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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日역사부정 실체]①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 램지어 주장, 어디서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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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를 ‘자발적 계약 매춘부’라 규정한 마크 램지어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국제학술지 논문이 국내외에서 파문을 일으킨 지 두 달여가 지났다.

많은 연구자들이 램지어 교수의 심각한 연구윤리 위반과 왜곡된 역사인식을 비판하며 논문 철회를 요구했지만, 출판사 측은 논문 출간 방침을 아직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램지어 교수의 논문은 학문적 진실성 측면에서뿐 아니라 위안부 강제동원 부정 등 기존 역사부정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KBS는 국내외 일본군 위안부 전문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일본과 한국의 역사부정주의자들의 논법과 주장이 어떻게 하버드대와 국제학술지의 형식으로 출현할 수 있었는지 집중 추적하는 기사를 4월 12일부터사흘에 걸쳐 연재한다.

이를 통해 램지어 교수 뒤에 숨어 있는 한미일 역사부정·혐오 네트워크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 램지어의 역사부정주의적 시각, 어디서 왔나?

‘태평양 전쟁에서 성을 위한 계약’. 지난해 12월 1일 ‘국제 법경제학 리뷰’ 온라인판에 실린 램지어 교수의 논문 제목이다.

논문의 2개 키워드인 ‘매춘’ ‘노역 계약’이 분명히 가리키듯 램지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가 노역 계약을 맺은 매춘부였다는 주장에 논의를 집중한다. 자발적 계약에 따라 성매매 여성이 되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강제 동원은 없었고 성노예도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KBS는 이 같은 주장이 어디서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램지어 교수 논문을 일본과 한국의 대표적 우파 학자의 저서와 비교해 보았다. 비교 대상은 일본 역사부정주의 대부라 불리는 하타 이쿠히코 전 니혼대학 교수의 1999년 학술서 ‘위안부와 전장의 성’, 그리고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의 2019년 저서 ‘반일 종족주의’이다.

특히 하타 교수의 저서는 우파 위안부론의 대표적인 참고문헌으로, 한일 우파 논객들이 즐겨 읽고 중요하게 인용하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

램지어 교수는 위안소를 “해외 군사용 성매매 업소”로 설명한다. 이 점에 대해선 하타 교수가 이미 “종군 위안부 시스템은 전쟁 전 일본 공창제의 전쟁지역 버전”이라고 규정했고, 이영훈 교수도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편성된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다.

세 사람 모두 “군 위안부제는 공창제의 연장이었다, 당시 공창제는 합법이었다, 따라서 위안부제 또한 합법이었다”라는 억지 삼단논법을 사용한다.

2. “자유의사에 따른 합법적 계약”

“‘신뢰가능한 약속’에 따라 여성과 성매매 업소가 노역 계약을 체결했다”는 램지어 교수 논문의 핵심 주장은 “고용주와 위안부 사이의 계약”이라는 하타 교수, “주선업자들이 취업승낙서를 받아 딸을 데려갔다”는 이영훈 교수 주장과 맞닿아 있다.

3. “민간업자가 모집…일본군 책임 없어”

위안부 모집에 대해 램지어 교수는 “한국이나 일본 정부가 강제로 성매매시키지 않았다”면서 “모집업자들이 거짓말을 했을 수 있다”는 말로 책임을 민간업자에게 돌린다.

하타 교수의 “업자의 악덕함이 심했다”는 주장, 이영훈 교수의 “(주선업자에 의해) 좋은 곳에 취직시킨다는 감언이설의 속임수가 동원”되었다는 표현과 겹친다.

세 사람 모두 일본군의 역할은 업주의 착취와 성병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이른바 ‘좋은 관여’였다고 강조한다.

4. “위안부는 고수익 업종”

“전시에 위안부가 많은 돈을 벌었다”는 것도 3국 학자의 공통된 주장이다.

5. “자유 폐업·귀향 가능”

세 교수는 성매매는 자유 계약이었기에 여성들이 선불금을 갚으면 자유롭게 폐업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도 주장한다.

‘탈진실의 시대, 역사부정을 묻는다’의 저자인 강성현 성공회대 교수는 역사부정주의자들이 계약을 강조하는 이유에 대해,

“계약을 강조하면, 문제가 생기더라도 실제 계약 당사자인 업자와 군 위안부로 동원되는 여성의 호주 사이의 책임으로 전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위안부를 모집하라고 지시하고 심지어 돈까지 댄 일본군의 책임은 온데간데없고 업자의 착취를 막기 위해 관여한 좋은 일본군으로 남게 되는 효과까지 생긴다”라고 설명한다.

사실 램지어 교수는 이미 1991년 논문 ‘제국 일본의 계약 매춘: 상업적 성 산업에서 신뢰가능한 책임’에서 20세기 초 매춘을 자율 계약으로 파악했다. 전쟁 전 성매매 여성의 자율 계약 개념을 전시 위안부와 연결시킨 건 하타 이쿠히코였고, 램지어 교수가 다시 이를 받아 위안부는 공창제의 연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한미일 역사부정 네트워크를 분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램지어 교수가 논문마다 감사를 표하는 인물, 제이슨 모건 레이타쿠 대학 교수다.

미국인인 그는 일본 우파 싱크탱크인 일본전략연구포럼의 지원을 받아 2018년 하타 이쿠히코의 ‘위안부와 전장의 성’을 영어로 번역했다.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이기도 한 모건 교수는 수시로 램지어 교수와 교류하며, 경제법학자인 램지어가 역사와 위안부 관련 논문을 쓰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日 역사부정 실체’ 기획 보도 협업 참여진
– 양현아: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창록: 경북대 로스쿨 교수, 전 일본군위안부연구회장
–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실장
–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일본군위안부연구회 학술이사
–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 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
–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 김창호: 일본 변호사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

<2021-04-12> KBS NEWS

☞기사원문: [日역사부정 실체]① “위안부는 계약 매춘부” 램지어 주장, 어디서 왔나?


“일본에선 역사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제는 주 전쟁터 미국, 그리고 한국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지난 30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발언이다.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선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을 처음 언급한 고노 담화, 종전 50주년을 즈음해 일어났던 성찰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현 스가 요시히데 내각 역시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히고는 있지만,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

일본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일본-미국-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어떻게 협력할까?

■ 日-韓 ‘역사 교과서 흔들기’

고노 담화(1993년), 무라야마 담화(1995년)에도 꿈틀거리지 않던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은 1997년이다. 위안부 강제성을 인정한 역사 교과서가 발단됐다.

1997년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이 출범한다. 의회에도 ‘일본의 전도와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 모임’이 설립됐다. 그 중심에 아베 신조가 있었다. <새역모>가 만든 교과서는 일제 식민지시기를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일제의 아시아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전쟁’ 또는 ‘자위전쟁’으로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일본 고등학생이 배우게 될 역사교과서 12종 중 ‘위안부 강제성’을 언급한 책은 단 1종뿐이다.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자신감이 헛된 과장이 아니다.

‘교과서 흔들기’는 8년 뒤 한국에서도 일어난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 이영훈 교수 등이 2005년 1월 참여한 ‘교과서 포럼’을 잇는 뉴라이트 학자들이 2013년에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교학사)>가 국사편찬위원회(유영익 위원장) 검정을 통과하며 절정에 달한다.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한국과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공통으로 삼은 목표는 반일”이라고 평가했다. 이영훈은 대한민국 위기의 근원으로 ‘종북’에 더해 ‘반일’, 그것도 ‘우리 안의 반일’을 종족주의라고 비난한다.

강 교수는 “사실의 진위와 상관없이 신념이나 감정으로 여론을 만드는, 무기화된 그들의 거짓말은 탈진실(post truth)”이라고 평가했다.

■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단체 ‘밀어주고, 끌어주고’

일본을 평정한 일본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몰려간 곳은 주 전쟁터 미국이다. 소녀상 철거 운동을 본격화했고, UN 등 국제무대로 전쟁터를 확장했다.

<위안부의 진실 국민운동(2013년)>, 미국에서 출범한 <역사의 진실을 묻는 세계연합회(GAHT, 2014년)> <재일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부회장 야마모토 유미코가 주도한 <나데시코 액션(2011년)>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단체는 미국에서 소녀상 철거 소송을 벌이고, UN에서 반대 집회를 여는 등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고 있다. 미국 유력인사들에게 영어 번역판 역사수정주의 책을 발송하는 것도 주요 활동이다.

2019년 <반일 종족주의>가 출판되면서 한국 단체들과 협력도 활발하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 낙성대 경제연구소 이우연 연구원은 2019년 7월 2일 UN 인권이사회에서 ‘일제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다. 이 자리를 주선하고 금전적으로 지원한 인물이 역사 부정론자 미국인 유튜버 ‘텍사스 대디’의 <일본 사무국> 국장 후지키 슌이치다.

<반일 종족주의>는 일본에서 출판돼 40만 권 넘게 팔렸다. 마찬가지로 일본 역사수정주의 책도 한국에서 출판됐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비판한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니시오카 쓰토무, 2020)>라는 책이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다름 아닌 이우연이다. 그리고 책을 낸 출판사는 우파 미디어를 표방하는 ‘미디어 워치’ 계열 ‘미디어 실크’다. 이 책 광고는 지금도 ‘미디어 워치’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 책도 한국의 연구자, 기자 등에게 사유 없이 대량 발송됐다고 한다.

■ 日-韓 역사수정주의자들의 ‘램지어’ 구하기

램지어 논문이 알려지자 일본에서 첫 지지 성명을 낸 사람이 이 책 저자인 니시오카 쓰토무다. 논문 출간에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니시오카 성명이 나오고 사흘 뒤인 2월 9일, 이영훈, 류석춘, 이우연 등 한국 측 인사들도 공동 성명을 낸다. 램지어 논문이 독창성을 인정받았다는 주장이었다. 국제학계, 특히 일본사 연구자들의 비판이 쏟아지자 한국의 역사수정주의 단체는 본격적인 램지어 구하기에 나선다.

이우연은 일본 산케이 신문사 계열 <재팬 포워드>에 램지어 논문 옹호 글을 기고한다.

<이승만 TV>의 주익종은 유튜브에 ‘고명하신 미국 교수님들의 램지어 비판을 살펴보니’ 등의 강의 영상을 올린다. 공교롭게도 이 유튜브 영상은 일본어 자막을 단 것이 한국어 영상보다 최고 4배 정도 조회 수가 많다. 아시다시피 조회 수는 유튜버 수익과 비례한다.

■ 역사수정주의 이념적 동일성….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

‘자학사관’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단체 <새역모>가 중학교 역사교과서 7종 모두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기술한 것을 비난하면서 만든 개념이다. 아베는 근현대 교육에서 일본인은 자자손손 사죄하는 것이 운명이 된 죄인처럼 다루어진다고 비판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정통한 일본 전문가인 일본계 호주인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저서 <바다를 건너간 위안부>에서 일본의 젊은 세대는 윗세대가 행해온 여러 악행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답하면서도 “그 악행을 은폐하고, 풍화시키고, 날조하는 과정에 관여하거나 혹은 그 과정을 묵인한다면 거기에 책임이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이것을 ‘연루(連累, implica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일본 극우가 쓰는 용어인 ‘자학사관’은 한국에서도 등장한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 박정희를 부국의 아버지’라고 칭송하는 한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은 2004년 당시 노무현 정부의 ‘자학사관’과 전쟁을 선포한다며 실체를 드러냈다.

강성현 교수는 “韓日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각각 근현대사에서 극우/파시즘/독재정치로 인한 잘못을 반성하는 역사인식을 ‘자학사관’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연속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또 “반일(反日)은 곧 ‘좌파’ ‘종북’ ‘친중’이라는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면서,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는 혐한, 혐북, 혐중 감정이 공통으로 깊이 배어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역사수정주의 핵심 단체 <역사인식문제연구회> 부회장인 미국인 제이슨 모건 교수(레이타쿠 대학)는 미국 학계가 좌파에 장악돼 있다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공산주의자” “2차 대전 당시 일본은 정의의 편이었다”고 주장한다.

제이슨 모건의 이 주장이 과연 그 혼자만의 목소리일까?

<2012-04-12> KBS NEWS

☞기사원문: [日역사부정 실체]②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단체…‘밀어주고 끌어주고’


일본에서 시작된 위안부 역사부정은 한국, 미국으로 확산했다. 그들의 주장은 마치 복사해 붙인 것처럼 똑같다.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위안소는 공창제라는 매춘 역사의 일부다” “위안부는 높은 수익을 올렸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은 위안부 증언을 “구름 잡는 이야기”라며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논리를 풀어갈 때는 증언을 ‘대목, 대목’ 잘라 인용한다. 증언의 전체 맥락을 왜곡하는 절취다.

일본, 한국, 미국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왜곡하는 대표적 증언이 고 문옥주 할머니 이야기다. 일본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와 전장의 성, 1999년>을 시작으로, 한국 이영훈 전 교수 <반일 종족주의, 2019년>, 미국 램지어의 이번 논문 <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2021년>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할머니 증언을 어떻게 왜곡했을까? 그리고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 “문옥주는 자유인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문옥주는 192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본인 작가 모리카와 마치코는 문옥주와 3년간의 인터뷰를 토대로 <문옥주, 버마전선 방패사단의 위안부였던 나>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발간됐다. 16살이던 1940년, 문옥주는 귀가 중 헌병대에게 붙잡혀 위안부로 끌려간다. 중국과 미얀마에서 성 노예 생활을 하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1946년 귀환했다. 그녀의 귀환을 두고 하타 이쿠히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얀마의 문옥주도 동료와 귀향하기 위해 사이공까지 갔다가, 항해가 위험한 것 같다고 판단, 중지하고 돌아갔다는 것에서 전쟁 중에 일을 그만두고 고국에 돌아간 위안부는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위안부와 전장의 성, 395쪽, 1999년)

이영훈은 여기에 더해 문옥주가 성 노예는 커녕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무를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와 위안부 일동은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일본군을 위안하는 신성한 책무를 부여받은 제국의 위안부다”라는 의식을 가졌습니다.”(반일 종족주의 326쪽, 2019)

두 사람은 문옥주가 증언한 미얀마 탈출기, 그리고 군사 법정 진술을 가져와 마치 위안부가 언제든 귀환할 수 있었던 자유인, 또 위안부를 신성한 책무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문옥주는 돈을 많이 벌었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빼놓지 않는 주장 중의 하나가 위안부는 ‘돈을 많이 벌었던 자발적 매춘부’라는 주장이다.

하타 이쿠히코는 위안부가 일본 공창 수입의 5배 이상, 평양 유곽 여성보다 10배 이상 많은 돈을 벌었다며 그 사례로 문옥주 증언을 든다.

“문옥주의 경우는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는 것만으로 3년이 안 되어 2만 5천 엔을 저금하고, 그 가운데 5천 엔을 가족에게 송금했다. 지금이라면 1억 엔 전후의 큰돈이다.” (위안부와 전장의 성, 392쪽)

램지어도 “계좌를 둔 한국인 위안부들 가운데, 가장 대담하게 잘했던 이는 문옥주 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문옥주 원본 증언집이 아닌 역사수정주의적 글만 게재하는 익명의 일베 같은 블로그에서 선별적으로 짜깁기되고 왜곡된 문옥주 증언을 든다.

“어머니에게 안락한 삶을 살게 해드릴 수 있을 거 같다. 나는 매우 행복하고 뿌듯했다. 저금통장은 나의 보물이 되었다.”(태평양 전쟁 중 성을 위한 계약, 6쪽, 2021년)

일본군 위안부 故 문옥주 할머니

■ 문옥주가 실제 전한 말은?

먼저 문옥주가 미얀마 위안소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손님으로 오는 군의관에게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였다. “귀국하기 위한 증명서가 필요한데요. 손에 넣을 수 없을까요?”라고, 그러자 그 군의관은 “내가 폐병이 났다는 진단서를 써주겠다. 건강해 보이면 거짓 진단서가 들통 나서 내 목이 날아가니 꼭 병자처럼 행동해요.”라고 당부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폐병에 걸려 군인들에게 병이나 옮기는 쓸모없는 몸을 만들지 않고서는 문옥주는 위안부 생활을 끝낼 수 없었다. 이것이 문옥주가 전하는 진심 아닐까?

그럼 문옥주는 “우리도 일본인이다. 창녀가 아니다” 이런 말은 군사 법정에서 또 왜 했을까? 문옥주는 위안소에서 칼을 빼 들고 행패를 부린 군인과 승강이를 벌이다 살해한다.

“조선인인 내가 일본 군인을 죽였으니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되지 ~~~~ 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재판관은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적으로 얼굴색이 싹 변했다. 뭔가 좋은 느낌이 들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중에서

문옥주가 ‘일본인’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우리는 일본인이다.”라고 발언했다고 읽히지 않는다. 그런데 역사수정주의자들은 그렇게 믿는다.

역사수정주의자들은 또 위안부 수입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하면서 ‘거액’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역시 위안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재론의 여지 없는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평가된다. KBS와 공동연구를 진행한 성공회대 강성현 교수는 당시 일본군 점령지에서 급격하게 치솟은 전시 초인플레를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문옥주의 군사우편저금 원부 조서

강 교수는 “1944년 4월과 5월 문옥주 저금액 20,560엔을 당시 도쿄의 엔화 가치로 환산해 보면 도쿄 물가지수는 152, 양곤은 30,629이어서, 문옥주 저금액이 도쿄에서는 102엔에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오늘날의 가치’라는 분석 자체가 의미 없는 숫자 놀음이라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옥주는 이 돈마저 돌려받지 못했다.

“역사부정주의자들이야말로 1944-45년에 업자들이 아닌 일본군 ‘위안부’가 한 강제저축을 돌려받거나 집(조선)으로 송금했던 돈을 본가에서 인출한 사례를, 그것도 오늘날의 가치 운운할 만큼 ‘거액’의 사례를 근거로 들어 입증해야 한다.”고 강 교수는 반론했다.

■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일상이 전장이었으니 전쟁 또한 삶이었다. 살아남았으니 살고자 했다.”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증언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 많은 고민을 안겨준다.

문옥주 할머니 회고록 작가 모리카와는 1982년 8월 문옥주가 코를 골며 자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하였다고 했다. 모리카와는 “”당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은 당신 개인의 수치도, 당신 집안의 수치도, 동네의 수치도 아닙니다. 그것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였습니다.”라고 말해주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문옥주 할머니는 1996년 10월 26일 생을 달리했다. 영면에 든 할머니는 본인의 증언이 ‘대목, 대목’ 잘려 찬탈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까?

<2012-04-12> KBS NEWS

☞기사원문: [日역사부정 실체]③ 日-美-韓 역사수정주의 ‘문옥주 왜곡’…“이쯤 되면 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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