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민중미술가 이상호 화가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였다. 감옥 안 마룻바닥에서 글을 새긴 흔적을 발견했다. ‘대한독립만세’라는 글씨였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이 떠올라 눈물이 났다.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목숨바쳐 나라를 구한 독립지사들의 후손은 가난조차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광주비엔날레 초대작가 이상호(61) 화가는 화폭에 친일파 92명을 그려 일일이 손에 포승줄로 묶고 수갑을 채웠다. 이 작가는 30일 “70여년 전 ‘반민특위’ 해체로 심판받지 못했던 자들을 그림으로 심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번 광주비엔날레(4월1~5월9일)에 그는 7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417㎝×245㎝)에서 그는 친일 인사 92명을 소환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와 함께 ‘친일인명사전’(2009) 수록 인물 중 군인·경찰·관료·언론·문화예술 부문에서 92명을 간추렸다. 박정희·노덕술·방응모·김성수·김기창·김은호·최남선·이광수·서정주·안익태·김활란 등이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 소설가 전혜린의 아버지 전봉덕,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로 민비 시해사건 주동자 우범선도 포함됐다. 인물 옆엔 그의 행적을 기록했다. 이 작가는 “반복해서 색을 칠해가며 그들의 비열한 내면세계를 드러내는 데 중점을 뒀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그는 “친일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 메스꺼움이 가슴에서 튀어나와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럴때마다 “김구·장준하 선생의 얼굴이나 내가 그린 ‘통일열차 타고 베를린까지’라는 그림을 보며 붓을 곧추 세웠다”고 했다. 친일파들의 기록과 사진 등을 찾는 것은 이지훈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사무국장이 도맡아 큰 힘이 됐다. 그의 이번 작품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일제를 빛낸 사람들’은 광주비엔날레가 끝나면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걸린다. 그는 “그림 속의 그들은 영원한 역사의 죄인이다. 그래서 예술의 힘이 무섭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1일 개막 광주비엔날레 7점 출품
친일파 92명 소환한 대작 눈길
“비열한 내면세계 담는 데 중점”
87년 걸개그림 그려 투옥 고초도
국보법으로 구속된 첫 미술인 기록
“조선 감로탱으로 역사화 그리고파”
그는 “힘든 길이었지만, 시대를 새기고 민주를 그렸던” 민중미술가다.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는 31일 오후 1시30분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독립투사 후손들을 초청해 특별관람회 설명회를 연다. 전시작 중 나머지 6점은 과거에 그렸던 그림들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감독이 광주 동구 궁동 작업실로 찾아와 ‘권력해부도’(1989), ‘지옥도’(2000), ‘이라크 전쟁’(2003), ‘통일염원도’(2004) 등 6점을 골랐다.
그의 작품엔 반미와 평화통일, 저항적 민족주의 불꽃이 꺼진 적이 없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 완성한 ‘죽창가’(72×54㎝)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낫을 들고 죽창을 만드는 민초의 눈에 시대의 분노가 녹아 있다. 그해 8월 조선대 미대 회화과 4학년 때 후배 전정호 작가와 공동제작한 걸개그림 ‘백두의 산자락 아래, 밝아오는 통일의 새날이여’라는 작품 때문에 구속 기소됐다. 미술인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첫 사례였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던 그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을 얻었다. 이 작가는 그해 12월부터 50대 때까지 2~3개월씩 수차례에 걸쳐 6년여의 세월을 정신병동에서 지냈다.
몸이 좋아져 일상으로 복귀하면 또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한국민중판화 모음전’, ‘민족해방운동사 걸개그림 전국순회전’, ‘망월동 걸개그림전’ 등에 참여했다. 1993년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고려불화전을 보고 고려불화를 독학했다. ‘아미타부처님’(1999), ‘지혜로운 대세지보살’(2003) 등의 작품은 고려불화를 차용해 새로운 동양화 화법으로 민중들의 삶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신병동에 갇혀서도 ‘묶인 환우’(2015) 등을 크로키했다. 2015년 첫 전시회를 열며 세상에 나왔다. 이 작가는 “그때 박구용 전남대 교수가 내 도록에 쓴 글(‘상처입은 천사의 사회적 표현주의’)라는 글을 읽으며 ‘아, 나도 화가가 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의 꿈은 “5월이 오면 5·18 희생자들이 처음 묻혔던 옛 망월동에서 걸개그림전을 열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번에 ‘일제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작품을 완성하면서 또 하나의 소망이 생겼다. 조선 감로탱 형식으로 역사화를 그려가는 것이다. 그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조선 시대의 ‘감로탱’엔 위로는 불보살이 자리하고 아래로는 민중들의 생활상이 담겨 있다”며 “감로탱을 현대화해 동학부터 일제강점기, 해방과 분단, 4·19-5·18-6월항쟁 그리고 촛불 혁명까지의 역사를 함께 담고 싶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민족문제연구소 광주지부 제공
<2021-03-30> 한겨레
☞기사원문: “박정희 등 ‘일제 빛낸 사람들’ 92명 수갑 채워 심판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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