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 이상룡 선생 증손 이항증 이사
‘남아가 제 일신 아끼는 게 어디 있으랴/ 고향이 좋다고 머물러 슬퍼하지 말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물리라’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선생이 꼭 110년 전인 1911년 독립투쟁을 위해 서간도 망명길에 오르면서 지은 시 ‘거국음’의 마지막 부분이다. 석주는 망명 첫해에 우당 이회영 형제 등과 함께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 전신)를 열어 항일 무장 투쟁을 이끌 재목을 길러냈고 1919년에는 서간도 무장 항일운동단체가 결성한 군정부인 서로군정서 독판도 지냈다. 임시정부 국무령(1925~26)을 지내고 6년 뒤 생을 마칠 때 그는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에 싣고 가지 말라”고 유언했다.
석주 생가이자 경북 안동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은 지난해 말 마당을 가로지르던 열차 운행이 멈추면서 복원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문화재청과 경북도, 안동시는 280억 원을 들여 2025년까지 일제가 기찻길을 놓아 훼손된 99칸 임청각의 원형을 살리고 임청각 사람들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기념관도 세울 예정이다.
지난 25일 오전 서울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서 석주 증손 이항증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석주 고손이자 종손인 이창수씨, 임청각 후손 이용득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났다.
임청각은 ‘독립유공자 11명을 배출한 구국의 성지’다. 석주의 부인(김우락)과 아들(준형), 손자(병화)를 비롯해 임청각 사람 11명이 독립운동 서훈을 받았고 석주의 처가와 사돈집까지 하면 40여 명이다. 이 이사의 조부 이준형 선생은 부친의 유고 정리를 끝낸 1942년 생일날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고 부친 이병화 선생은 일본 경찰에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52년에 세상을 떴다. 이 이사의 큰 형은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소행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숨졌고, 둘째 형은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셋째와 넷째 형은 철도와 의료 사고로 숨졌다. 다섯째 아들인 그가 증조부 기념사업을 이끄는 이유다. 종손 창수씨는 넷째 형의 큰아들이다.
이 이사는 4년 뒤 임청각에 기념관(역사문화공유관)이 생긴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100년 뒤에도 사람들이 임청각을 찾게 하려면 독립운동 정신과 유물을 보여주는 공간이 중요한 데 이번에 안동시와 문화재청이 절반씩 예산을 대 기념관을 짓기로 해 다행입니다.” 기념관에 전시할 대표 유물을 묻자 그는 “증조부가 김규식 선생한테 선물 받아 들고 다니던 용지팡이와 독립운동 문건을 쓸 때 늘 사용했던 벼루 등이 포함될 것”이라고 밝혔다.
5년 전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의 임청각 방문을 주선한 이 고문은 이번에도 기념관 예산 확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단다. “문 대통령이 당 대표 때 제가 임청각 이야기를 하자 상당한 관심을 보이더군요. 문 대통령이 취임 뒤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청각과 석주 선생을 언급한 게 복원에 큰 힘이 됐죠.”(이용득)
현 정부 들어 대통령까지 나서 임청각 정신을 기렸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가 있다. 바로 서훈 조정이다. 석주는 1962년에 3등급 서훈인 독립장을 받았다. “4년 전에 증조부 독립운동 자료를 챙겨 서울보훈청에 보냈지만 지금껏 공식 답변을 받지 못했어요. 서훈 때 심사를 맡은 교수 두 명이 나중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랐어요. 친일역사학자가 독립운동 서훈 심사를 하다니 창피한 일이죠. 그때 심사위원회도 꾸리지 않고 정부에서 몇 사람이 신문 기사를 보고 결정했어요.” 현 상훈법은 일단 정해진 서훈은 바꿀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중국인 장제스도 1등급인데요. 헌법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한다고 해놓고 임정 수반을 지낸 분이 3등급이라니, 말이 됩니까. 보훈 당국에서 여운형 선생과 유관순 열사는 2등급과 3등급에서 사후 공적에 대해 추가 서훈하는 방식으로 1등급을 결정했다고 하더군요. 임청각에 하루에도 몇백명씩 찾아오는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정신을 길러주는 석주 선생께 1등급을 추가 서훈해 나라 위한 희생은 나라에서 끝까지 책임진다는 산 교육의 장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 (이용득)
석주의 손자며느리이자 이 이사의 모친 허은(1909~97) 선생은 3년 전에 서훈(애족장)을 받았다. “어머니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가 서훈에 영향을 미쳤죠. 어머니가 책에 독립군 밥 해먹이고 군복 만들고 해진 옷을 기워주는 등 의식주 이야기를 자세히 밝혔거든요. 사실 여자의 이런 노동이 없었다면 한 달도 독립운동을 못 했을 겁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내가 뼈 빠지게 노력했지만 아무도 독립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도 하셨죠. 증조부와 함께 독립운동을 한 김동삼 선생의 며느리 이해동 선생도 80년대 후반에 영구 귀국한 뒤 ‘독립운동의 반은 시어머니 몫인데 시아버지만 훌륭하다고 말한다’고 나무라셨죠. 중국은 남녀차별이 없는데 한국은 차별한다고요.”
작년말 임청각 훼손 철로 철거로
2025년 완공 예정 복원사업 탄력
석주 정신 보여주는 기념관도 건립
“임정 수반 지냈는데 3등급 서훈
여운형·유관순처럼 등급 조정을
독립운동의 반 여성 몫 인정해야”
허은 선생 회고록에는 이 이사가 어릴 때 ‘밥 한번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고 말한 내용이 나온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어요. 중학교를 나온 뒤에는 고등학교에 다니려고 여동생과 같이 보육원에 갔어요. 낮에는 보육원 심부름을 하고 밤에는 대구 영신고 야간부를 다녔죠.” 그는 안동중을 다닐 때 내지 못한 한 학기 등록금을 졸업(57년) 50년 뒤 뒤늦게 납부한 일도 했다. 증조부가 99칸 임청각 주인이었는데, 남은 재산이나 도와주는 이가 없었냐고 하자 그의 답은 이렇다.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가장이 없으면 (주변에서) 그 재산을 가만히 놔두지 않아요.”
이 이사 등 석주 후손이 힘겹게 끌어온 임청각 소유권 소송은 아직도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단다. “증조부가 망명 2년 뒤 만주 생활과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조부를 귀국시켜 임청각을 팔려고 했지만 매매가 잘 안 됐어요. 그때 당시 3천원 정도로 추정되는 임청각을 매매 형태(첫 계약서는 2천원, 두 번째 계약서는 1천원)를 취해 문중 돈 500원을 받았고 그 후 문중대표 4명 이름으로 명의신탁했어요. 이 문제 때문에 소송을 해 임청각 건물 소유권은 해결했지만 아직도 택지와 주변 임야는 문중 소유로 돼 있어요.” 그는 해방 후 임청각 후손이 겪은 경제적 곤궁을 친일 청산의 실패와 연결지었다. “집에 도둑이 들면 신고해야 하는데 해방 후 친일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어디 신고할 곳이 없었어요.” 이런 말도 했다. “친일 대가로 받은 돈으로 산 땅만큼은 해방 직후 국가가 회수해야 했는데 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하고 싶어도 쉽지 않아요.”
“증조부는 솔선수범의 지도자
가족과 제자에게 더 엄격했죠”
기득권을 내려놓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증조부의 뜻을 언제쯤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냐고 하자 그는 “90년대 초 <석주유고>를 읽고서”라고 답했다. 석주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석주유고>는 1973년에 처음 출간됐다. “유고를 보면서 ‘이 어른 참 무서운 사람이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가족과 제자 등 측근에게 더 엄격하셨더군요. ‘이래서 (증조부가) 지도자를 했구나’ 생각했죠.” 그는 1994년에 20대 후반부터 다니던 은행에서 명퇴하고 퇴직금으로 증조부와 조부, 부친의 유고 문집을 새로 출간하기도 했다. 종손 이창수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아버지께서 제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고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에 대해 늘 말씀하셨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할머니(허은)가 독립운동 이야기 뿐 아니라 친일파 이야기도 하면서 이겨내라고 하셨죠. 올바른 정신으로 열심히 살면서 그들을 넘어서야 한다고요.”
증조부의 행적 중 가장 본받을 점이 뭔지 묻자 이 이사는 “솔선수범”이라고 답했다. “100년 전 안동을 떠날 때 선발대가 일제 경찰에 붙들리는 바람에 일행 중 일부가 주저하자 증조부는 ‘나라를 찾겠다면서 그것도 겁내면 되겠냐’고 꾸짖었다고 해요. 1928년 손주(병화)가 독립운동단체인 재중한인청년동맹 간부로 뽑히자 ‘독자라 조부와 부친을 돌봐야 한다’고 고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증조부가 ‘나라 찾겠다는 사람이 집 걱정해서 되겠냐’고 나무랐다고 해요. 공사가 엄격한 분이었죠.”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2021-06-29>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