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에서 매달 발행하던 기관잡지(機關雜誌) <조선(朝鮮)> 1924년 3월호에는 「호모화(護謨靴) 전성(全盛)의 조선(朝鮮)」이라는 제목의 토막글 하나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호모’는 ‘고무(ゴム)’의 일본어식 음차(音借) 표기이므로, ‘호모화’는 곧 ‘고무신’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근시(近時) 호모화공업의 발달에 따라 가격이 저렴하고 내구력(耐久力)과 방수력(防水力)이 있어서 중류자 이하(中流者 以下)의 수요가 격증(激增)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선내생산(鮮內生産)의 상황을 보면, 대정 9년(1920년)에는 극히 미미했던 것이었으나 10년(1921년)에는 가격(價格) 17만 8천 원(圓)에 13만 7천 족(足)의 생산이 있었고, 11년(1922년)에는 일약(一躍) 94만 원에 달했으며, 12년(1923년)에는 아직 정확한 숫자를 판별하지는 못하나 적어도 280만 원(400만 족)의 거액에 달할 것이다. 이밖에 내지(內地, 일본)에서의 이입액(移入額)은 12년에는 약 480만 원(685만 족)이었으니까 내선(內鮮)을 합산하면 실로 1,165만 족이라는 놀랄만한 수요를 나타내고 있다.
호모화의 수용(需用) 탓에 양화(洋靴) 및 조선화(朝鮮靴)는 비상한 타격을 받았고, 대정 9년에는 양화의 생산이 32만 6천 족이었으나, 동 10년에는 18만 8천 족, 동 11년에는 다시 13만 3천 족으로 줄어들고 있다. 또 선화(鮮靴)의 쪽은 대정 9년에는 54만 4천 족이었다가, 10년에는 일시(一時) 70만 4천족으로 증가하였으나 11년에는 급전직하 32만 8천 족으로 감소했다.
이 글은 바야흐로 조선 고무신의 탄생과 더불어 가히 고무신의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일찍이 이 땅에 고무신의 등장은 1919년 무렵에 시작된 일이었는데, 이때까지는 일본 쪽에서 건너온 ‘단화형(短靴型)’ 고무화가 전부였다. 이것은 서양식 구두를 본떠 만든 형태이며, 구두 자체를 전부 고무로 만들었다고 하여 ‘총고무화(總ゴム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기존의 ‘경제화(經濟靴)’ 또는 ‘편리화(便利靴)’에 고무바닥만을 덧댄 ‘고무저화(底靴)’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값싸고 질기다”는 고무신 자체의 특징을 그대로 살린 ‘조선신발’ 형태의 고무신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21년 봄의 일이었다. 그 선두에 선 업체는 국산 고무신의 대명사로 여겨질 만큼 유명했던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신보> 1921년 2월 1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순고무 경제화 및 순고무 양화 광고문안’이 처음으로 수록된 것이 눈에 띈다.
본소(本所)에서 수년래(數年來) 고무품 제조(製造)에 대하여 기다(幾多) 연구(硏究)를 중(重)하여 금(今) 기 연찬(其 硏鑽)을 수성(遂成)하고 구주(歐洲)에 전왕견학(專往見學)한 기사(技師)를 고빙(雇聘)하여 공장(工場)을 신축(新築)하고 제조(製造)를 개시(開始)함은 아 조선(我 朝鮮)에서 본소(本所)가 비조(鼻祖)가 되고 취중(就中) 순(純)고무 경제화(經濟靴) 제조(製造)는 세계중(世界中) 다만 본소(本所)뿐이압. …… (중략)
경성부 용산 원정 1정목(京城府 龍山 元町 一丁目) 대륙고무공업소(大陸ゴム工業所) 경성 종로 1정목(京城 鐘路 一丁目) 위탁판매부(委託販賣部) 원창양행(元昌洋行)
여기에 대륙고무의 위탁판매부로 등장하는 ‘원창양행’(1919년 8월 18일 상호등록)은 원래 면포(綿布), 주단(綢緞), 저포(苧布), 모직(毛織) 등을 수입 판매하는 가게였으나 이때부터 고무신 총판매점으로 변신하였다. 이곳의 주인은 이하영(李夏榮, 1858~1929)의 장남 이규원(李圭元, 1890~1945)이었으며, 이하영은 익히 알려진 바대로 영어통역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 대한제국 시기에 이르러 외부대신과 법부대신을 지냈고 국권피탈 후에는 일제로부터 자작(子爵)의 작위를 부여받은 인물이었다.
대륙고무의 연혁을 서술한 몇몇 자료에 이곳에서 고무신을 생산 개시한 때가 1919년이라고 적어놓은 것이 곧잘 눈에 띄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회사에서 첫 고무신이 탄생한 것은 1921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선> 1923년 1월호에는 조선총독부 상공과(商工課)에서 정리한 「호모화(護謨靴)에 관한 조사」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는데, 특히 이 자료에는 ‘내지품(內地品)과 조선품(朝鮮品)의 공급상황’을 정리한 통계표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1919년도와 1920년도의 해당부분에는 ‘내지품 이입고’만 표시되어 있을 뿐 ‘조선내 고무신 생산고’에 관한 집계수치는 전무한 것으로 보더라도 고무신의 국내생산은 1921년부터 개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 관련 주요 연혁
이처럼 조선 고무신이 크게 득세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대륙고무공업소에서는 사세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에 따라 1922년 4월 6일에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전체 발행 주식수 1만 주 가운데 1천 주에 대하여 주식공모를 한다는 내용의 광고를 각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창립 발기인(創立 發起人)의 명단에 포함된 인사들의 면면이었다.
후작 박영효(侯爵 朴泳孝), 자작 이하영(子爵 李夏榮), 자작 이창훈(子爵 李昌薰), 남작 이윤용(男爵 李允用), 남작 이근호(男爵 李根澔), 주성근(朱性根), 박용삼(朴容三), 박종환(朴宗桓), 유혁로(柳赫魯), 야마기시 유타로(山岸佑太郞), 토미타 기사쿠(富田儀作), 나카니시 토라히코(中西虎彦), 타나카 요시지로(田中吉次郞),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 오키 야스노스케(大木安之助), 후쿠다겐이치(福田源一),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
여기에는 조선귀족 5인을 포함한 조선인 9인과 일본인 실업가 8인의 이름이 죽 나열되어 있는데, 가히 친일귀족세력과 일본자본의 결합체라는 평가가 나올만한 구성이었다. 천도교에서 발간한 월간잡지 <개벽(開闢)> 제33호(1923년 3월호)에는 농구생(弄球生) 필명의 「천현지황(天玄地黃)」이라는 글이 수록되어 있고, 이 가운데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실체를 꼬집는 내용도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조선인 전용(朝鮮人 專用)의 고무화(靴)]
일조결하(一朝決河)의 세(勢)로써 조선인의 이물계(履物界)를 여지없이 점탈(占奪)하여 매년 수천만 원의 이금(利金)을 흡수(吸收)하는 고무화(靴), 그야말로 식자(識者)의 혼담(魂膽)을 서늘케 한다. 참패를 당한 건유혜(乾油鞋), 목리(木履), 망혜(芒鞋) 등의 재래상(在來商)은 한번 개량책(改良策)도 강구해 볼 여지가 없이 그냥 무조건(無條件)으로 영원히 수(手)를 속(束)할 뿐인가.… (중략) … 요사이에 이것을 경영(經營) 보려고 소자본(小�本)으로써 공장배치(工場排置)를 한 데가 기개소(幾箇所)가 있는 듯하나 이런 것들은 아직 아희적 작업(兒戱的 作業)에 지나지 못할 뿐이오, 개중(箇中)에 가장 우승(優勝)한 지위(地位)에 서서 인기(人氣)를 끄으는 자(者)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大陸護謨工業株式會社)이다. 그러나 이 회사(會社)의 조직(組織)이야말로 좀 자미(滋味)스럽지 못하다. 표면(表面)의 광고(廣告)로는 조선인(朝鮮人)의 명의(名義)를 내여 세우고 이면(裏面)의 실권(實權)은 전부 일본인(日本人)의 장중(掌中)에서 놀아난다. 아아 천하(天下)가 받지 않는 고무화, 오직 조선사람의 돈이 맛나는가? 살피여라! 백천(百川)이 동해(東海)로만 경주(傾注)되는 줄을!!
<조선총독부관보> 1922년 9월 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22년 8월 15일에 설립된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 소재지는 경성부 원정 1정목 124번지(京城府 元町一丁目 24番地)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사업목적은 “호모(護謨, 고무)를 원료로 한 선화(鮮靴), 양화(洋靴), 지나화(支那靴) 및 기타 고무를 원료로 한 물품 일체의 제조 판매”라고 기재되어 있다.
취체역(取締役)에는 자작 이하영, 이규원, 자작 이창훈(자작 이근택의 습작자), 이명구(李明九, 남작 이윤용의 아들)와 일본인 이와마 료(岩間亮, 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서기 출신)가 이름을 올렸고, 이들 가운데 이하영이 대표취체역에 선임되었다. 이와 함께 감사역(監査役)에는 창립위원장이던 남작 이윤용을 비롯하여 조준식(趙俊植, 익산 거주)과 일본인 텐니치 츠네지로(天日常次郞)가 공동 취임하였다. 일본인 이와마 료는 1926년 1월 23일에 취체역에서 퇴임하였고, 도장관 출신의 중추원 참의였던 유혁로(柳赫魯, 1855~1940)가 그 자리를 대신하여 선임되어 종신재직(終身在職)하였다.
대륙고무의 유명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곳이 조선총독의 순시행로에 포함된 적도 있었다는 사실에서 잘 확인된다. 그리고 이러한 대륙고무의 유명세에 편승하여 무단으로 상표(商標)를 도용(盜用)하였다가 결국 신문지상을 통해 공개적인 사죄광고(謝罪廣告)를 게재해야 했던 사례들도 여러 건이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와중에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면서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자작 이하영이 1929년 3월 1일에 숨지자 그해 7월 26일에는 그동안 감사역 자리에 있던 남작 이윤용이 대표취체역 사장에 올랐고, 이하영의 아들인 이규원 역시 대표취체역 전무에 선임되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하나는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본점과 공장 소재지가 용산원정(龍山 元町, 지금의 원효로 1가)에서 벗어나 경성부 중림동(京城府 中林洞) 155번지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관보>에 게재되는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통해 확인해본즉, 이 일이 벌어진 때는 1932년 10월 20일이었다.
다시 1938년 9월 8일에 이르러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대표취체역 사장이던 남작 이윤용이 숨지자, 자연스레 자작 이규원이 홀로 대표취체역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관보> 1941년 3월 28일자에 수록된 「상업 및 법인등기」 항목을 보면, 1941년 1월 31일자로 기존의 취체역이던 권영일(權寧一), 윤정석(尹晶錫), 권영순(權寧順)은 물론이고 대표취체역이던 이규원(李圭元)과 감사역(監査役)이던 최상집(崔相集), 후지노 아이센(藤野愛泉), 이재영(李宰榮) 등이 일괄 사임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들을 대신하여 이날 츠지모토 케이조(辻本敬三)와 카네코 요지로(金子要次郞)가 새로운 대표취체역에 공동 취임하였고, 츠지모토 에이이치(辻本英一), 이모세 기이치로(妹背義一郞), 츠지모토 노보루(辻本昇) 등이 취체역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또한 감사역에는 쿠와바라 칸이치(桑原貫一)와 시모무라 카메(下村龜)가 선임되었는데, 여기에 나열된 이들은 모두 일본 오사카(大阪) 지역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었다.
이것으로 보면 바로 이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경영권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주식 지분 역시 이들의 수중으로 넘겨지면서 이 회사는 실질적으로 일본인 기업체로 전환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을 눈앞에 둔 바로 그 시기에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창설 이후 줄곧 전무와 사장으로 있던 자작 이규원이 숨졌다. <매일신보> 1945년 4월 28일자의 관련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알리고 있다.
조선귀족회(朝鮮貴族會) 부회장 이규원(李圭元) 자작은 그동안 숙환으로 가료중이던 바 24일 오전 한 시 부내 서대문구 중림정(中林町) 155번지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은 56세이며, 영결식은 28일 오전 열 시 자택에서 집행하는데 상주는 이종찬(李鍾贊) 소좌로 현재 출정중이다. 고(故) 이 자작은 경성에서 출생하여 한문사숙(漢文私塾)을 나와 서화(書畫)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왕직 시종(李王職 侍從), 대륙고무공업 사장 등으로 활동하였으며 현재 조선귀족회 부회장의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해방 직후에 <동아일보> 1946년 3월 20일자에 수록된 「사복(私腹)에 걸린 국재(國財), 1억 4천만 원, 70회사 공장을 적발, 군정청 감찰부(軍政廳 監察部)에서 즉시 전부 몰수」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회사와 공장을 새조선의 산업부흥이란 미명 하에 접수니 관리니 하여 맡아가지고 사리사복을 채우고 있던 곳을 대대적으로 적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바로 이들의 목록에 ‘대륙고무’도 포함된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이 적산기업체(敵産企業體)로 분류된 탓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이보다 한참의 세월이 더 흐르고 <경향신문> 1974년 1월 26일자에는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서울 서대문구 중림동 155의 2, 대표 이종호) 2층에서 불이나 2층과 1층 일부를 불태웠다는 내용의 기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보다 2년 뒤에 나온 <경향신문> 1976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주택지 195 공해업소 내년까지 이전(移轉) 명령」 제하의 기사에 매연, 폐수, 악취, 소음 등 을 유발하는 주거지역 내 공해업소의 하나로 ‘대륙아스타일(중림동 155)’이라는 회사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아마도 이것이 대륙고무공업에 관한 거의 막바지의 흔적인 셈인데, 한때 친일귀족들의 집합체이자 조선 고무신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륙고무의 화려했던 시절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저작권자 ⓒ 민족문제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