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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노량해전 자리에 일본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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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남해대교 앞에서 묻는다, 우리는 꼭 그리 했어야만 했을까?

이 다리를 보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어느 문구 하나가 떠오른다.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Bartleby, the Scrivener)>에 나오는 말이다.

붉은 옷을 입은 이 다리는 ‘당시 우리는 꼭 그리 했어야만 했을까?’ 하고 자문하게 만든다. 우리 주체성과 자유의지를 무엇으로 담보해 낼지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저지른 어리석은 행위다. 노량해협을 건너는 남해대교 이야기다.

개통식 개최 직전의 남해대교 다리가 만들어지고, 개통식을 치르기 직전인 1973년 6월 22일 남해대교 모습이다. 개통식을 치르기 위해 다리 끝에 세운 임식 가설물에 “남해대교”라 쓴 글자가 또렷하다. ⓒ e영상역사관

우리나라 최초 현수교는 1973년 5월 춘천에 만들어진 등선교(登仙橋)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없다. 두 번째 현수교가 남해대교다. 1968년 5월 10일 착공하여 1973년 6월 20일 완공된다. 총길이 660m(128 + 404 + 128)다.

남해군과 하동군에 각각 위치하는 ‘노량리’를 서로 연결하는 다리다. 준공 당시 아시아 최대 현수교였다. 남해안을 대표하는 랜드 마크(Land mark)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모두 이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모양과 색깔도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와 유사하다. 이웃한 광양만엔 우리나라 최대길이 이순신대교가 있다. 주 경간 1,545m로, 이는 이순신 장군 탄신년도를 상징한다. 두 다리가 위치한 곳은 정유재란 최후 격전지다. 바로 ‘순천 예교성(曳橋城) 전투와 노량(관음포)해전’이다.

정유재란 최후의 전투

정유년 9월, 명량에서 왜군은 참패를 당한다. 이들은 전술을 바꿔 순천에서부터 울산까지 왜성을 쌓아 둔취한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쌓은 순천 왜성은 철옹성이다. 5층 천수각과 각진 내·외성을 몇 겹으로 둘렀다. 성안 왜군은 1만 3천이다. 배는 500척이고, 군량은 1년을 버틸 만하다. 탄약과 총포가 부지기수다.

조선수군은 1598년 2월 고금도로 통제영을 옮긴다. 고니시를 잡기 위해서다. 조명연합군은 7월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세운다. 울산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할 동로군(東路軍), 사천 시마즈 요시히로를 공격할 중로군(中路軍), 순천으로 진군하는 서로군(西路軍)과 진린이 이끄는 수로군(水路軍)이다. 그 사이 이순신 장군이 절이도(折爾島)에서 큰 전과를 올린다.

순천 검단산성 순천 왜성에 둔취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기 위해 서로군(西路軍)이 주둔하던 검단산성이다. 수로군(水路軍) 이순신 장군과 진린이 왜성을 수차례 공격하나, 사령관 유정의 비협조로 큰 성과를 내지 못한다. ⓒ 문화재청

9월 18일 도요토미가 후시미성(伏見城)에서 죽는다. 유언에 따라 철군이 결정된다. 명나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전쟁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총사령관 유정은 순천에 도착해 검단산성을 군영으로 삼는다. 군사 3만 6천이다. 그는 싸울 마음이 없다. 고니시와 강화하려 한다. 이순신과 진린은 수차례 순천왜성을 공격하나, 육군의 협력이 없어 큰 소득을 얻지 못한다.

10월부터 고니시가 유정에게 철군할 바다 길을 열어 달라 뇌물로 회유한다. 광양만 바다를 장악한 수군도 회유한다. 진린이 뇌물에 넘어간다. 11월 14일, 왜 통신선 한 척을 남해왜성으로 통과시켜준다. 고니시가 순천왜성에 고립되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구원군이 올 것이다. 왜적을 좌우에서 맞을 수는 없다. 노량 바다에서 구원군을 격퇴시키고, 고니시 퇴로를 차단해야 한다. 불가피한 조치다.

11월 18일 이순신 장군은 출진을 결정한다. 진린도 마지못해 출진한다. 조선수군은 남해섬 관음포에, 진린은 곤양 죽도(현 하동군 금남면 대도리로 추정)에 닻을 내린다. 조명연합군은 군선 470척에 군사 1만 5천이다. 왜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총대장으로 고성의 다치바라 무네토라, 부산의 테라자와 마사시케, 남해의 소 요시토시가 이끄는 500척 병선에 1만 병력이다.

관음포 이순신 장군 순국 공원 노량해협과 관음포에서 왜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도주하던 왜군을 추격하다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순국한다. 관음포 인근에 조성된 이순신 장군 순국 공원이다. ⓒ 남해군청

19일 새벽, 짙은 어둠 속으로 적선이 나타난다. 적이 광양만 쪽으로 들어오자 조명연합군이 각종 대포를 쏘아댄다. 총통과 불 섶, 불화살로 북서풍을 이용해 화공(火攻)을 편다. 적이 관음포로 도망친다. 도망치는 적선에 수없이 불화살을 쏜다. 불길이 밤하늘을 밝혀, 관음포가 대낮같다. 적선 100여척이 전라좌수영과 남해섬 사이로 도망친다. 이순신 장군이 추격한다. 절반쯤 불태우고 부수었을 때, 왼쪽 가슴이 뜨끔하다. 군관들에게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한다.

굴욕적인 한일협정과 청구권자금

1960년대 중반, 미국은 박정희 쿠데타세력에게 일본과 관계개선을 요구한다.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려는 그들의 동아시아 전략이다. 한일협정이 미국의 배후조종에 놀아났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1965년 쿠데타세력은 기꺼이 이에 응한다.

국내에서는 계엄령을 동원해 반대하는 시민들을 겁박한다.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미국 정보부(CIA) 기밀문서(1966. 3. 18자 보고서)에 따르면 ‘박정희는 1961∼65년까지 일본 6개 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 6,600만 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일협정은 이런 추한 이면을 배경으로 체결된다. 총칼로 나라를 훔친 떳떳치 못한 자들이 저지른 폭거다.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통해 50여 년(1895∼1945)간 당해온 수탈과 모욕, 빼앗긴 민족정기마저 헐값에 팔려버린 꼴이다.

한일협정 설명회 1965년 6월 22일 사진으로, 설명회가 열린 명확한 장소는 확인이 안된다. 벽에 붙은 큰 현황판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목표완수”라 쓰인 것으로 보아, 정부 모처 상황실로 짐작된다. ⓒ e영상역사관

일본은 불법적인 식민지 찬탈과 수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도, 그에 상응하는 어떤 배상이나 보상도 치르지 않는다. 아니 처음부터 그럴 생각조차 없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이고, 보상에 대한 관련 국제협약 등에 유효한 조항이 없다는 핑계를 댄다. 싸구려 ‘청구권자금’을 주는 선에서 매듭짓고 만다.

3억 달러 무상자금(일본 생산물 및 일본인의 용역을 협정체결일로부터 10년에 걸쳐 무상제공)과 2억 달러의 장기 차관(산업시설과 기계류 등을 공공차관으로 년리 3.5%. 7년 거치 13년 분할상환),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어업협력자금 9천만 달러와 선박도입자금 3천만 달러 포함)을 공여하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어진다.

이 자금의 활용마저도 일본 전범기업이 우리를 기술·자본으로 얽어매는 장치로 작동한다. 수십 년 간 이어진 한·일 무역불균형과 기술종속의 시발점이다. 한일협정 후과(後果)는 2021년 지금도 강제징용 및 위안부 문제, 근로정신대 문제 등에서 걸림돌로 작동한다.

근본적으론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의 뻔뻔한 태도가 문제이나, 형식에 있어선 잘못 체결된 협정도 큰 몫을 한다. 한·일간 아픈 역사가 해결·치유되지 못하게 막아서는 도구로 쓰인다. 그런 점에서 한일협정은 굴욕적인 흥정에 불과하다. 뼛속까지 일본 천황의 신하이고자 했던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의 격에 맞는 행위다.

노량해전 격전지에 놓일 다리를 일본 기술로

노량해협을 건너는 남해대교 남해 섬 쪽 하늘에서 바라 본 남해대교 모습이다. ⓒ 남해군청

남해 섬의 애로사항이 점차 커져간다. 노량을 흐르는 거센 물살이 육지로 물류와 이음을 방해한다. 타당성 조사가 이뤄진다. 1966년 남해대교 타당성 조사와 설계에 일본 기술진이 깊숙이 개입한다. 이는 현수교 주요 부재(部材)를 공급할 기업이 일본 기업으로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본 조사단과 공동으로 타당성 조사를 실시한다. 그들은 지형·지질·수심·조류 움직임 등 자연여건을 감안, 초 장대교량이 경제적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분석한다. 이를 근거로 우리 기업이 설계한 주탑 위치 및 다리 경간 등 주요 내용이 변경된다.

실시설계는 착공 6개월 후인 1968년 11월에 완료된다. 이들은 경간 400m가 넘는 현수교를 제시한다. 당시 아시아 최대 현수교는 경간 366m의 일본 와카토(若戶)대교다. 이들이 설계실적을 쌓기 위해 남해대교를 연습용으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든다. 남해대교를 바탕으로 경간 712m의 간몬교(関門橋)를 1973년 11월에 개통시키기 때문이다.

남해대교 주요 부재는 청구권자금으로

남해대교 하부 모습 바다에 기초 공사를 하고 그 위에 붉은 강재 주탑을 세웠다. 주 케이블을 걸어 현수재(Hanger Rope)를 늘어뜨려 유선형 강재 보강 형을 매달았다. 이 모든 재료가 청구권자금 일환으로 제공된다. 일본 이시가와 중공업과 전범기업 신일본제철이 만든 것을 가져다 사용했다. ⓒ 남해군청

급기야 굴욕적으로 얻어 온 청구권자금으로 남해대교가 만들어진다. 현수교에서 가장 중요한 부재는 모두 일본 제품이다. 총사업비 17.59억 원 중 7.64억 원(218.6만$) 금액에 해당하는 현물이다. 일본 전범기업인 신일본제철과 교량에 특화된 이시가와(石川島播磨)중공업(현 IHI의 전신)에서 만든 자재들이다. 1970년 8월부터 완공 때까지 공정(工程)에 따라 순차적으로 공급이 이뤄진다.

강재(鋼材)주탑(430.76 M/T = Metric Ton)과 주 케이블(504.838 M/T), 보강 형(1,848 M/T)과 앵커리지(452.162 M/T)을 포함하여 붉은색 주탑 도장(塗裝)페인트(11.593 M/T)는 물론이고, 주 케이블 가설을 위한 임시시설인 캐트워크로프(37.7 M/T)까지 들여온다. 총사업비의 43.43%에 해당하는 현물이다.

이 뿐이 아니다. 공사에 필요한 250톤급 해상 기중기와 1,200마력 예인선을 포함한 19종 장비도 일본 것을 빌어다 공사한다. 우리가 자체 조달한 재료와 부재는 시멘트와 보조철강재 뿐이다. 일본 기술과 자재를 빌어, 사실상 우리는 다리를 조립만 한 셈이다.

그나마 우리 기업이 시공을 맡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나? 남해대교를 시작으로, 우리 초 장대교량 기술이 일취월장하는 계기가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국내 교량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2021년 세계 유수의 곳에 유려한 초 장대교량 기술을 뽐내고 있는 바탕엔, 분명 남해대교가 있었음을 부인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꼭 묻고 싶은 말은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 남해대교 서측으로 제2남해대교인 노량대교를 2018년에 만들었다. 하동 쪽 하늘에서 바라 본 모습이다. ⓒ 남해군청

남해대교가 놓인 곳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7년 전쟁을 끝마친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다리는 섬을 육지와 이어주는 의미 있는 일이지만, 기술은 물론 굳이 식민지 피해보상으로 받은 돈과 자재를 써가면서까지 건설해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을 택할 수’는 없었을까? 그것이 훨씬 더 떳떳해 보인다. 더구나 기술과 자본의 굴욕적인 종속을 감내해가면서까지 말이다.

노량해협을 흐르는 맑은 바다는 무어라 말할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바다에 원혼을 묻은 수많은 조선수군은, 도대체 어떤 심정일까?

덧붙이는 글 | 지난 10개월 동안 ‘다리’를 통해 많은 분들을 만났던 여정이 이제 끝이 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성원과 격려, 질타와 비판을 해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새로운 주제로 만나 뵐 것을 약속드리며, 초유의 전염병이 휩쓸고 있는 이 긴 터널이 하루 빨리 걷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글: 이영천(shrenrhw)

<2021-04-07> 오마이뉴스

☞ 기사원문: 노량해전 자리에 일본 기술과 자본으로 만든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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