 경찰의 의도에 맞게 언론에 보도되기를 희망했다. <동아일보>는 오라리 방화사건에 대해 백여 명의 폭도가 “무고한 노동자 농민을 몰아세우고 노동자 농민 자신들의 집을 불살라 버리고 노동자를 학살하고 노동자 농민의 가정을 파괴한 것”이라고 하여 경찰의 희망을 충실히 따르는 보도로 응답했다(<동아일보>, ‘제주도폭동현지답사 – 정선수 본사특파원 발’, 1948. 5. 9.)

경찰의 방해공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오라리 방화사건이 있은 지 이틀 후인 5월 3일 무장해제한 ‘귀순자’를 미군 병사와 9연대가 함께 수용소로 호송하던 중, 무장경찰 50여 명이 기습적으로 총을 난사하여 ‘귀순자’ 일부가 사망하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 간에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맨스필드 군정장관은 제주경찰서장을 군정본부로 소환하여 문책했는데, 김익열은 이때 문용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문용채 서장은 도망하여온 부하들에게 들어서 사건의 진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므로 당황하여 대답을 못하였다. 조사하여 내일 보고하겠다고 하고 부상자와 중기관총을 인수하여 돌아갔다.”(김익열, 실록유고 <4.3의 진실>, 1988)

물론 이 사건으로 문용채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문용채는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재입교해 특별임관한 후 1952년 경남병사구사령관을 지낸 뒤 1959년 군대 안에서 정군 바람이 불 때 준장으로 예편당했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것은 자유?

▲ 문용채의 묘비명 문묭채의 묘비명은 친일파 문용채가 마치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김학규

장군 제1묘역에 있는 문용채의 묘비명을 보면 그가 경찰로 제주 4.3 사건에 개입했던 이력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문용채의 묘비명에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장군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중국에 망명하여 봉천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하셨고 해방 후에는 창군에 공헌 군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셨다.”

문용채는 국립서울현충원을 친일파가 독립군으로 변신하는 일을 돕는 ‘세탁소’쯤으로 여겼던 걸까? 문용채가 자신의 만주 ‘진출’을 중국에 ‘망명’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나 보다 하고 일단 넘어가자. 그렇더라도 문용채가 졸업한 봉천군관학교(중앙육군훈련처)를 존재하지도 않았던 봉천육군사관학교라고 과장한 것도 모자라, 만주국군 헌병 장교로 근무한 것을 “조국 광복을 위해 투쟁”했다고 새겨 넣은 것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짓이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는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하는 일이 이렇듯 쉽게 이뤄지고 있었던 것.

최석용이 한검추(최주봉)이었을 줄이야!
– 독립운동가에서 변절자로, 그리고 제주 4.3 사건에 개입한 학살자로!

▲ 최석용의 묘 최석용은 한 때 조선혁명군의 1사 사령을 맡기도 하는 등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의 선봉에 섰던 한검추(최주봉)였다. 하지만 그는 1936년 말 일제에 투항하여 변절한 이래 항일무장투쟁 대오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 김학규

‘신분 세탁’이 성공한 탓일까? 장군 제1묘역에 안장돼 있는 최석용(1903~1974, 제1장군-60)은 정부공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긴커녕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돼 있지 않다.

최석용은 1928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 만주에서 맹위를 떨친 조선혁명군(총사령 양세봉)의 1군 사령까지 맡았던 유명한 한검추(최주봉)였다. 이는 최석용의 묘비 앞면 아래에 새겨진 묘비명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한검추는 1935년 중-한 항일동맹회를 결성해 대일 공동전선을 펼칠 때 총사령을 맡기도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의 압박이 강화되자 1936년 말 조선혁명군 대오 70여 명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이후 변절해 정빈, 윤하태와 더불어 동북항일연군 파괴에 앞장섰다. 중국의 전설적인 항일혁명가인 동북항일연군 1로군 군장 양정위와 그를 지키던 조선혁명군 출신 최윤구를 전사케 하면서 동북항일연군을 사실상 궤멸시키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 바로 최석용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 귀국한 최석용은 1947년 1월 김창룡, 문상길, 김지회, 홍순석 등과 함께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3기)에 입학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1949년부터는 2연대(연대장 함병선) 소속 대대장으로 서북청년회를 지휘하면서 초토화 작전의 선두에 서서 제주도민 학살에 앞장섰다.

최석용의 ‘신분 세탁’을 도운 국립서울현충원

그런데 최석용의 묘비명을 찬찬히 살펴보면 심각한 역사왜곡과 함께 최석용의 신분 세탁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뤄졌는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묘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03년 1월 28일 평북 벽동에서 태어나 19세의 어린나이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와 중국일대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몸바치기 시작하였나이다. 이국만리 타국땅에서 집도 한칸없이 한검추 최주봉 등 이름으로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하였나이다.

1947년 육사 3기생으로 창군에 선봉이 되여 봉사하기를 도한 10여성상 주요 부대의 창설과 육성을 하시며 많은 공훈을 남기시고 도라가셨나이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 후세에 영원토록 빛날것이오니 안심하시고 잠드시옵소서.”

묘비명에서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했다고 한 부분은 최석용이 1936년 말 일제에 투항해 변절한 이후 일제에 협조한 사실을 교묘하게 숨기는 역할을 한다. “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쓰던 고귀하신 유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 대목 역시 국립서울현충원이 친일인사들의 ‘신분 세탁’을 돕는 공간 역할을 해왔음을 고발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을 뿐이다.

▲ 최석용의 묘비명 최석용의 묘비명은 일제에 변절한 최석용의 역사를 철저히 숨기는 신분 세탁을 성공적으로 일구어내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하여 최석용의 이름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 김학규

국립서울현충원, 문용채·최석용 묘비명이라도 교체해야

장군 제1묘역의 문용채와 최석용의 사례는 일제강점기 자신들이 한 친일행위를 철저히 숨기는 방식으로 역사왜곡을 한 다른 인물들과 다르다. 이들은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했다거나 “20여성상을 항일타가 해방되여 귀국”했다면서 국립묘지에서 독립운동가로의 신분 세탁을 과감하게 벌였다. 대단히 충격적이다.

이러한 묘비명이 어떻게 국가기관인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새겨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도 필요해 보인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비문 전면의 ‘독립광복을 위하여 투쟁’ 내용 등은 당시 유족이 신청한 내용을 근거로 설치했다”면서 “동 기록의 정정이 필요한 경우에는 유가족과의 협의 및 자문 등을 통해 수정 보완 조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바뀌어야 할 게 한둘이 아니다.

김학규(hkkim21)

<2021-03-21>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만주 장교가 ‘광복투쟁’? 현충원 속 기막힌 신분세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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