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 ②
– 이 기사는 1편 조선인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을 만든 사람에서 이어집니다.
“한인사회당은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개명되나 이동휘가 이 당을 만든 것은 단순히 한국 독립 후원자를 얻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 이동휘란 사람은 원래 구한국군의 정령(正領) 출신으로 열렬한 반일민족운동자이지, 사회주의 이념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초기 독립운동가 가운데는 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 짐짓 공산당 조직에 몸담은 사람이 많았는데 볼셰비키 집단이 이들을 항일운동에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동휘는 도량이 넓고 활동력이 큰 독립운동가였다.”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
한인사회당은 조선인 최초 사회주의 정당일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조직된 사회주의 정당이다. 1918년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1921년과 1922년 각각 창설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보다 더 빨리 탄생했다.
성재 이동휘는 한인사회당을 기반으로 연해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를 만들고, 군사학교를 세웠다.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한인적위대(韓人赤衛隊)도 구성했다. 한인적위대가 참여한 우수리 전투는 러시아 한인이 참여한 첫 무장투쟁이었다. 한때 개신교도였던 이동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을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사회주의자는 그리스도인이 틀림없다.”(A true Christian must be a socialist and a real socialist must be a Christian)
칼 바르트(Karl Barth)의 말처럼, ‘개신교도’였던 그는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종교이자 이념이었던 ‘독립’
‘무인’이었던 이동휘가 ‘혁명가’의 길을 걸은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 모른다. 여운형은 “이동휘는 공산주의의 ABC조차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지만, 성재는 종교와 이념도 독립을 위한 ‘도구’로 여겼다. 이동휘에게 ‘독립’은 종교이자 이념이었다. 실제로 1919년 12월 25일 <혁신공보>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一人)이 필사(畢死)하기까지 최후의 일인(一人)의 혈점(血點)이 필적(畢滴)하기까지 독립을 필성(必成)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1919년 3.1 운동 전후 조선에는 한성정부가, 중국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러시아에는 대한국민의회가 탄생했다. 각각 활동하던 세 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1919년 11월 3일 이동휘는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되었다.
초창기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지도자는 이승만, 안창호, 이동휘였다. 세 사람이 주도했기 때문에 ‘삼각정부’ 또는 ‘삼각내각’이라 불렸다.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끈 세 지도자의 독립운동 노선은 달랐다. 우남 이승만은 ‘친미외교론’을, 도산 안창호는 ‘실력양성론’을, 성재 이동휘는 ‘무장투쟁론’을 펼쳤다. 성재는 오직 무기와 피로써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철혈주의'(鐵血主義)를 표방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1920년 여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며 조선인 무장투쟁이 큰 성과를 거뒀다. 그 보복으로 일제는 만주 간도에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하는 ‘간도참변’을 일으켰다. 만주의 조선인 동포를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자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크게 일었다. 독립운동 노선에 대한 논쟁도 터져 나왔다. 이동휘는 급진론에 근거해 임시정부의 전면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의 개혁은 좌절되었다.
여기에 레닌의 독립운동 자금 유용 시비가 맞물려 일어났다. 성재가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있을 때 한인사회당은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의 독립운동자금 제공을 약속받은 바 있다. 임시정부 개혁이 실패하자 성재는 1921년 1월 24일 국무총리를 사임하고 상하이 임정을 탈퇴했다.
총리 사임 후 성재는 북만주와 연해주를 무대로 활동을 이어갔다. 1921년 5월 20일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대표자 회의에서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이동휘는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11월 고려공산당 대표로 레닌과 회담을 했다.
이 무렵 러시아 극동에서 한인 공산주의자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상하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했다. 여기에 ‘자유시 참변’까지 터지면서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1923년부터 이동휘는 새롭게 출범한 코민테른 꼬르뷰로(Korbureau 고려국) 위원으로 활동했다.
해외 독립운동 무대가 된 ‘도서관’
1924년 2월 꼬르뷰로가 해산하자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고려도서관’에서 관장으로 일했다. 신한촌은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 말 그대로 한인이 꾸린 새로운 마을이었다. 고려도서관 관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조선 땅에서 해외 동포 위문을 목적으로 보내온 백과사전과 책을 바탕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였다.
교육구국운동을 펼친 성재가 도서관을 통해 그 행보를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는 1910년대부터 ‘도서관’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은 <대동공보>가 발행금지를 당하자 한글 신문 <대양보> 발간을 준비했다. 신개척리에 <대양보> 발행소를 새로 지으려 한 최재형은 건물 일부를 ‘도서관’으로 계획했다.
러시아 연해주뿐 아니라 해외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사례가 있다. 송재 서재필과 성엄 김의한, 김영숙(난영)은 해외 도서관에서 활동했다. 1920년대 초까지 일제는 조선에 도서관을 짓지 않는 ‘무도서관'(無圖書館) 정책을 펼쳤다. 이동휘가 신한촌에서 도서관을 운영할 무렵, 조선 땅에 도서관은 흔치 않았다.
타국을 정처 없이 떠돈 독립운동가가 도서관에 몸담은 흔적이라 이동휘의 사례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를 ‘도서관인’으로 부르기는 어렵겠지만, 학교와 도서관을 기반으로 펼친 성재의 구국운동은 ‘해외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조선인의 ‘해외 도서관 운동사’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할 대목이다.
‘도서관인’으로 스스로 인식했는지 여부를 따지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풍찬노숙하던 그들에게 정규 도서관 교육을 받았는지, 도서관인으로 자각했는지 묻는 것은 사치스러운 질문 아닐까? 도서관인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도서관은 그들에게 독립운동의 ‘무대’요, 또 다른 ‘무기’였다.
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간도와 연해주 지역 학교는 제법 알려졌지만 도서관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국 문헌정보학은 우리 땅에 명멸한 도서관 위주로 관심을 가져왔지만,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한 도서관 역사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속지주의'(屬地主義)에서 ‘속인주의'(屬人主義)로 관점을 확장하는 것은 한국 도서관사 연구의 과제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2019년, 대한간호협회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간호인 34인을 기념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대한간호협회는 ‘간호사, 독립운동 전선에서 빛나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연 데 이어 신문광고를 했다. ‘독립운동가 간호사들을 만나다’라는 특별전시회도 개최했다.
그러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도서관인’은 없었을까? ‘도서관을 무대로 펼쳐진 독립운동’은 없었을까? 이동휘 사례처럼 도서관에 자랑스러운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
고려도서관을 운영하던 성재는 1928년 12월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다. 1929년에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에서 코민테른과 연락을 담당하는 총지휘자가 되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는 변강 국제혁명자후원회(MOPR)에서 활동했다.
활발히 활동을 이어가던 이동휘는 1935년 1월 31일 심한 독감에 걸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숨졌다. 작가 김성동이 “시베리아 벌판을 말 달리던 마지막 조선 무장”이라 칭했던 이동휘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혁명가로 분투했으나 그는 조국의 해방과 혁명을 보지 못했다.
62세로 숨진 이동휘는 오랫동안 ‘사회주의 운동가’라는 이유로 외면받았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성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성재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조국이 해방된 지 50년 만이었다. 권업회 사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는 이동휘의 신한촌 집도 이젠 사라졌다. 그 자리엔 아파트와 상점이 들어섰다. 성재가 관장으로 일한 도서관은 이제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이동휘 집안은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성재의 부친 이승교는 3.1 운동에 가담했다. 큰딸 이인순은 길동여학교 교사로, 둘째 딸 이의순은 명동여학교와 삼일여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두 딸뿐 아니라 성재의 사위들 역시 애국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성재의 아버지 이승교는 독립장을, 이동휘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그의 큰딸과 둘째 딸은 애족장을 받았다. 첫째 사위 정창빈은 대통령표창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으로 활동한 둘째 사위 오영선은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그 중심에 이동휘가 있었음은 말할 나위 없다. 독립운동의 한복판에 늘 성재가 있었음에도 우리는 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를 기념하는 동상도 기념관도 없다.
아명이 ‘독립'(獨立)이었던 성재는 이름처럼 ‘독립’에 몸 바친 삶을 살았다. ‘다른 나라에 의지하는 외교가 아닌, 오직 무장투쟁과 최후 혈전을 통해서만 영원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라고 주창한 그는 독립운동의 제단에 자신의 피를 뿌렸다.
이동휘가 활약한 신한촌에는 3개의 기둥으로 만든 기념비가 서 있다. 3개의 기둥은 각각 조선에 있던 한성정부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러시아에 있던 대한국민의회를 상징하는 동시에, 남한과 북한, 그리고 러시아 해외동포를 의미한다.
그의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해방된 조국은 결국 갈라졌고, 해외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남도 북도 아닌 러시아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오랫동안 살아야 했다.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그들이 바라던 해방 조국이 ‘분열’된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1913년 권업회에서 이동휘는 이렇게 연설했다.
“나누면 멸망을 받을지니 과연 오늘날은 살부살형(殺父殺兄)의 원수라도 우리의 광복을 희망하여 서로 나누지 말자.”
남북이 둘로 나뉘어 민족상잔의 전쟁을 치를 것을 성재는 알았던 걸까? 살부살형의 원수라도 진정한 해방을 위해 서로 나뉘지 말자고 역설했던 그의 말은 민족의 미래를 향한 예언자적 일갈이었다. 성재가 강화도에 처음 세운 근대학교 이름도 ‘합일학교'(合一學敎)다. 하나가 된다는 의미다.
‘나누면 망하고 합하면 흥한다’라며 ‘단합’도 아닌 ‘영원단합’을 강조한 성재는 죽어서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노바 카레이스카야 슬라바에 세운 세 기둥이 하나 되는 날은 오지 않았다. 성재의 ‘혁명’과 그의 진정한 ‘독립’은 아직 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글: 백창민(bookhunter), 이혜숙(sugi95)
<2021-04-02>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일제시대에도 없던 건물… 연해주에 세운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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