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점]
한 평생 일본의 부조리에 맞서 싸운 BC급 전범 이학래 회장 숨을 거두다
• 김영환 대외협력실장
3월 28일 마지막 조선인 BC급 전범으로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기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은 이학래 동진회 회장이 일본에서 한 많은 96년의 인생을 마감했다. 이학래는 1925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열일곱의 나이에 포로감시원이 되었다. 1942년 봄, 그는 면장으로부터 남방 포로감시원을 모집하는 데 근무기간은 2년, 한 달 월급은 50원이라는 말을 듣고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했다. 2년만 고생하면 징용과 앞으로 시행될 징병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학래와 같이 포로감시원으로 지원한 조선 청년들은 부산에 있는 일명 ‘노구치(野口)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들은 민간인 군무원 신분임에도 철저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는데, 반복적으로 주입된 내용은 “포로는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것 이었고,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사실은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 돌입한 뒤 연합군 포로를 감시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의 청년들을 포로감시원으로 모집했다. 이때 ‘모집’된 조선 청년은 3,000여 명. 형식상으로는 ‘모집’이었으나, 실제는 지역별로 인원을 배정한 후 각 지역의 관리와 경찰이 할당된 인원을 동원했다.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상의 강제동원이었다. 이학래는 타이에서 영화 〈콰이강의 다리〉로 유명해진 ‘죽음의 철로’, 타이·미얀마철도 건설현장에 투입된 1만 1천 명의 포로들을 대면했다. 포로감시원은 일본군에 소속되었으나 이등병보다 못한 일본군의 최말단 신분이었다. 그들에겐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으며, 시키는 대로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은 전범으로 체포되었다.
이학래는 사형을 선고받아 8개월 동안 사형수로 살았으나 가까스로 감형되어 사형은 면했지만 도쿄의 스가모형무소로 보내져 1956년 석방되었다. 아무런 생활기반도 없는 일본 땅에서 석방되었지만 ‘전범’의 낙인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자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이 박탈되어 원호법, 은급법 등 일체의 보상에서 제외되었다. 이 과정에서 허영과 양월성등 두 명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 을 끊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으로 ‘일본인’으로 죄를 지었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으로부터 철저하게 버려진 것이다.
1955년 BC급 전범 70여 명은 ‘동진회’를 결성하여 일본 정부를 상대로 억울하게 죽어간 동료들과 자신들의 명예회복, 원호와 보상을 요구하며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소송투쟁은 물론이고 일본의 총리가 바뀔 때마다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입법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이학래 회장은 다행히 한국 정부로부터는 강제동원 피해자로 인정받아 명예회복이 되었지만, 일본 정부와 국회로부터는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했다.
지난 4월 1일 일본 국회에서 열릴 예정이던 BC급 전범문제 해결을 위한 집회는 이학래 회장의 추모집회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참가한 일본의 여야 국회의원 10여 명은 하나 같이 이학래 회장 생전에 입법을 이루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고인의 죽음 앞에서는 허망하게 들릴 뿐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13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범이된 조선청년들-한국인 포로감시원의 기록’이라는 특별전을 개최하여 한국사회에 이 문제를 환기한 바 있으며, 2017년 이학래 선생의 회고록 <전범이 된 조선청년>을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