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톺아보기 25]
일본의 침략전쟁 비용까지 강제한 ‘국방헌납’
– ‘애국기’ 헌납
1932년 4월 17일 오전 11시, 애국기 헌납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가키 조선총독을 비롯해 총독부 주요 관료, 군사령부 수뇌부와 함께 한상룡, 윤치호 등 친일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제10호 조선’과 ‘제20, 21호 조선’이 표기되어 있는 <방공독본>. 번호와 기종, 헌납자(지역)가 기재되어 있다. 일본은 물론 조선과 타이완 등 식민지에서 비행기가 헌납될 때마다 순서대로 호수와 이름을 붙였다.
‘1936년 5월 15일’은 오기다. 다만 1932년 5월 15일 오전 10시, ‘제20, 21호 조선호’의 명명식이 여의도 비행장에서 거행되었고 기념엽서에도 이 날짜의 엽서인(印)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참고하여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 교과서에 잘못 기재된 사례. ‘애국 헌납기 1444호’는 지역명이 붙여진 ‘경기시흥’호이다.
일본인 유력자들과 행정기관장을 중심으로 시작된 애국기 헌납운동은 문명기가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하면서 조선인의 애국운동으로 바뀌었다. 그는 1934년 자신이 경영하던 금광을 일제의 주선으로 미쓰코시三越 재벌에게 12만 엔에 인계하는 대신 1935년에 육군기(애국기)와 해군기(보국기) 각각 한 대씩을 헌납하는 비용인 10만 엔의 국방헌금을 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친일 부호들이 경쟁적으로 국방 헌납에 참여했다.
김용주는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와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이 비행기 헌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당시 조선임전보국단 경상북도지부 상임이사와 사업부장, 국민총력경상북도연맹 평의원과 국민총력경상북도수산연맹 이사로 재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사히신문에 기명 광고를 게재해 비행기 헌납을 선동하기도 했다.
“여러분의 적성으로 된 애국 제10호기 조선호가 도착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사히 오게 된 것은 여러분께 깊이 감사를 올립니다.”
– <매일신보>, 1932년 4월 15일자 2면
1932년 4월 14일 정오 무렵, 경성 하늘에 이와 같은 오색(五色) 선전문을 뿌리는 비행기 한 대가 나타났다. 식민지 조선 ‘최초의 헌납기’ 조선호가 첫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선호는 경성 상공을 한 번 돌더니 조선군사령부 수뇌부와 체신국 간부들의 환영을 받으며 여의도 비행장에 곧 착륙을 하였다.
일제는 만주사변(1931년) 후 본격적인 대륙침략을 하기 위해 조선을 병참기지화하는 한편, 부족한 전쟁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국방헌납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애국기 헌납’이다.
‘애국기’는 지역민이나 기업, 단체 그리고 개인이 낸 국방헌금으로 생산한 군용 비행기를 일컫는데 육군용은 애국기(愛國機), 해군용은 보국기(報國機)라 불렀다. ‘애국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종에 따라 1대에 최저 6만 원(현재 약 6억 원)에서 20만 원에 이르는 거액이 필요했다. 따라서 부호 몇 명의 힘으로 충당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각 지역 조직과 단체를 동원한 모금운동이 조선 전 지역에 벌어졌다.
일본인 유력자와 행정기관장이 나서서 ‘애국기 헌납 운동’을 시작한 후 ‘1군(郡) 1기(機) 헌납운동’을 주도한 문명기를 필두로 조선인 헌납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1937년 중일전쟁 발발후에는 애국기 헌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김연수, 문명기, 최창학, 김용주 등 조선인 부호들을 비롯해 부·도·군민 등의 지방단위, 학교나 종교단체, 전쟁협력을 위해 조직된 관변·동원단체 등 다양한 개인과 단체가 애국기 헌납운동에 참여했다.
전쟁이 확대될수록 일제는 물자공급과 항공전 수행을 위해 더 많은 비행기 헌납을 요구했다. 일반인은 물론 초·중등학생에게 헌금을 강요하고 애국부인회를 이용하여 국방헌금을 위한 바자회를 개최했으며 심지어 기생들의 화대까지 ‘애국기 헌금’에 동원되었다. 일제는 연일 ‘미담사례’를 홍보하고 헌금액과 헌금자의 명단을 신문에 게재하였다. 일본의 패배로 끝난 1945년까지 식민지 조선인의 피와 땀의 강요로 헌납한 ‘애국기’는 수백 대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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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민 자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