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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나라 망한 을사년에 태어난 도서관계의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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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경북대 초대 도서관장, 원암 이규동 ①

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조선인 중 근대도서관에서 일한 최초의 ‘사서’는 누구일까? 기록으로 확인 가능한 최초의 조선인 사서는 송재(松齋) 서재필(徐載弼)이다. 서재필은 1888년 가을부터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육군 의학도서관(the Library of the Surgeon General’s Office)에서 ‘사서’로 일했다. 육군 의학도서관에서 서재필은 동양에서 입수한 의학서적을 담당했다.

이 땅에서 일한 최초의 조선인 사서는 누구일까? <조선총독부 직원록>에 의하면 경성도서관 종로 분관(지금의 종로도서관)에서 일한 이긍종(李肯鍾)이다. 일제강점기 ‘사서 자격증’을 처음 발급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조선총독부도서관에서 일한 최장수(崔長秀)다. 최장수는 1937년 조선인 중 최초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았다. 최장수에 이어 두 번째로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한국 도서관의 아버지’ 박봉석(朴奉石)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은 10만 명을 헤아린다. 그중에 ‘사서 자격증’을 처음 발급받은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원암(圓庵) 이규동(李揆東)이다.

1905년 을사년에 태어난 원암

▲ 원암 이규동 1905년 충청북도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영어 교육가로 살았다. 경북대학교 영어교육학과 교수를 하며 우리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원암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집안은 원암문화재단과 훈민정음학회를 이끌고 있다. 문자가 없는 민족을 위한 한글 보급에 힘쓰고 있다. ⓒ 기파랑출판사 <시대의 스승 원암 이규동> 1

이규동은 1905년 4월 28일 충청북도 영동읍 화신리 291번지에서 태어났다. 원암의 아버지가 서른일곱, 어머니 서른넷에 낳은 외동아들이었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긴 을사년, 한국 도서관계에 별이 되는 인물이 여럿 태어났다. 이재욱, 박봉석, 강진국과 함께, 이규동도 1905년 을사년 생이다.

1916년 4월 5일 이규동은 영동보통학교에 입학해서 1919년 2월 21일 졸업했다. 1920년 1월 29일 그는 이갑희(李甲姬)와 결혼했다. 결혼하고 한 해 뒤인 1921년 5월 2일 경성제이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관립 중등학교에 진학하려는 학생이 늘자, 1921년 5년제로 개교한 학교가 경성제이고보다. 이규동은 경성제이고보 1기생이다.

경성제이고보는 훗날 ‘경복중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경복궁 근처에 있기 때문에 지은 이름이다. 경성에서 두 번째 개교한 관립학교라는 의미로 학교 모자(교모)에 백선 2개를 둘렀다. 백선이 2개인 평양고등보통학교와 구분하기 위해 굵은 백선 위에 가는 백선을 둘렀다. 경성제이고보 시절 원암은 어머니를 잃고(1922년), 첫 아이를 낳았다(1925년).

경성제이고보 시절 원암은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언어학자이자 영어교육자로서 삶을 이때부터 예비한 모양이다. 최재서(崔載瑞)와 이숭녕(李崇寧)이 이규동과 동기다. 경성제이고보 1기인 이숭녕, 최재서, 이규동은 국어학자, 영문학자, 영어교육자로 나란히 이름을 날렸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이규동과 달리, 최재서와 이숭녕은 경성제국대학에 진학했다. 경성제이고보를 졸업한 최재서는 경성제대 예과와 법문학부 영문과를 거쳐 영국 런던대학에서 공부했다. 해방 후 연세대, 동국대, 한양대 교수를 차례로 지낸 그는 영문학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재서는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이숭녕은 경성제대 예과와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진단학회 활동을 거쳐 해방 후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숭녕은 국립도서관 이재욱 관장의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 후배이기도 하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유학 시절

▲ 히로시마고등사범 시절 1926년 히로시마고등사범 입학 당시 이규동의 모습이다. 꼿꼿한 자세로 책상에 앉은 모습에서 공부에 대한 원암의 마음가짐을 볼 수 있다. 만성 폐렴으로 힘겨운 일본 유학 시절을 보낸 이규동은 1930년 3월 7일 영어과를 졸업했다. ⓒ 역락출판사 <참스승 원암 이규동>

1926년 3월 21일 경성제이고보를 졸업한 이규동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広島高等師範學校)로 유학을 떠났다. 경성제이고보 1기 졸업생 66명 중 단 4명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중 한 명이 원암이다. 그해 4월 이규동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지금의 국립 히로시마대학교) 문과 제2부에 입학했다. 문과 제2부는 영어가 전공이었다.

이규동의 히로시마고등사범 11년 선배가 외솔 최현배(崔鉉培)다. 한글학자의 길을 걷은 외솔은 히로시마고등사범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외솔과 울산 동향에 히로시마고등사범을 함께 졸업한 박관수(朴寬洙)는 조선으로 돌아와 대구사범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그 제자 중 한 명이 박정희다. 박관수는 일제강점기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시절 이규동은 오사다 아라타(長田新) 교수를 통해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를 알게 되고, 평생 사표로 삼았다.

“모든 것을 남을 위해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Alles für Andere, für sich Nichts)

묘비명처럼 살다 간 페스탈로치의 삶은 이규동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일본 유학 시절 이규동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1926년 7월 4일 그는 다카노바시(鷹野橋)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개신교도가 되었다.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우리 도서관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이가 있다. 바로 길영희(吉瑛羲)와 김원규(金元圭)다. 한국 중등교육사에 빛나는 업적을 지닌 이들은 ‘독서실’이 아닌 제대로 된 ‘학교도서관’을 운영한 도서관 선구자였다. 길영희와 김원규는 이규동의 히로시마고등사범 한 해 선배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출신으로 명성을 날린 길영희, 김원규, 이규동이 한국 도서관 역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것도 이채롭다.

1930년 3월 7일 히로시마고등사범을 졸업한 이규동은 조선으로 돌아와 4월부터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교유(敎諭 교사)로 부임했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북고등학교)는 세 번째 문을 연 관립학교로, 한강 이남의 명문으로 손꼽혔다.

고국에서 교편을 잡다

▲ 대륜중고등학교 원암은 1942년 1월 대륜학교 교사로 부임해 영어를 가르쳤다. 그 시절 대륜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이만섭(전 국회의장)은 이런 회고를 남겼다. “이규동 선생님은 혹시 형사들이 복도에서 감시를 하지 않나 살펴 가며, 수업 시간에도 우리말을 하곤 했다. 특히 이규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 사육신에 관한 얘기를 하시면서 우리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주기도 했다.” ⓒ 백창민

대구고보 시절 이규동은 영어 외에 비공식적으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학생에게 민족의식과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전 국무총리 신현확(申鉉碻), 전 부총리 김준성(金埈成), 쌍용그룹 창업주 김성곤(金成坤), 전 공화당 의장 백남억(白南檍), 전 법무부 차관 오탁근(吳鐸根)이 대구고보 시절 원암이 가르친 제자다. 이중 김성곤은 1959년 국민대학교를 인수했다. 국민대 ‘성곡’도서관은 김성곤의 호를 따서 도서관 이름을 지었다.

대구고보에서 7년 동안 교사로 일한 이규동은 건강 문제로 1937년 학교를 그만뒀다. 원암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집에서 요양하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요양하던 그는 1942년 1월 30일 대륜학교(지금의 대륜중고등학교)에 강사로 부임해서 교유가 되었다.

대륜학교는 1905년 대구에서 문을 연 도서관 ‘우현서루'(友弦書樓)의 명맥을 이은 학교다.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가 문을 연 ‘우현서루’는 1911년 일제의 압박으로 문을 닫았다. 우현서루 건물에서 문을 연 학교가 ‘교남학교'(嶠南學校)다. 교남학교는 1941년 친일파 서병조에게 인수되면서 ‘대륜학교'(大倫學校)로 이름을 바꿨다.

대륜학교에 몸담은 이규동은 1942년 <성서조선>의 독자라는 이유로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계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성서조선>은 무교회주의를 지향한 김교신(金敎臣)과 함석헌(咸錫憲)이 주도한 잡지다. 이규동이 경찰에 연행된 이 해에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 13일 이규동은 대륜중학교 5대 교장으로 취임해서 1947년까지 일했다. 그가 대륜을 떠날 즈음인 1947년 8월 체육교사 한 명이 부임했다. 이규동이 경북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옮긴 것이 1947년 9월 10일이니까, 체육교사와 함께 근무한 기간은 한 달 남짓이다. 훗날, 이 체육교사는 한국을 뒤흔든 10.26의 주역이 된다. 그의 이름은 김재규(金載圭)다. 32년 후 ‘남산의 부장’ 김재규는 박정희를 쏘고 유신 체제를 무너뜨린다.

대륜 시절 이규동의 제자 중에 조용수(趙鏞壽)와 이만섭(李萬燮)이 있다. <민족일보> 사장이었던 조용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이만섭은 국회의장이 되었다. 김재규와 10.26 거사를 함께 한 박선호 역시 대륜 출신이다.

대구사범에서 경북대학교 교수로

▲ 이규동과 그의 가족 1950년대 중반 경북대 영어과 교수로 재임한 시절, 사범대 가교사 앞에서 찍은 이규동의 가족사진. 당시 둘째 딸 기남이 가정교육과에 다니고 있었다. 허허벌판에 가건물로 출발한 경북대학교의 초창기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역락출판사 <참스승 원암 이규동>

이규동이 대륜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교장으로 일했던 사람이 이효상(李孝祥)이다. 대륜학교 교장과 경상북도 학무국장, 경북대학교 초대 문리대학장을 역임한 이효상은 정계에 진출해서 국회의장 자리까지 올랐다. 1969년 3선 개헌안 통과 때 국회의장을 했던 이가 바로 이효상이다.

1971년 대선 때 이효상은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 도토리 신세가 된다”라고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발언을 남겼다. 원암은 이효상처럼 교육행정가와 정치인으로 출세가도(?)를 달리진 않았으나 교육자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1950년 1월 25일 이규동은 국립 대구사범대학의 영문과 교수가 되었다. 교수 임명과 함께 도서관장도 겸직했다. 대구사범학교 졸업생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은 바로 박정희다. 이규동은 대구사범에 적을 뒀다는 것 말고도 박정희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그의 아들 이기영은 대구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정희 부대에서 군의관으로 일했다. 군의관 시절 이기영은 박정희 가족의 진료를 담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5월 28일, 대구사범대학과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을 합쳐 ‘국립 경북대학교’가 출범했다. 이규동은 고병간(高秉幹) 초대 총장이 경북대 캠퍼스 부지를 물색할 때 지금의 산격동 부지를 강력히 추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대구 변두리 중의 변두리로 꼽힌 산격동에 경북대가 널찍하게 자리 잡는데 ‘산파’ 역할을 한 셈이다. 경북대학교 교수가 된 이규동은 1952년 중학교 영어 교과서인 를 출간했다. 1957년에는 대학 영어 음성학 교재인 를 집필해서 발간했다.

한국전쟁 시절 이규동은 대구로 피난 온 고려대학교에도 강의를 나갔다. 그가 가르친 고려대 학생 중 한 명이 이규동이 쓴 교과서의 자습서를 만들어 보겠다고 나섰다. 이규동은 흔쾌히 허락하며 계몽사에 전화를 넣어주기도 했다. 훗날 이 학생은 영어 교재 출판사를 크게 키웠다. 그 학생의 이름은 민영빈(閔泳斌)이며,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출판사 이름이 YBM이다.

– 2편 대한민국 ‘사서 1호’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①편입니다.

<2021-05-1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나라 망한 을사년에 태어난 도서관계의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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