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모든 자원의 효과적 동원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그동안 조선인에게 허락되지 않은 ‘무기’를 쥐어주게 된다.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여 조선인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하게 한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바로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입소한 청년, 이은휘가 남긴 유품인 장행기다. 장행기는 지원병으로 차출되어 가는 청년들을 환송하기 위해 면에서 만들어 준 깃발이다.
⇐ 장행기壯行旗, 170X56
“축 육군병 지원자 훈련소 입소 궁본은휘 군 국민총력 김제군 월촌면 제남부락연맹”
지원병 출정 깃발인 장행기는 ‘장렬하게 떠난다’는 뜻이지만 조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이 죽으러 가는 깃발과 같다고 해서 ‘청춘만장靑春輓章’이라고 불렀다. 깃발 상단에는 금치훈장金鵄勳章을 중심으로 뒤에 일장기와 일군기를 어긋나게 배치하였다. 깃봉에 금치金鵄가 앉았는데 마치 훈장 위에 앉은 것처럼 보이도록 그려넣었다.
⇐ 금치훈장이 새겨진 엽서, 9.1X14.1
1890년에 제정된 일본의 훈장 가운데 하나로 일본제국의 육군과 해군을 대상으로 수여하였다. 금치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 건국의 상징새로 전쟁 승리의 대명사로 표현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다양한 디자인으로 활용되었다.
이은휘는 1921년 9월 9일 전북 김제군 월촌면 입석리 606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옆마을인 월촌면 복죽리의 처녀 정복례(당시 19세)와 결혼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된 이은휘는 부인과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림을 꾸리기 위해 일자리를 구해야 했다. 이리농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1년 지방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면사무소에 갔다가 지원병으로 끌려가고 말았다.
하필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어 지방 관청들이 경쟁적으로 지원병 수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고 있던 시기였다. 말이 ‘지원’이지 사실상 강제였다. 이은휘가 일본군으로 강제동원된 것은 ‘특별지원병’이라는 형식이었다.
당시 임신 8개월인 아내를 두고 이은휘는 1941년 6월 특별지원병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훈련생 때 휴가를 받고 집에 와서 막 태어난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부인과 눈물을 흘리던 것이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갓난아기와 사랑스런 신혼의 아내를 두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이은휘는 특별지원병이 아니라 특별희생자였던 것이다.
참혹한 전쟁에서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가족들에게 결국 ‘전장에서 왼쪽 가슴에 총상을 입어 전사’했다는 소식만 돌아왔다. 유골도 유품도 아무것도 없었다. 유수명부에 따르면 이은휘는 남방군 제8방면군 제20사단에서 보병으로 근무하다 1944년 7월 11일 전사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일제는 유족들의 의향에 관계없이 이은휘를 침략전쟁의 신으로 만들어 야스쿠니신사에 무단 합사시켜 버린 것이다. 결국 이은휘는 해방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채 영혼마저 야스쿠니신사에 유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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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동민 자료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