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회원 마당]
이육사의 삶과 문학
김유 중국 광동지부장
한복을 입은 이육사 선생(앞줄 오른쪽)의 젊은 시절 모습. 뒷줄에 한복 입은 이는 바로 밑의 동생인 이원일 선생이다. 이육사문학관 제공
군자마을에서 하루를 보내고 차는 큰 길로 나와 안동호를 옆으로 끼고 달렸다. 마을의 방주라고 일컬어지는 친구는 몸이 불편한 나를 위해 고가(古家)의 전통주택임에도 화장실이 옆에 붙은 큰 방을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새벽 3시까지 그동안 밀린 이야기로 분주하였다. 늦잠을 허용하지 않은 한국식 전통고가에서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벌써 일어난 그의 연락을 받고 식당으로 향하였다.
어젯밤 내내 울었던 뒷산의 소쩍새 소리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움과 함께 나를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어젯밤 친구와 헤어질 때 툇마루에 서서 내려다본 안채 마당은 쏟아지는 달빛으로 환하였다. 정적으로 싸인 한밤중의 고택, 느껴지는 세월의 중압감, 까맣게 비쳐주는 뒷산의 산그늘은 지금이 삼경이고 이육사가 그의 수필에서 말한 것처럼 삼태성(三台星)이 은하를 건너가는 때이기 때문에 그렇게도 밝았을까. 애끊는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쩌면 저 뒷산을 경계로 육사의 따님 이옥비 여사와 같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지리적 위치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실 안동의 유림은 독립운동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공산주의운동의 핵심지역이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가 많다는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안동은 또한 종놈들은 절대 인정할 수 없고 전통을 무시할 수 없다는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보민단을 조직하여 동학을 반대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라가 어려울 적에 의병이 가장 많이 나온 것도 이 지역이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무언가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할일은 하는 곳이 안동이 아닐까. 동학을 반대하면서도 노비들을 풀어주고 전답들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며, 심지어는 공산주의운동마저 횡행했던 곳, 그곳이 안동이다.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안동시 도산면 원촌리 881번지에서 태어나 1944년 1월 16일 새벽 일본 영사관이 운영하는 중국 베이징 동창후통 지하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마흔 살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열일곱 번 일제에 의해 구금되었다. 그때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모진 고문이었으나 그는 한번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이육사는 최후의 순간에도 일제 감옥 안에 있었으니 결국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항일해방투쟁의 가시밭길을 불사신으로 살다가 순국한 것이다.
이육사는 보수적인 집안의 환경에서 자라났으나 정신적 지주였던 할아버지인 치헌공 중직은 동학을 반대하는 여느 유림과는 달리 노비문서를 불태우거나 노비들에게 토지를 일괄 무상분배하여 주기도 하였다. 또 이육사 본인은 사해동포를 주장하는 레닌을 숭상하고 일본과 화평을 희망하는 장개석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성격이 순결하고 고식적이어서 국민당 돈을 받아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김원봉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의열단의 일원이 아니었다는데 동의한다. 역사는 추론을 떠나 있는 그대로 쓰여야 하며 신화에 의지하여서도 아니 된다.
이육사는 1933년 남경에 있는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식에서 그가 기획한 연극 <지하실>이 무대에 올랐다. 잠시 <지하실>의 내용을 보면, 노동운동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각성을 말하고 공산주의사상을 이야기한다. 즉, “마침내 공산제도가 실현되어 토지는 국유로 되어서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식당 일터 주거 등이 노동자에게 각각 지정되어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가 실현되었으므로 그들은 크게 기뻐하여 ‘조선혁명 성공 만세’를 고창하고 폐막하였다.” <지하실>에서 이육사는 극본을 썼을 뿐이 아니라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이육사는 모두 6형제였다. 자신은 둘째이고 그 아래아래 동생은 이원조로서 동경법정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시인이며 평론가였다. 이원조는 이육사의 유고를 편집하여 1946년 <육사시집>을 내었고 감동적인 평문을 쓴 바 있다. 그는 박헌영을 따라 1947년 말에 월북하였다. 1953년에 남로당 숙청 때 투옥되었으며 1955년에 옥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러했던 그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해방 후의 어지러운 상황이라든지 반민특위의 좌절 그리고 연좌법의 실시 하에서 육사라면 어찌하였을까. 어쩌면 그가 동생과 같이 월북하지는 않았을까. 차라리 해방되기 전에 순국함으로써 그 이름을 지금까지 아름답고 고귀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멀리 갈 것도 없이 하나 남은 혈육 이옥비 여사의 겪을 수 있는 것은 모두 겪었다고 하는 이야기로 이해가 간다. 한국을 떠나야만 했던 개인적인 슬픈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칼 같은 성격으로 외롭고 힘들어 했던 친어머니와 외갓집 식구들, 해방 후 극심한 이념의 대립, 독립운동가의 자손임을 숨기고 살아온 세월들, 청소부 그리고 외제 담배장사, 한때 순경만 보면 가슴이 덜컹했던 시절,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지금도 강대국의 앞잡이가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원한의 증폭, 그러다가 그녀는 아버지가 더 큰 대의를 위해 하나 있는 목숨을 바쳤으며,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함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성경을 세 번씩이나 필사하고 나서야 삭일 수 있었던 아픔이었으리라.
마찬가지로 육사라는 존재는 그의 유고시 ‘광야’의 광(曠)이 넓은 광(廣)이 아닌 빌 광(曠)이며 ‘모든 산맥’의 맥은 줄기 맥(脈)이 아니라 마주볼 맥(脉)이라는 것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광야(曠野)….모든 산맥(山脉)들이/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차마 이곳은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 시대의 지성, 희생양으로서 그가 사회주의를 환영하고 공산주의를 공부하였다는 것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중에 실망하는 일이 없게 된다. 우리 스스로 이제는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자존심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