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2학년 때 일본인들이 ‘대동아전쟁’이라 부른 태평양전쟁을 도발했고 전쟁 초에는 일본군이 연전연승한다고 야단이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전쟁이 아시아를 유럽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했다. 조선과 만주와 대만을 저들의 가혹한 식민통치 아래 둔 채 도발한 대동아전쟁이 아시아인의 해방을 위한 전쟁이라 떠벌린 것이다.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에서 전사했다는 9명인가를 군신(軍神)으로 찬양한 노래를 배우기도 했던 것 같고, 일본군이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당시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이던) 씽가포르를 함락한 기념으로 초등학생들에게 고무공을 하나씩 주어 학교 운동장이 온통 고무공 천지였고, 말레이시아 고무로 만들었다는 운동화가 학생들에게 지급되기도 했다.
이것은 1933년 경남 마산 태생인 강만길(姜萬吉, 고려대 명예교수) 선생이 남긴 자서전 <역사가의 시간>(창비, 2010), 41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가 기억하는 고무공 천지로 변한 학교운동장이 도대체 어떠한 상황으로 생겨난 것이었는지가 궁금하여 관련 자료 몇 가지를 뒤져보았더니, <매일신보> 1942년 7월 8일자에 수록된 「빛나는 남방 선물(南方 膳物), 금일(今日) 고무공 첫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군인 아저씨, 참으로 고맙습니다. 대동아전쟁의 혁혁한 전과에 의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고무산지인 마레이 보르네오가 우리 세력 범위 안에 들어온 오늘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고무를 제일 많이 가진 나라가 되었고 그 대신 동아의 천지에서 쫓겨난 미국과 영국은 지금 고무가 없어서 쩔쩔 매고 있는 형편이다. 관계 당국에서는 이와 같은 승리의 선물을 하루바삐 국내로 들여다가 총후에서 싸우고 있는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준비를 바삐 하고 있는데 위선 전첩축하기념 고무공을 소국민에게 제1회 배급을 8일의 대조봉대일에 하기로 되었다. 이것은 전선 국민학교 아동들에게 한 개씩 주기로 된 것이다. 운반관계로 8일에는 경성을 비롯하여 각 도청 소재지에 있는 국민학교 남자 아동에게만 학교에서 직접 배급하고 여자용은 한 10여 일 늦어질 터인데 값은 남자용이 20전, 여자용이 25전으로 결정되었다. 중학생과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인 운동화, 지까다비도 이어 들어와 겨울까지는 배급하기로 될 터인데 승리의 선물에 우리는 감사하며 필승 신념을 더욱 굳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여기에 나오는 소국민(小國民)이라는 것은 전시체제기에 ‘어린 황국민’이란 정도의 의미로 어린이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글에는 일제가 잇따른 침략전쟁의 말미에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과 더불어 전선을 남방(南方)으로 확대하여 1942년 2월에는 신가파(新嘉坡, 싱가폴)를 함락하였고, 그 결과 뜻하지 않게 세계 최대의 고무 생산국으로 급부상하였다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이 과정에서 확보된 풍부한 고무자원을 활용하여 고무공(ゴム毬; ゴムマリ), 운동화(運動靴), 지카다비(地下足袋, 바닥에 고무를 덧댄 버선 모양의 작업화), 게시고무(消しゴム, 지우개) 등이 만들어졌고, 다시 이것을 전첩기념선물(戰捷記念膳物)로 배급하는 방식으로 그들 나름의 전승분위기를 한껏 고취하는 수단으로 삼게 된다. 또한 이러한 선물의 수혜대상은 비단 ‘내지(內地, 일본 국내)’에만 국한되지 않고 식민지 조선에도 널리 미치게 되었으니, 마침내 이른바 ‘황군(皇軍)’ 덕분에 남방전선에서 확보된 고무로 만든 ‘전첩 축하 고무공(戰捷 祝賀 ゴムボール)’이 조선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처음 전달된 것이 바로 1942년 7월의 대조봉대일(大詔奉戴日; 미국과 영국에 대해 선전포고의 조서가 내려진 1941년 12월 8일을 기려 매달 8일로 정하여 전쟁결의를 새로 다지는 날)이었다.
곧이어 고무신과 지카다비 등의 제품도 대량으로 흘러들어왔는데, <매일신보> 1942년 7월 28일에 수록된 「황군(皇軍)의 선물(膳物) 고무신, 전첩(戰捷)을 축하(祝賀) 조선(朝鮮)에 골고루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에는 각 도별로 배당된 수량까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혁혁한 남방 전과의 선물로서 전선의 황군용사들로부터 총후반도로 보내어 오는 고무신, ‘지까다비’등의 고무제품은 총후 국민들로 하여금 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더욱 돋우고 특히 고무공은 소국민인 학동들로부터 ‘병정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크게 환영되었는데 이번에는 다시 제2회 고무제품의 배급과 함께 이름도 빛나는 ‘제2회 전첩축하 고무제품배급’이라는 이름을 가진 다량의 특별배급 고무신이 들어왔다.
총수는 270만 켤레로 그 내용은 ▲ 운동화(運動靴) 820,000족(足), ▲ 지까다비 300,000족, ▲ 기타고무신 편리화(便利靴) 178,000족이고, 각 도별의 배급할당 예정수는
1. 운동화
경기 19,100/ 충북 19,700/ 충남 41,800/ 전북 45,900/ 전남 41,800/ 경북 73,000/ 경남 93,500/ 황해
44,300/ 평남 74,600/ 평북 44,300/ 강원 27,900/ 함남 59,800/ 함북 37,800
2. 지까다비
경기 31,200/ 충북 10,200/ 충남 16,800/ 전북 16,800/ 전남 24,900/ 경북 24,300/ 경남 26,700/ 황해 22,500/ 평남 25,200/ 평북 25,500/ 강원 24,900/ 함남 28,200/ 함북 22,800
으로 되어 있으며, 이 중의 37만 켤레가 특별배급의 ‘전첩축하배급’으로 되어 있어 제1회 배급보다는 훨씬 많다. 경성부내에 배급 할당된 총수는 19만 1천 4백 켤레로 그 내용은
▲ 지까다비 9,900족, ▲ 편리화 20,600족, ▲ 일반용 운동화 12,300족, ▲ 동(同) 학생용 120,600족인데 제1회 때보다 약 4만 켤레가 더 많다. 배급은 8월 초에 각지 소매상조합과 도연맹, 군, 부, 읍, 면 연맹으로부터 다시 각 애국반을 거쳐서 또는 각 학교로 전선 일제히 산업전사들과 학도들에게 배급되기로 되었다.
이를 테면 느닷없는 고무제품의 풍년 사태는 바로 이러한 침략전쟁이 빚어낸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41년 11월 22일자에 수록된 「불인(佛印)서 고무공, 소국민(小國民)에게 배급(配給)」 제하의 기사는 싱가폴 함락에 앞서 이미 고무제품을 활용한 선물공세가 시도된 선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도쿄전화(東京電話)] 새해도 하루하루 가까워 오는데 이것은 또 굉장히 반가운 선사 ―. 늦어도 오는 정월까지에는 우리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우방 불인(佛印)에서 수입된 고무를 재료로 하여 전국 25만의 귀여운 소국민들에게 25만여 타(打)나 되는 고무공(毬)과 4할이나 고무를 섞은 운동화 또는 일반노동자에게도 역시 4할을 섞은 지까다비가 배급된다. 우리 제국과 불인과는 지난 7월에 공동방위가 체결된 이래로 불인 측의 호의로서 다량의 고무가 수입되어 그 중의 일부분이 상공성을 위시하여 육, 해, 문부성, 후생성과 기획원의 알선으로 귀여운 소국민들과 생산 확충에 밤낮을 헤아리지 않고 감투하는 산업전사 혹은 전선에서 활약하는 황군장병들의 적성에 대하여 보답키로 되었다.
고무공(球)의 수효는 남자는 3인에 한 개, 여자는 5인에 한 개씩 각각 배급되는 셈이니 결국은 각 국민학교에서 추첨케 될 터이나 종래와 같이 전표는 물론 학교장의 증명서도 필요 없게 되며 그 위에 품질은 사변 전과 똑같게 하였으며 고무공, 운동화, 지까다비 등은 모두 ‘일불인공동방위기념’이라는 ‘마크’를 넣게 되었다. 배급될 상세한 수량은 고무공이 소년용 9만 5천 30타(打, 1개에 가격이 24전씩이며 3인에게 한 개씩 배급될 터), 여자용 6만 1천 6백 40타(1개에 40전씩이며 5인에게 1개씩)이며 배급할 시기는 제1회가 금월말 내로 되어서 정월 설놀이까지에는 충분히 배급될 터이고 배급할 순서는 우선 6대 도시에서부터 먼저 시작하여 차츰 각 지방으로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불인(佛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를 말하며, 1940년 6월 독일의 프랑스 점령과 비시 정권(Vichy Regime)의 등장에 따라 이 지역이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로 변하게 되자 일제가 일본군 진주와 남방 자원의 획득 기회로 삼고자 적극 개입한 결과물이 ‘일불인 공동방위 의정서(日佛印 共同防衛 議定書, 1941.7.23)’였다. 그러니까 이때에도 이 협정의 성사를 기념하여 국민학교 학생들에게 ‘기념 마크’가 새겨진 고무공을 저렴하게 배급한 전례가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옛 신문을 뒤적이다 보니 일찍이 이러한 고무제품의 배급과 아주 유사한 사례도 하나 더 눈에 띈다. 만주사변 직후 1933년에 맞이하는 제2회 사변기념일에 등장한 이른바 ‘만주빵(滿洲パン)’이 바로 그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매일신보> 1933년 9월 15일자에 수록된 「17, 8 양일(兩日)에 만주(滿洲)빵 판매(販賣), 시내의 빵은 전부 이것으로, 기념계획(紀念計劃)의 일항목(一項目)」 제하의 기사에서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20사단 경리부 작업소에서는 오는 18일 사변 당일 만주 소산인 소맥, 대두, 조, 고량 등 10종 곡물과 꿀과 계란을 가해서 ‘만주빵’을 제조해서 용산 일대 군인 가족 7천 인에게 노놔주기로 되었다. 그리고 18일 해행사에서 거행하는 기념연에도 특제빵을 사용할 터이요, 이것을 다만 군인의 가족에게만 배급해서는 널리 그 뜻을 알리지 못할 염려가 있어 일반 시민에게도 선전하기 위하여 13일에는 시내 각처 ‘빵’ 제조업자를 시켜 보통 ‘빵’의 제조는 중지하고 만주빵을 제조해서 전 시민에게 널리 팔게 할 터이라 한다.
일제가 만주 일대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그곳에다 자신들의 뜻으로 만주국(滿洲國)을 성립시켰으며, 그 와중에 만주사변을 기념한답시고 만주 벌판에서 생산된 곡식으로 만들어낸 것이 만주빵이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이 자랑스런 전리품처럼 자신의 점령지역에서 들여와 다른 식민지역에 유통시킨 이국적이거나 이색적인 물품이 어디 이것뿐이었으랴!
지금으로서는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경성의 거리마다 바나나와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이 넘쳐나고 해구신(海狗腎)에 관한 광고가 신문지상에 잇따라 등장한 것도 알고 보니 이러한 연결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바나나와 파인애플이 일본제국의 식민지인 대만(臺灣)에서 들여온 것이고, 해구신 역시 그들의 점령지역이었던 화태청(樺太廳; 사할린) 관영(官營)으로 포획된 것이었으므로 결국 이들 모두가 일제의 식민지배가 가져다 준 부산물이었다는 점에서 그저 씁쓰레한 웃음만 짓게 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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