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들어선 봄날, 4월 9일(금) 오후에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를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돌모루홀에서 만났다. 김진혁 교수는 EBS PD로 재직 중이던 2013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1년 넘게 제작하다 회사로부터 갑작스레 제작 중단 명령을 받고, 결국 그해 EBS를 퇴직하였다. 8년의 세월이 흐른 올해 과거취재했던 반민특위 관련자들을 다시 만나며 재구성한 다큐영화 ‘여파(Aftermath)’를 4월말에 열리는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하였다. 김진혁 교수를 만나 반민특위 다큐 제작 중단에서 ‘여파’ 출품까지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EBS 재직 당시 반민특위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 언제이지요?
● 2012년부터 시작해서 2013년 초까지요.
● 아이템 선정은 본인이 했나요? 그 이유는요?
● 제가 했습니다. 해방공간에서의 일들이 궁금했어요. 1945~50년까지. 뒤지다보니 반민특위가 있더라구요. 미군정도 그렇고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반민특위가 눈에 딱 들어오잖아요. 그래서 한 번 연출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고, 연출적으로는 <바시르와 왈츠를>이라는 유대인 감독이 만든, 자신들을 반성하는 애니메이션 다큐에 몰입된 거죠. 두 가지를 섞으면 반민특위에 있었던 일을 비용걱정 안하면서도 눈에 띄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용도 좋고 연출가로서 욕심도 생기고 했어요.
● 짧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좋겠습니다. 나중에 저희와 함께 다시 한번 작업해보시죠.
● 그러면 애니메이션 감독을 따로 영입해서 해야 되는데요. 제가 총연출하고요.
● 2012년도에는 어떤 다큐들을 만드셨어요?
● 2012년에는 이거(반민특위) 하나 만들었다고 봐야 해요. 그 밖에도 지식채널, 과학다큐 만들었는데 지식채널 빼고는 그다지 유명하진 않아요. 지식채널을 만들 때 <잊혀진 대한민국>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어서 근현대사를 좀 다뤘죠.
● 학창 시절엔 역사에 관심이 있었습니까?
● 대학 다닐 땐 역사에 대해서는 보통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 반민특위에 대해 못 들어 보셨어요?
● 알고는 있었죠. 옛날에 친일청산에 실패했어. 반민특위가 제게는 이 정도였죠. 대학교 때는 깊이 있
게 역사를 알지 못했어요. 저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부르주아적이에요. 지금도 사실 근본적으로는 다르진 않다고 생각해요.
● EBS에서 사표를 쓰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 결정적인 계기는 사실 두 번째여서. 2008년에 광우병 파동에 관해 만들었다가, 그것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6개월에서 1년 동안 굉장히 힘들었어요. 회사 가기가 싫더라고요. 사람을 보기가 싫고, 대인기피증 유사한 감정 상태였죠. 한번 더 이러니까 회사라는 공간에 더 있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EBS에 출근하면 뭔가 공황상태가 되었던 거죠.
● 2008년에는 어떤 압력이 있었나요?
● 방송을 내렸잖아요. 2008년에는 방송을 했는데 내린 거고, 2012년은 방송이 나가기 전에 끊은 거고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참여정부 때 임명했던 사장이었고, 나중에 개인적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해서 제 내적으로는 상처를 스스로 봉합할 명분을 얻었었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요. 또 하나 이명박 정부가 끝날 때 쯤 그랬다면 제가 참았을텐데, 박근혜 정부가 시작할 때 그러니까 견적이 안 나오는 거예요. 몇 년을 버텨야 하나.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대선 직후라 다 비슷한 기분이었을 거예요. 내가 저 사장하고 또 5년을 지낼 걸 생각하니.
● 그럼 한예종에 가시게 된 경위는요?
● 사표를 쓰느니 마느니 고민하고 있었는데, 지금 있는 곳에 결원이 생겨 교수 공채를 한다는 한예종 측의 얘기를 들었죠. 간헐적으로 특강은 했었지만 선생님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해본 적이 없는데 그땐 회사를 떠나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했어요. 회사에 그만큼 있기 싫었거든요. 하지만 말 그대로 공채라 채용이 보장된 것은 당연히 아니었기 때문에 최종 합격하기까지 회사 동료들에겐 말하지 않았어요. 또 당시 EBS 피디협회에서 제 문제로 피켓시위를 하는 등 힘을 써 줬던 상황이라 제가 이직
을 결정한 것이, 사고는 제가 치고 저 혼자 도망간 모양새가 되었죠. 제 나름대로는 제가 나 가는 것이 저 자신만이 아니라 EBS의 부담을 덜어주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쨌거나 동료들에겐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입니다. 실제로 저로 인해 당시 제 편을 들었던 다수의 피디들이 회사로부터 근태 문제나 외부 강의 등에 대해 집단적으로 강하게 압박을 받았어요. 일종의 의도적인 표적 감사였죠. 그런 짓을 한 당시 EBS 임직원들이 가장 문제이지만 분명 제게도 큰 책임이 있죠.
● 한예종 근무는 어떴습니까?
● 처음에는 만만하게 생각했어요.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시간이다. 한예종은 방송국에 있는 것처럼 저를 간섭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죠. 그게 가장 매력적이었죠. 학생들하고 관계 맺는 게 힘들어요. 한 학년당 20여 명인데, 개성이 강한 친구들이어서 더 힘들어요. 일반종합대학 신방과에 갔으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재미는 있습니다. 배우는 것도 많고 자극도 많은데. 제 에너지의 한계가 있는데 나는 이 정도만 쓸 거라 생각했는데, 더 많이 신경이 써지더라고요.
● 다큐멘터리 제목을 여파로 지은 이유는?
● 원래는 역사적인 개인사로 시작했는데, 내용이 좀 매력적이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제가 들어가기가 싫더라고요. 그래서 안 들어갔다가 설명이 잘 안 되어서 조금 넣었다가 그래도 뭐가 좀 안 되는 거 같아서. 뭐가 비어 있는 듯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여파’라는 말이 실처럼 쫙 끼워주는 느낌이 나야 하는 거 같아요. 이게 반민특위 후손들분이 특위의 와해로 어떤 여파로 자신의 삶이 영향을 받고, 그걸 뭔가 만들겠다는 저는 그것 때문에 다시 여파를 받고 그리고 개인들만의 여파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여파인거죠. 그걸 기억하던 기억하지 못하던 상관없이. 일단 두 글자라는 점이 맘에 들었어요. 예전에 긴 제목을 써봤는데 반응이 안 좋더라고요. 해직언론 다큐의 제목이 “7년-그들이 없는 언론”이었는데, 다들 7년~OO 이러기만 하더라고요.
여파는 사실 처음부터 생각했던 게 아니라 음악을 선곡하다 어떤 음악이 귀에 들어와 확인했더니, 애프터매스(Aftermath)이더라구요. 에프터매스가 계산 이후잖아요. 그게 영어로 여파죠. 재밌죠. 이승만 입장에서는 계산 끝난 이후죠. 이게 저는 양가적인 의미를 담으려 노력했는데, 너무 몰아가거나, 민족적인 이런 것도 좋지만 입체감이 안 들고 현실감이 안 나서 담는게 좋은데, 여파라는 말이 이승만의 계산 끝난 이후라는 뜻이니, 세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좋다고 생각했어요.
● 여파의 첫 시작은 언제부터인가요?
● 시작은 제가 한예종에 가서 조그만 카메라를 하나 샀어요. 그때 김정륙 선생님하고 노시선선생님을 임시정부기념사업회에서 잠깐 뵈었어요. 인터뷰하려고. 그때 첫 촬영을 하고 안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돈이 없으니까. 제가 기존에 만들던 거는 애니메이션 다큐라서, 이분들의 증언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부분에 앞서 도입부에 나오고 인터뷰 내용은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만들생각이었어요.
● EBS를 그만두고 한예종을 갔지만 이 다큐는 교수님 이름으로 완성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는 거죠?
● 또 마침 여기저기서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사람들도 있고, 여러 반응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예전 원고도 주고 했지만 설왕설래하다 제대로 되진 못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언론노조에서 해직언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데 연출해달라는 요청이 왔습니다. 그 요청에 저도 감정이입이 많이 되더라고요. 반민특위 아이템보다 먼저 해직언론 다큐를 만드느라 시간이 가고 2017년에 발표하고, 2018년에 노시선 선생님과 전화연락이 되었어요. 이분들에겐 항상 마음의 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조차도 이분들의 인터뷰를 담아서 작품을 해보겠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근데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심장이 벌렁벌렁했어요. 빚쟁이 느낌이랄까, 미안함 때문에. 그 전에 김정륙 선생님 아드님이 돌아가셨을 때도 직접 연락 못 받고 신문기사를 보고 깜짝 놀라 새벽에 가서 조문했지요. 계속 저는 빚이 있는데, 인터뷰만으로는 도저히 작품을 만들수가 없다. 만들어도 누가 보겠느냐는 생각이었죠. 지금 결국 “이걸 누가 봐” 하는 버전으로 만든 겁니다. 근데 이제 노선생님 쓰러지시는 걸 보고 무조건 찍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진행했습니다.
● 여파 출품의 계기는요?
● 만들기 시작했으니, 마무리지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죠. 이분들한테 제가 생각해서 만들고자 하는 버전은 아니지만(제가 EBS를 나와서는 만들 수 없는 버전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하고요), 노선생님의 반응을 보면서 이분들은 “인터뷰를 했으면, 뭘 내놔야지” 하는 생각이어서, 복잡한 게 하나도 없고 일단 찍어갔으니 뭘 하나라도 내놔라 뭐 이런 거죠. 알겠습니다, 내놓겠습니다. 했던 거죠.
● 마지막 날에 영화제 출품을 하셨다면서요?
● 저에게 뭔가 계기가 있어야 했죠. 인터뷰 말고 이렇게 긴 시간을 찍은 걸 유튜브에 턱 올리면 아무도 안 볼 것 같았습니다. 이런 작품은 권위를 얻어야 해요. 그래서 영화제만 계속 확인하고 있었어요. 작년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하고 부산영화제에 출품했어요. 안됐어요. 훨씬 더 짧고 효과를 많이 삽입하고, 덜 지루하고 자극적으로 화면 배치도 바꿔가며 만 들었지만 안 되더라고요. 제가 느끼기엔 방송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영화 씬에서는 차분하게 만들어서 뭔가 묵직한 진정성에 소구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영화제 출품 작품은) 그래서 전략을 수정해서 냈지요. 그래도 기대는 안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략을 수정하길 잘했구나. 근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영화제에서 인정받을 수 있
는 확률은 높아지지만, 일반인이 볼 확률은 더 낮아집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백년전쟁>이 딱 좋거든요. 사실 그걸 영화제에 출품하면 절대 안 뽑아줘요. <백년전쟁>처럼 만들려고 어떻게 해보다가 포기하고 영화제 버전으로 했는데, 감사하게도 출품하게 되어 후손분들에게 면목이 좀 섭니다.
● 수상 여부는 언제 알 수 있나요?
● 제가 정확하게 영화제에서 무슨 상을 주는지는 잘 모르고요. 경쟁은 아니고 초청 파트로 들어갔어요. 어느 섹션이든 상관없이 주는 상, 섹션별로 주는 상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상을 주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잖아요. 화제성, 명분, 시의성이 있을텐데, 아마 명분쪽일 것 같아요. 5월 8일에 영화제가 끝나요. 사실, 여기 초청받은 것 자체가 상이죠.
● 다큐에 담진 못했지만 남기고 싶은 얘기가 있지 않을까요?
● 다큐에 담은 분들의 내용은 거의 빠뜨리진 않은 것 같아요. 한 분을 빼놓고 했던 게 가끔 뵐 때마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고요. 반민특위 후손분들 중에서 어떻게 보면 못 나오는 분들의 이야기가 더 있을 수 있는데, 제가 적극적으로 취재하듯이 접근하진 않았거든요. 이분들의 삶에 개입하는 걸 최소화했어요. 저는 기자가 아니고 다큐멘터리 만든 사람이라. 물론 다큐멘터리는 어쩔 수 없이 삶의 영향을 주고받기는 하지만, 이걸로 이슈파이팅을 하려는 목적은 아니어서요.
● 연구자이자 교육자이자,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 당분간 쉬고 싶어요. 한편으로 뭘 만든다면, 러닝타임도 짧고 미시적인 걸로 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어요.
● 저희들에게는 반민특위 영상이 귀중한 영상이어서 나중에 공유하실 수 있는 거죠?
● 그럼요, 당연하죠. 얼마든지요.
● 저희들이 바라는 것은 반민특위의 복권이지요. 정철용 선생님이 오셔서 유언처럼 남긴 말씀이 독립
운동은 안했지만 반민특위는 했으니 그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반민특위 활동으로 훈장이나 표창을 받을 수 있겠나? 하셨어요. 언젠가는 반민특위 자체가 복권되는 그날을 기대합니다.
● 원래는 2012년 만들 때 반민특위를 극화했었어요. 역사 애니메이션이죠. 노일환 의원 연설하는 장면,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 잡으러 가는 장면 등이 나오죠. 앞부분에 김정륙, 노시선 선생님 인터뷰 나오고요. 오히려 반민특위는 상업영화 쪽으로 개봉을 염두해두고 만들어져도 좋을 것 같아요. 로토스코핑(애니메이션 표현을 최대한 현실과 유사하게 끌어올리고자 애니메이션과 실사 이미지를 합성시키는) 기법에 의한 역사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반민특위’가만들어지는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 끝으로 민족문제연구소 구성원과 회원들에게 해주실 말씀은?
● 민족문제연구소는 뿌리 깊은 나무 같아요. 오디오파일이나 필요한 연구자료 등이 아쉬워 연락하면 바로 해결되잖아요. 연구소 회원으로 계시는 것은 항상 지켜주시는 거니까 자부심을 가질 만합니다. 작업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