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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스타의 추억 한 토막(2)
임헌영 소장•문학평론가
이 글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관지 <기억과 전망> 43호(2021)에 실린 글로 세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임헌영 소장은 1974년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는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문인간첩단 사건 당시 ‘빙고호텔’(육군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의 끔찍한 고문의 과정, 서대문 귀소에서의 생활, 재판 진행과정, 석방 후 요시찰 인물로 살아야 했던 이야기 등이 담겼다. ― 편집자주
4. 국립서대문대학
빙고동 호텔에서 원 스타가 된 우리 다섯 별들은 그 계급에 걸맞게 따로따로 지프차로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1월 25일 서대문구치소로 이송, 수감 당했다. 이 날은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세 가지 추억이 겹쳐져 있다. 내가 등 따시고 배부른 편안한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 두고 상경한 날(1961.1.25.)이자, 맏아들의 생일(1972)인데, 여기에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서대문구치소로 넘어간 날이 추가되었다.
이 대학 면접은 까다로웠다. 이미 밤이 저물어 각 경찰서에서 보낸 일반수들은 다 입방해버린 뒤여서 덩그런 넓은 방에는 몇몇 교도관들이 난로 가에서 한담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 대뜸 일반사범이 아님을 알아보고는 직업을 묻기에 대학 강의도 하고 글도 쓴다니까 무슨 과 교수냐기에 국문과랬더니 “보나마나 민족문화예술이 어떻고 하다가 들어왔겠군요!”하고는 “안 됐구만요. 몸이나 조심하시오. 여기선 건강이 제일이니…”라고 하자 요시찰 담당 교도관이 나타나 “잡담 하지 마시오! 따라오시오!”라고 윽박질렀다. 널직한 방에 죄수는 나 혼자였다.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나를 홀랑 벗겨 옷과 소지품 일체를 압수해 버리더니 귓구멍, 입구멍, 똥구멍 등등 구멍이란 구멍은 다 들여다보며 거기 뭘 숨기지 않았나 검사하고는 푸른 수의를 던져 주었다. 플라스틱제 밥그릇과 국그릇, 숟가락에다 대나무 젓가락, 검정 고무신, 수인 번호표(152번)를 주더니 따라 오라며 감방으로 향했다. 닫혀진 철문을 몇갠가 열고는 긴 복도를 지나 멈췄다. 문 위에 ‘5사 하 8방’이란 큰 글자가 보였다. 담당 교도관이 문을 열어주고는 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꽝 소리 나게 잠궈 버렸다.
원래 독방이 아니라 여럿을 함께 수감하는 곳이라 좁진 않았다. 변기통이 방 안에 있는 구조가 아니라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엮은 형식적인 문을 열고 별도로 화장실이 있었다. 나중 알고보니 제1관구는 다 이랬으나, 다른 관구(전체가 5관구에 여자막사로 구성)에는 변기통이 방안에 버젓이 놓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찬 시멘트 위에 마루를 깔아 거기에 가마니거적을 덮어 바닥을 만들었다. 회벽에는 온갖 낙서들로 그득했고, 천정은 아득하게 높은 데다 창문은 유리 대신 찢어진 비닐이 엉성하게 붙어 있어 겨울바람에 펄럭이면서 동장군의 위력을 그대로 드러냈다. 원래는 유리창이었으나 누군가가 그걸 깨트려 목을 찔러 자살한 뒤부터 비닐로 바꿨다고 했다. 히터도 있었으나 그 흔적도 없다. 수의복에는 허리띠가 없었다. 누군가가 허리띠로 목을 졸라 자살한 뒤부터 없앴다고 한다. 이불은 꼬질꼬질한 솜뭉치들이 한쪽으로 내 몰린 데다 축축하며 얇았다. 그 추위에도 이(虱)들은 감기도 안 걸리고 전신을 공격해댔다.
빙고동 호텔에서 워낙 시달리면서 제대로 잠 한술 못잔 터라 그 지긋지긋함에서 풀려난 통쾌함이 비록 구차하지만 감방이 너무나 좋았다. 누워서 출입문을 쳐다보니 그 위에 ‘NATIONAL 5 下HOTEL“이라고 반듯한 정자로 쓰여 있었다. 그래, 맘먹기에 달렸지, 이 국립호텔에서 모처럼단잠을 실컷 잘 수 있었다. 차르 치하의 러시아 혁명가들이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는 그 순간에 고통은 끝난다는 옥중기 구절이 생각났다. 그만큼 수사기관은 지긋지긋하다.
이튿날 새벽, 기상나팔 소리에 일어나니 복도로 수감자들이 수시로 우우 몰려 어디론가 오갔다. 알고 보니 세면 시간이라 방마다 문을 열어줘서 세면장엘 들락거렸다. 누가 “형, 왜 여기 왔어?”라기에 보니 이재오였다. 그는 얼른 빠르게 “형, 내가 필요한 것 다 보낼 테니 걱정 마세요.” 하고는, 자기는 내 방과 멀리 떨어져 있고, 바로 내 옆방에 노동운동 연구가이자 통일운동가인 김낙중의 공범 노중선(현 <통일뉴스> 상임고문)이 있으니 뭐든 필요하면 말하라고 소개했다. 이재오는 당시 일본 유학생 간노 히로오미(당시 서울대 유학 중. 나중 도쿄외대 교수)가 북의 주체사상을 소개한 <철학사전>을 갖다 주기에 보다가 들켜 투옥 중이었다. 김낙중 사건은 요란했다. 그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총간사였다. 연구소 소장은 김윤환 교수, 실장은 권두영 박사, 총간사 김낙중, 노중선은 간사였다. 노중선은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하게 당했다. 최근 이 사건의 희생자였던 권재혁의 억울한 처형을 다룬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가 1969년 조작간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때(11.4) 불과 7살이었던 그의 영애 탤런트 권재희가 현대사학자이자 민주통일 연구자인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와 결혼하게 되면서 이 사건의 허위성이 낱낱이 드러났다.
해방전략단 사건은 이일재, 이강복, 이형락, 노정훈, 김봉규, 박점출, 조현창, 김병권, 오시황, 나경일, 김판홍, 노중선 등 13명인데, 중앙정보부가 맡았다. 그러니 내가 1974년 노중선을 만났을 때는 고려대 간첩단 사건이란 죄명으로 두 번째로 고생 중이었다. 내가 먼저 석방된 후에 그는 모친상을 당했는데, 뒤이어 출소한 이재오와 함께 공주 오지 마을을 한밤중까지 헤매다가 간신히 찾아가 아들 대신 조의를 표했던 일이 엊그제 같다.
이렇게 국립호텔에서 며칠을 지내자 바로 발가락부터 동상에 걸렸다. 그걸 바늘로 찔러 검붉은 피를 짜내자 너무나 시원했지만, 지금도 그 발가락은 조금만 방심하면 무좀에 걸리곤 한다.아리스토텔레스는 근엄한 대 귀족답게 카타르시스를 너무나 고상하게 언급하여 문학청년 시절에 이를 이해하려고 무던히도 끙끙댄 적이 있었다.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의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아리스토텔레스, 천병희 역, <시학>, 문예출판사, 1991. 47쪽)
그 카타르시스가 생리적인 정화(purgation)와 종교적인 정화(Purification)를 포괄하는 것인지 어떤지,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어떤 체험에서 이런 이론을 도출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비극은 전혀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극론을 보면 그는 아무래도 별로 비극적인 체험을 못한 것 같다.
나에게 비극은 진지하지도, 완결된 행동의 모방으로도, 쾌적한 장식의 언어로도 설명될 수 없는 지저분한 잡문형식으로 다가왔다. 귀족이 될 수 없는 인간에겐 비극조차도 삼류 신파처럼 다가서는가. 나에게는 차라리 헤겔적인 비극이 더 살갑게 느껴졌다.
남편, 부모, 자녀, 형제 같은 가족에 대한 사랑, 국가적인 삶, 시민들의 애국심, 지배자의 의지, 더 나아가 교회에 나가면서도 신앙행위는 거부한 채 경건함만 지니고 있거나, 행동하더라도 선악을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신앙에 따라 구분하지 않고 반대로 실제적인 관심사나 상황에 따라서 행동함으로써 진행된다.(헤겔, 두행숙 옮김, <<헤겔 미학>>, 3권, 나남출판, 1998. 682쪽)
지극히 시민적이고 현실적인 이 비극의 범주. 특히 “지배자의 의지”란 단어에 초점이 간다. 한 인간, 독재자의 의지에 따라 역사는 얼마나 많은 범죄와 불행이 저질러졌던가. 서울의 우울을 상징했던 현저동 101번지는 조선시대에 전옥서(典獄署)였다가 감옥서(監獄署)로 바뀐(1895) 뒤, 일제에 의하여 사실상 법 집행권을 약탈(1906, 조선통감부 설치)당한 후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이란 명칭 아래 독립 운동가들을 수감시킬 목적으로 지어진 곳(1908.10.21. 개소)이다. 민족사적 수난의 상징인 경성감옥은 서대문형무소(1923), 경성형무소(1946), 서울형무소(1950), 서울교도소(1961), 서울구치소(1967)로 첩보원처럼 변성명을 거듭하다가 1987년 11월 15일 의왕으로 이전함으로 써 대부분의 건물이 허물어지고 지금은 우아하게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 개관)이란 명칭으로 몇 동만 남아있다. 한반도 형무소의 맏형 역할을 했던 이 설움과 신음과 한이 서린, 그래서 저주와 축복이 공존하는 현저동 101번지. 판옵티콘의 감시체제에 맞춰 지은 이 옥사(獄舍)는 2층인데, 몇몇 관구만 빼고는 각 층마다 복도를 가운데 두고 좌우로 감방을 마주 볼 수 있게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위층 복도 한가운데에서 보면 아래층까지 다 감시할 수 있다. 이와 비슷한 판옵티콘 시설로는 격벽장(隔壁場)식 운동장 구조가 있다. 원형 운동장의 한 가운데에다 감시대를 설치해 두고는 방사형으로 여러 칸을 나눠 담을 쌓아두었기 때문에 감시자 혼자서 운동장 전체를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든 장치다. 이 시설을 원형 그대로 보관했다면 실로 세계적인 명물로 유네스코 문화유산 목록에 오르고도 남을 아까운 유적이었건만 이를 허물어버린 군부독재나, 그런 야만적인 조치를 막지 못한 민주세력의 역량을 생각하면 마냥 울화통이 치민다. 지금도 그 일대 독립공원엘 갈 때마다 입구 보도에다 이 시설을 훼손한 자들의 동판이라도 깔아두고 짓밟고 지나가도록 했으면 하는 울적한 심정이다.
서대문형무소 옥사 내부 모습과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정문
방마다에는 사상, 정치, 경제 사범(事犯)부터 국민재산 이동관리법 위반(절, 강도 등 모든 도둑 통칭) 혹은 뚜룩재비(도둑질 통칭), 접시돌리기(사기범), 뽕쟁이(마약사범), 물총강도(간통범) 등으로 언제나 만원이었다. 가장 다양한 뚜룩재비에는 퍽치기(노상강도), 월담(주거 침입 절강도), 아리랑치기(취객들의 주머니 털기), 쓰리(소매치기, 일어 すり, 掏摸 掏児에서 유래) 등등으로 전공분야가 나눠지는데, 손동작만으로 그 장르를 표시하기 일쑤다. 예를 들면 소매치기는 엄지와 식지 끝으로 무슨 물건을 잡아 뽑듯이 하고, 월담은 왼손바닥에다 오른손바닥을 갖다 붙이고는 오른손가락을 밑으로 꺾어 담을 넘어가는 시늉으로 나타낸다. 현저동 101번지에서의 만고불변의 유일신은 “오리발이 청와대 빽보다 낫다.”는 범죄 부인 술책이다. 그래서 어떤 고귀한 신분이라도 여기서는 다 접시돌리기에 익숙해져 오리발을 여럿 지니게 된다. 1916년 경 세워졌다는 사형 집행장의 입구에는 미루나무가 이젠 역사의 증언을 다 했다는 듯이 한유를 즐기고 있다. 수명이 60-80년인데, 사형장과 비슷한 시기에 심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니 이미 천수를 한참 넘겼다. 이 형장에서 사라져 간 생령들은 얼추 2백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들은 예외 없이 형장 입구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 미루나무를 쳐다보곤 하늘과 땅을 한 번씩 바라봤다고 한다. 그리고는 사형장에서 관리들에게 본인 여부 확인 절차와 유언, 종교인이면 간략한 약식 절차를 마치고는 바로 교수대에 목을 맡겼을 터이다.
교수대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실, 거기서 담가에 실려 밖으로 나가면 바로 시구문(屍軀門, 시신을 내보내는 통로)의 입구다. 그 터널 같은 지하도로 형무소 담장을 넘어 샛길로 나가면 이내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18개월간 묻혔다가 연고자가 안 나타나면 화장해버렸다. 이곳을 찾으시면 잊지 말고 그 형장을 찬찬히 보노라면 인생관이 달라질 것이다. 아니, 지금 내가 이 국립호텔을 낙원인 듯이 그릴 처지인가. 내 육신의 고통보다 밖의 식구들이 당할 괴로움이 오히려 더 가슴을 후볐다. 빈 방, 아무 것도 없었다. 읽을 생각도 없었지만 읽을거리도 주지 않았다. 면회도 도서 차입도 접견도 일체 금지된 밀봉상태였다. ‘인권’이란 단어가 맥을 못 추던 유신독재 아닌가.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인간이 고통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게 뭘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읽었던 많은 책들, 아름다웠던 장면과 슬픈 장면을 다 떠올렸으나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목사 한 분이 내 방을 들여다보더니 “당신, 평양에서 왔소?” 라고 홍두깨 같은 화두를 던졌다. 그때는 반공법 위반자의 문 위에는 빨간 딱지를 붙여서 일반수와 엄격히 구분, 차단했다. 나는 얼른 “예, 평양에서 왔시다.” 했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횡하니 다른 방으로 가버렸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구하려고 구치소를 찾았을 목사가 정작 길 잃은 목동을 팽개치다니 순 돌팔이 아닌가. 소내 방송은 유신과 박정희를 찬양하며 새마을 노래들을 연신 틀어댔다. 아직은 긴장이 끝난 게 아니었다. 이제 검찰 심문이 남아 있었다. 수사기관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 요약하는 게 당시 검찰 풍조였던 터라 너무나 긴장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그 반응이 나타났다. 쉽게 죄명을 뒤집어씌울 수 없게 되자 새로운 위협이 뒤따랐다.
5. 검취, 그리고 변호사
검찰은 나를 검찰청의 검사실로 소환 않고 검사가 직접 구치소로 찾아와 심문을 진행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아주 막나갔다. 이 새끼 거짓말 하면 그냥 안 둬, 라더니 누가 뭐 일본 가서 오입한 이야기나 듣자고 부른 줄 아나 하기에 나는 대뜸 그런 건 하지도 않았다 하자, “이 새끼, 그러니까 빨갱이잖아!” 이런 식이었다. 그는 혼잣말로 다른 놈보다 좀 뻣뻣한데, 하더니 제 뜻대로 안되자 교도관에게 데리고 들어가, 해서 감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중에 단잠을 깨워 구치소 보안과장실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낯익은 보안사 요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나를 빙 둘러싸고서 왜 검찰 심문에서 순순히 말하지 않았느냐며 팔다리 하나 부러지고 싶으냐고 노골적으로 위협했다. 정말 안 들으면 다시 보안사로 데려 가겠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밤에 정말로 그곳으로 다시 연행해 갔다. 그 심야의 드라이브 –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텅 빈 거리를 질주해 가서 온갖 위협에 시달리다가 다시 구치소로 되돌려지기까지의 과정은 심장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그런 가운데 나를 맡았던 정든 수사관은 남의 귀를 피하여 슬쩍 귀띔했다. “잘했어! 그러나 1심 받을 생각은 해야지. 일단 억지로라도 타라는 열차를 타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생각을 해야지, 달리는 차에서 뛰어 내리면 다쳐요. 깡그리 부정하면 빙고동으로 다시 가서 병신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병인지 약인지 모를 충고를 해줬다. 인권이니 접견권, 변호권 같은 단어도 없던 시절이라 독방에 갇힌 채 책 한 권도 볼 수 없는데다 가족은 물론이고 변호사 접견도 불가능해서 오히려 밖에서 얼마나 염려할까가 더 큰 걱정이었다. 그나마 나는 노중선과 이재오에게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문인간첩단사건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
그러던 어느 날 밤 중. 나는 두 번째로 호출 하더니 보안사 요원들이 또 차에 태웠다. 순간, 나는 완전히 얼어버렸다. 아, 이번엔 크게 다치겠구나 라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빙고호텔 2층의 널찍한 방에다 푹신한 침대도 있는 특실이었다. 공작과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모 대령이 등장, 귤과 바나나와 사과를 정갈하게 담은 접시를 갖다 놓고는 아주 신사적으로 권하며 나를 슬슬 구슬렸다. 한 마디로 나라를 위해 죄를 뒤집어쓰라는 것이다. 옆방에서는 단말마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시달리다가 다시 감방으로 돌아오자 착잡했다. 이 삼엄한 시대, 변호사조차 검사와 수사기관의 눈치를 봐야했던 시절에 구치소 소장실 옆 부속실에서 검취(검사 취조)를 당하고 있던 방으로 불쑥 예고도 없이 용감하게 한승헌(전 감사원장) 변호사가 들이닥치자 나보다 정작 더 놀란 건 검사였다. “어,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라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지 곤혹스러워 하는 판에 뒤이어 권순영 변호사도 들어섰다. 두 변호사는 검찰 조사때 검사실로 막무가내로 들이 닥칠 예정이었는데, 검사가 구치소로 출장 나갔다기에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한 변호사는 워낙 고명하기에 구태여 여기서 소개할 필요도 없겠고, 권 변호사는 1955년 전후 한국판 카사노바로 유명했던 박인수에게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라며 무죄선고를 내린 판사였음을 상기해 주기 바란다. 해병 헌병 대위였던 박인수는 약혼녀가 배신코 어느 대령과 결혼해 버리자 실의에 빠져 군기를 위반, 불명예제대 후 현역으로 행세하며 1년여 동안 70여 여인들(미용사 하나만 처녀였다고 증언)과 놀아난 1950년대의 댄스 붐 시절의 첫 제비였다. 고관이나 상류층 출신녀들은 당하고도 입을 다물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이 터지고도 쉬쉬해서 더욱 화재가 되자 권순영 판사는 “E여대가 박인수의 처가”라느니, 장가가려면 ‘박인수 리스트’를 미리 점검하라는 등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1심에서 풀려난 박인수는 여론에 밀려 항소심(김세완, 김홍섭, 임항준 판사)에서는 “아무리 혼란한 사회상황 아래서라 해도 그 여성들의 정조가 법의 보호권 밖에 있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로 1년 6월 실형을 받았지만 모범수로 1년 만에 출옥했다. 권 변호사는 1962년에 “고의적인 살인범은 사형에 처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윤형중 신부의 글 <처형대의 진실>에 대하여 현직 판사(서울지법 소년부 지원장)로서 반론을 펴서 사형폐지론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한승헌 변호사는 대뜸 나를 향해 “어디 팔다리는 성합니까?”라고 물어 오랜만에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밖에서는 혹 병신 된 게 아니냐고들 걱정한다고 전해줬다. 나는 한 변호사에게 내 건강을 입증하고자 일어나 걸으며 팔 다리도 마구 흔들자 적이 안심하는 표정이었다. 검찰로 소환당해 취조 중에 어느 법조출입 기자가 불쑥 등장해 문인간첩단 사건을 거론하며 슬며시 “기자촌 우리 옆집 분도 있다던데….” 라고 해서 내가 얼른 “바로 납니다.”고 말을 붙였다. 동아일보의 김재곤 기자였다. 나를 관찰하고자 일부러 탐색하러 온 것이었다. 출소해서 들으니 그는 얼른 자기 집으로 연락해서 내가 병신 안 되고 잘 있다고 우리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뒤부터 검사의 자세가 영판 달라지기 시작했다. 담배도 권하며, 자기 검사 생활 중 “이런 거지같은 간첩 사건은 처음”이라며, 아니, “진짜 거지 간첩을 잡기도 했다”고도 했다. 하도 사건이 이상해서 검찰은 좀처럼 그렇게 하지 않던 보안사의 ‘공작일지’까지 보여 달라고도 했다는 귀띔도 했다. 그러더니 “혹시 엘리베이터라도 탔나?”라기에 안 탔다니까 “그럼 아닌 걸 아니라고 했나?” 라기에 그랬다니까 그럼 왜 조서가 이러냐는 등등의 선문 답이 오가기도 했다.
감방 안에도 소식은 스며든다. 신문은 우리에게 ‘문인간첩단’으로 대서특필했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개헌서명을 한 이호철과 나는 ‘간첩’이고, 김우종・정을병・장백일은 반공법 위반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검찰이 보안사에서 뒤집어씌운 무리한 죄명인 ‘간첩’죄를 떼어내고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으로만 기소하기로 굳혔다는 점이다. 물론 따지고 보면 이것조차 말이 안 되는 완전무결한 무죄여야 하지만 이나마도 대단한 용기였지 않았나 싶다. 나에게 들씌워진 죄명은 국가보안법 5조2항(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로부터 그 정을 알고 금품을 수수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11조(자격 정지 병행), 12조(금품 수수액 또는 보수의 몰수 및 압수물품의 국고 귀속), 반공법 4조1항(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러한 행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도 같다), 5조1항(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 통신죄), 7조(편의 제공) 등이었다. 이렇게 법조문을 들고 보면 어머어마한 죄라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한양>지에 다른 문인들처럼 글 써주고 원고료 받았으며, 일본 여행 중 식사와 술 몇 번 얻어먹고, 길 안내 몇 번 받은 것이 전부였다. 굳이 따진다면 박 정권 비판 대화가 오간 게 괘씸죄라면 될까.
6. 고통 속의 유미주의적 체험
한참을 지난 어느 날 한 인심 좋은 교도관이 갑갑할 터이니 이거라도 하면서 넣어준 게 <신약성서>였다. 학창 시절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하려고 띄엄띄엄 읽었던 터지만 워낙 눈이 궁하던차라 어느 대목을 보면 마음이 평온하게 될까 궁리하다가 예수의 처형 장면을 찾아보기로 했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론을 실험해보려는 속셈이었다. 그 고상한 이론을 한국의 한 평론가가 겨울 감방에서 천박하게 생존전략으로 써먹어보자는 것이다. 나보다 더 비참한 사실(비극)을 보노라면 나는 위로받을 것인즉 그건 연민과 공포만으로는 해결 안 되는 뭔가가 있겠지. 그래, 예수의 죽음 장면을 찾아보기로 했다. 기억을 되살려 당장 <마태복음>부터 찾아나갔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다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중략)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마태복음> 7;28-36)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중략)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희롱을 다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중략)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에 이르러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마가복음> 15;17-24)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오지만 그 묘사력에서 이 둘에 뒤진다. 세계 4대 성인 중 불행한 최후를 마친 건 소크라테스와 예수인데, 일찍이 나에게 보다 큰 감동을 준 건 전자였는데, 이유는 어떤 문학작품에도 뒤지지 않는 위대한 비극으로 묘사한 플라톤의 <파이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추운 겨울 감방에서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려는 불순한 동기로 읽는 성서에서는 도무지 카타르시스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내가 신앙인이 아니어선지 아니면 그 묘사가 너무 고차원적이라 내 뇌세포가 못 미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데는 실패하여 황망해졌다.
검찰 심문이 끝나고 기소되면서 책 차입이 가능해져 이러저러한 독서 편력에 몰두했지만 역시 카타르시스를 야기시킬 만한 비극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카타르시스는 비참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는 하찮은 것일까. 대체 문학이란 이렇게 무력한가란 자책이 나를 때렸다. 온갖 비극들이 너무나 한심한 코미디 같았다. 이에 비하여 <주역>이나 사마천의 <사기>같은 육중한 책이 오히려 나를 사로잡고는 당장의 감각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역사와 인생과 진정한 삶을 추구하는 투지를 일깨워 주었다. 차라리 이런 것과 사회과학 관련 저서들을 통해 카타르시스 되었다는 게 내 솔직한 고백이다. 혹 내가 너무 사회과학파인 탓일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카타르시스까지는 가지 않아도 좋다. 내 정신을 홀랑 빠져들게 할 작품은 없을까 찾던 중 만난 게 엉뚱하게도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유미주의 소설이었다. 일본 최고의 유미주의자인 다니자키는 사회비판 문학도인 나에게는 애시당초 반동이란 낙인을 찍어두고 외면했더랬다. 그는 처제를 사랑한 나머지 아내를 너무나 학대하여 이를 가까이서 지켜보던 시인 사토하루오(佐藤春夫)가 아내를 양도하라고 요구, 둘은 그렇게 하려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러나 다니자키의 심경에 변화가 생겨 약속을 파기해 버리자 사토 시인은 폐인이 되어 둘은 절교한다. 만 9년 후에 다니자키는 다시 변심하여 아내를 정식으로 사토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다른 여인에게 빠져들었다.
‘아내 양도사건’으로 알려진 이 이야기가 소설이 아닌 실제이며 그 주인공이 다니자키인지라 나 같은 머리로는 통박이 안 되기에 이런 작가는 아예 읽을 가치조차 없다고 치지도외해왔던 터였다. 그런데 감방 신세로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지라 영치해 준 그의 소설을 어쩔 수 없이 슬금슬금 읽다가 푹 빠져들고 말았다. 출세작 <문신(刺靑)>은 짤막한 소품으로 에토(江戶)시대가 배경이다. 풍속화가 출신의 문신사 세이키치(淸吉)는 당대 최고의 명성을 지니고 있어 누구나 그의 바늘에 찔려 자신의 몸에 문신이 새겨지기를 바랄 지경이었다. 세이키치는 문신에 몰두하면서 상대가 바늘에 찔린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며 미묘한 쾌감을 느낀다. 예술가답게 그는 상거래로서의 문신이 아닌 진정 자신이 원하는 아름다운 여성의 피부에 자기 혼을 새겨 넣고자 그 대상을 물색 중이었는데, 마침 그 상대가 나타난다. 가마의 발(簾) 뒤에 새하얗게 드러난 한 소녀의 보드라운 발을 보는 순간 “이 발을 가진 여자야말로 그가 영원토록 찾아 헤매다 지친 여자 중의 여자일 것”이라 확신한다.
그는 그녀에게 폭군 주왕(紂王)의 총희(寵姬)인 말희(末喜)의 새디즘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비료>를 보여 준다. 젊은 여인이 벚나무 가지에 몸을 기대고 섰는데, 그녀의 발아래로는 남자들의 시신이 주욱 널브러져 있다. 그림을 본 소녀는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본성인 말희를 닮은, 뭇 남성을 자기 쾌락의 비료로 쓰고픈 새디즘이 작동된다. 이를 눈치 챈 세이키치는 그녀를 마취시켜 소망했던 화폭(그녀의 피부)에다 작품(암거미)를 완성해 나간다. 문신은 끝난 뒤 온탕에 드나들며 피부 수축으로 상처를 풀어줘야 하기에 그 고통 때문에 신음하기 마련이다.
세이키치는 문신을 완성시킨 뒤 마취에서 깨어나는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그 문신때문에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노예로 전락하여 너의 몸을 살찌우는 비료가 될 것이다”라고 일러준다. 보통 여자라면 부어오른 바늘 자욱의 고통 때문에 혼미할 터인데 이 말이 떨어지자 그녀는 대뜸 “당신이 제일 먼저 내 몸을 살찌우는 비료가 되었어요. ”라고 스승을 유혹하는 대목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작품을 평온한 일상생활 속에서 읽었다면 팽개쳤을 것이다. 유미주의 따위가!라고 개탄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추운 겨울 감방 안에서 얼어터진 발가락을 바늘로 찔러 시커먼 죽은 피를 짜내면서 읽었을 때 왜 그렇게도 내 영혼이 평온한 위안을 받았던가. 혹 레닌이 혁명을 외치면서 베토벤의 음악에서 위안을 받았던 이치와 같은 이치일까? 어림없는 소리다. 내가 레닌이 아니듯이 다니자키도 베토벤이 아니다. 적어도 베토벤에게는 역사와 민족에 대한 고뇌가 있지 않았던가. 음악 애호가들조차도 그가 얼마나 민중을 사랑하며 오로지 민중을 위로하며 침략자를 증오하고 평화를 추구했던 음악가였던가를 제켜두기 일쑤다. 이에 비하면 다니자키는 그냥 여성 사냥꾼일 뿐이다. 그의 필생의 고민은 여자와 놀아나는 것이었지 않는가. 그처럼 철저히 일생을 아름다운 여자 탐구에 바친 작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육체적인 고통 속에서도 내 성욕이 발동한 탓일까. 그런 열악한 조건 아래서도 성욕은 분명 있었지만 이 소설이 준 위안은 그런 건 아니었다. 비인간적인 시대 속에서 생존조건조차도 갖추지 못한 상황, 거기에는 어떤 사소한 미학적인 편린도 끼어들 틈새가 없었다. 누군가는 감방에서 꽃이나 잡초 혹은 쥐나 거미를 길렀다고도 했지만 적어도 징역 초기에는 어림없는 소리다. 형이 확정되고 어느 정도의 안정과 그 속에서의 일상성이 자리 잡을 때라야 가능한 일이다. 미학을 연상할 수 있는 어떤 빌미도 없는 상태에서 삭막해진 내 영혼에게 <문신>은 그간 억눌러 두었던 미학을 되찾아준 격이었다. 아름다움이 이렇게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닫는 계기가 된 셈이다. 그렇다고 유미주의적 작품이면 뭐나 이런 기능이 있을까. 그렇진 않았다. 참고로 말하면 감방에서 김동인의 유미주의적 소설을 몇 편 읽었는데 전혀 감동도 구원의식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가 아니라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효석이나 이태준의 <오몽녀(五夢女)> 같은 소설이라면 위안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고통 속에서 유미주의의 가치를 체험한 게 나로서는 신기하기만 했다. 참여- 사실주의 일변도에 치중했던 나로서는 오히려 그런 고통을 통하여 문학예술의 심오한 세계, 진실로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말은 그 후 내가 유미주의 미학관을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건 아니다. 비판적 예술작품도 미학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체득한 셈이다. 덧붙이면 그로부터 만 26년 후인 2000년 천운영의 <바늘>(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같은 제목의 소설집, 창작과 비평, 2001)을 읽고 홀연히 <문신사>를 떠올렸다. 그리고 한강의 <몽골반점> 같은 아름다움도 바로 이런 예에 속한다고 추가하고 싶다. 유미주의가 반드시 감옥 안에서만 작동되는 특수 감각이 아니라 일상생활 어디서 언제나 작동되는 소중한 인간의 미학적 기능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진정한 아름다움에는 구원의 힘이 존재한다. 그러고 보니 은근히 비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도 내 무지의 소치임이 드러나고야 마는 것 같다. 비극이든 카타르시스든 유미주의든 미학적 형상화만 잘 되면 누구나 감동하며, 그것 자체가 곧 영혼의 구원에 기여한다는 이 뻔한 진리를 온갖 풍상을 겪고서야 알게 되다니!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