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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뉴스] 일제에 맞서 싸웠지만 서훈 못 받는 ‘녹두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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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8년 서울 종로에서 전봉준 동상 제막식이 진행됐다.

[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이 지정된 지 3년째를 맞았다. 그러나 혁명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은 지지부진하다.

11일 오후 3시 서울 경복궁 흥례문 광장에서 제127주년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열린다. 동학군은 지난 1894년 5월11일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뒀다. 2019년 정부는 5월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매년 정부 주최 기념식도 열린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동학 세력이 주축이 돼 일으킨 대규모의 민란이다. 동학농민운동 또는 동학농민전쟁이라고도 불린다.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1차와 2차로 나뉜다. 1차에서 동학군은 탐관오리의 폭정에 저항, 궐기했다.

2차는 달랐다. 당시 일본군은 1차 혁명 진압을 돕겠다며 조선에 주둔해 내정간섭을 벌였다. 동학군은 일본군을 몰아내자는 취지에서 2차 혁명을 일으켰다. 최시형과 전봉준 등이 주축이 돼 관군·일본군에 저항했다. 치열하게 싸웠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관군·일본군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차 혁명이 항일운동이었다는 점은 ‘전봉준 판결 선고서’에도 명시돼 있다. 선고서에는 “전봉준은 일본 군대가 대궐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필시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병탄(倂呑·남의 재물이나 영토를 제 것으로 만듦)하고자 하는 뜻인 줄 알고 일본군을 쳐서 물리치고자” 군대를 일으켰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전봉준·최시형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3월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는 전봉준·최시형에 대한 독립유공 공적심사 요구에 “활동 내용이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하다”고 반려했다. 학계 의견을 청취한 후 서훈 여부를 재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이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료에 의거,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차 혁명에 참여했다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사살·화형 등을 당한 순국자는 총 111명이다. 싸우다 전사하거나 자결한 이들까지 합치면 119명으로 전해졌다. 이 중 단 한 명도 서훈을 받지 못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1910년 한일강제합병 이전의 활동은 독립운동으로 포함되지 않는 걸까.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기준을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항거한 인물로 규정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도 이 기준에 포함된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1962년부터 지난해까지 을미의병 참여자 120명을 서훈했다. 을미의병은 1895년 우리 땅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조직됐다. 동학농민혁명 직후다. 을사의병(1905)·병오의병(1906)·정미의병(1907) 등의 참여자들까지 합치면 현재까지 2682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박용규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차 동학농민혁명은 항일구국투쟁이다. 교과서에서도 명시돼있는 내용”이라며 “양반이 주축이 된 의병운동은 국가보훈처에서 서훈했다. 같은 시기, 농민이 주축이 된 동학농민혁명을 외면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국가보훈처는 토론회와 학술회의 등을 통해 역사학계의 목소리를 듣겠다는 방침이다. 지난 6일 ‘전봉준·최시형 등 제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에 대한 독립운동 서훈의 당위’ 학술토론회가 국회에서 진행됐다. 오는 20일에도 한국역사연구회 주최, 국가보훈처 후원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과 서훈 관련 학술대회가 열린다. 국가보훈처 측은 “독립운동 공적이 있는 분들에 대해 일제 강점기 원전 자료를 바탕으로 공적심사위원회의 심도 있는 논의를 통해 포상이 결정된다”고 덧붙였다.

soyeon@kukinews.com

<2021-05-11> 쿠키뉴스

☞기사원문: 일제에 맞서 싸웠지만 서훈 못 받는 ‘녹두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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