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는 3일 죽산 조봉암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강화군을 찾아 죽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조봉암 생가터 및 활동지역 현장 답사’를 개최했다.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 ‘2021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2차 행사’로 마련된 이 날 답사는 조봉암 평전의 저자인 소설가 이원규 작가의 해설과 안내로 진행됐다.
답사단은 강화뉴스 회의실에 모여 이 작가로부터 죽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죽산의 모교인 강화초등학교와 근무지였던 강화읍사무소, 젊은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강화 중앙교회, 죽산 추모비가 서 있는 갑곶돈대, 선원면 생가터 등을 차례로 돌아봤다.
죽산은 1899년 강화도 선원면 금월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장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엇갈리지만, 선원사지 정면의 금월리 대문촌 오른편 작은 촌락인 ‘가지마을’이 가장 유력하게 꼽힌다.
이원규 작가는 “죽산의 가문 족보인 ‘창녕조씨 찬성공파보’가 직계 조상들의 묘소 대부분을 금월리로 기록하고 있는 점과 관련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금월리 대문촌과 가지마을 주변이 확실하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 2001년 6월 죽산 추모사업회가 강화읍사무소 앞을 생가터로 오인하고 건립한 ‘생가터 기념비’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잘못된 위치에 덩그러니 남아있다.
1911년 강화초등학교를 졸업한 죽산은 농업보습학교를 마친 뒤 1913년 생계를 위해 강화군청 사환 임시고원으로 잠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대열에 참여했다가 투옥돼 그해 9월 말까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출옥 이후 다음 해인 1920년 1월 경성 YMCA 중학부에 입학했으나 5월 말 일어난 대동단 사건으로 또다시 평양경찰서에 연행됐다가 석방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주오대학(中央大学) 전문부 정경학과 1학년에 다니던 중 박열 등이 조직한 공산주의 계열 단체인 ‘흑도회’에 참가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이어 1922년 모스크바로 넘어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수업하던 중 폐결핵으로 중퇴하고 다시 귀국해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뒤 이번에는 상하이로 넘어가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경에게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 7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가석방으로 출소한 뒤 인천에 정착한 그는 미곡상업계 인사들이 마련해준 비강업 조합에 몸담았으나 일제 말기인 1945년 1월 예비구금령으로 일본 헌병에게 체포돼 재차 구금됐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여운형 선생이 손수 필동 헌병대 감방문을 열어줘 세상에 다시 나온 죽산은 건준 인천지부, 인천 민전 등을 조직했으나, 민전 회장을 사임한 뒤 공산주의와 결별하는 전향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인천을구에서 제헌으로 당선돼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무소속 구락부 대표로 활동하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초대 농림부장관을 맡아 ‘혁명 없이 세계 최고의 토지균등성을 확보했다’고 평가받은 ‘농지개혁법’을 주도했다.
1952년에는 제2대 국회 후반기 부의장으로 활약하다 8월 5일 실시된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70만 표를 획득하면서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했으며 56년 5월 15일 치러진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 표를 얻어 이승만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한 뒤 58년 1월 서울시경의 함정에 걸려들어 간첩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5년 형, 2심에서 사형을 각각 선고받은 뒤 59년 7월 31일 재심이 기각된 지 17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그의 가족과 뜻있는 인사들의 노력으로 서거 53년만인 2011년 2월 11일 대법원의 무죄 선고를 끌어냈으나, 2012년 국가보훈처가 독립 유공 서훈을 유보하는 결정을 내린 뒤 지금까지도 죽산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원규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자 걸출한 정치인인 죽산의 가장 큰 업적은 농지개혁을 통해 남한의 공산화를 막아내고 국가부흥의 발판을 마련 한 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착취당하는 일 없이 모든 국민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평등과 정의’의 진보 정신은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는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 날개를 이뤄 선의의 경쟁을 하고 남과 북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뤄내는 것이 죽산이 남긴 숙제”라며 “무엇보다 먼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죽산의 국가 유공 수훈부터 관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글·사진=정찬흥 논설위원 report61@incheonilbo.com
<2021-07-03>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